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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의 배신 - 왜 가전제품은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는가
김덕호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20년 4월
평점 :
세탁기의 배신- 왜 가전제품은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는가.
도서관에서 그냥 손이 가는 바람에 집어왔다가, 대충 훑어보니 생각보다 학술적인 느낌이어서 쉬이 펼쳐지진 않았다. 그러다 한번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재밌게 잘 읽었다.
가정일에 매이게 되면 될수록, 이 일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졌다. 다른 이들은 척척 잘만 해내는 청소 밥 설거지 육아를 왜 나는 이렇게 못하고, 그게 싫을까 하는데서 이쪽으로의 독서가 출발한 것 같다. 게다가 점점 내 위치를 기존의 ‘하녀’ 에 비춰보면서 ‘여성’ 이란 개념을 사회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하녀’와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되면 될수록 참담했다.
전통적으로 성별분업을 하며 살아온 줄 알았고, 이런 상황들이 그저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런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성별 분업이 명확히 이뤄진 게 고작 산업화 이후라는 얘길 듣고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알고 싶던 참이었다.
세탁기 밥솥 냉장고 등의 가전제품이 나오면서 여자들 살기 좋아졌다는 말은 살면서 몇번 들은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음식 장만을 위해 남성들이 하던 고기 다듬던 일은 정육점에 완전히 넘어갔고, 나무 하기, 장작패기, 물 길어오기 등의 일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반면 기타 허드렛일이라 여겨지던 나머지 집안일들은 고스란히 지금까지 대부분의 경우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 중산층 이상의 집안에서 가내하인이 처리하거나 외주를 주던 세탁, 요리, 청소, 설거지 육아 등은 가내하인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가 나빠지면서 하인을 하려는 사람이 점차 줄어 사라져버렸고 그 남은 일은 온전히 주부가 떠안게 되었다. 그에 상응하는 월급이나 인정은 없는 채로.
그렇다면 세탁기는 정말 배신을 한 것일까.
세탁은 집안일 중에서도 가장 고된 일에 속했다고 한다. 온가족의 빨래를 쭈그려 앉아 비비고 빨면 하루가 꼬박 걸렸고, 종일 그 자세로 하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는 증언이 많다. 예전엔 옷이 많지도 않았고 그리 자주 빨지도 않은 반면, 위생 개념이 바뀌면서 요즘은 매일 입었던 옷을 빤다. 세탁 빈도는 그에 따라 늘어났기 때문에 세탁에 들이는 시간은 결국 연간으로 계산해보면 전혀 줄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세탁기는 빨래를 분리하거나, 자동으로 널고, 마르면 다림질을 하거나 개어 옷장 속에 넣는 일까지 해주진 않는다. ‘전기하인’으로 인정하기엔 상당히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나, 가정과학 연구자들은 하인을 쓰지 못하는 환경을 대신하고 여성들도 맞벌이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집안일의 외주화를 생각해 내기도 했다. 이를테면 요리는 ‘배달음식’이나 공공주택의 공유 식당을 이용하는 것이다. 당시로선 너무 파격적 주장이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지금 둘러보면 어느정도 우리 생활에 많이 녹아있는 모습이긴 한 것 같다. 하지만 배달 음식으로 매 끼니를 먹는 것은 여전히 파격적이다. 하지만 상상해볼 순 있을 것 같다. 매끼니 배달음식을 먹고, 모든 빨래는 세탁소에 맡긴다면, 장보기 노동, 재료 소분 및 정리, 요리, 설거지, 세탁(분류, 넣기, 널기, 거두기) 노동이 사라진다. 그에 따라 집에 냉장고, 식기세척기, 세탁기, 건조기가 필요 없어진다. 그리고 해당 노동에 대한 댓가를 무료 노동에 의지하지 않고 전문가(요리사, 세탁소)에게 정당히 지불하게 될 것이다. 요즘엔 청소나 정리정돈까지도 외주를 줄 수 있다. 육아도 어린이집이 잘 되어 있어 외주가 가능하다. 완전히는 불가능하겠지만.
아무튼 집안일은 산업화 이후 여성의 그림자노동에 기대어 왔으나, 부부간의 평등한 업무 분담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들로 인해 부부간의 갈등, 젠더 갈등이 첨예해지는 것 같다. 가전제품이 진정한 전기하인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해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엔 아직 요원해보인다. 그렇다면 부부간 싸우지 말고 모든 것을 외주화 시키면 어떨까.
그러면 어느정도 해결이 될 것 같다. (육아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