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작가의 말처럼 이것은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족 드라마. 어떤 소설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이야기. 작가는 작품 속에서 주인공인 슬아 가족의 일상을 작가의 유쾌한 문장으로 그려내면서도, 그 속에 가족·노동·사랑·젠더·평등과 같은 주제들을 솜씨 있게 녹여냈다. 극적인 장치 없이도 그 모든 주제들을 일상 이야기 속에 담았다는 점에서 작가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하긴 아무리 재미난 일도, 어떤 심각한 주제들도 대부분 일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나에겐 일상이 아닌 것도 누군가에게는 일상일 수 있고, 잠시 일상을 떠날 수 있어도 그걸 지속할 순 없으니까. 비일상이 계속된다면 그때부터는 더는 비일상이 아니까.


하지만 주제 의식이 아무리 좋아도 대중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미라고 생각하는데, 난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소설이라기보다는 픽션을 많이 가미한 일상 에세이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슬아 작가의 에세이인 '일간 이슬아'가 작품 속 주인공인 슬아의 저작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나니, 이슬아 작가와 슬아를 분리해서 생각하기란 좀 어렵지 않을까. 어째서 저자는 작품 속에서 출판사 이름만 '헤엄'에서 '낮잠'으로 바꾸고 인물 이름은 그대로 썼을까. 내가 모르는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득 궁금하다. 그 점을 빼면 전반적으로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 붙인 '작가의 말'에서 가족을 벗어난 이야기도 써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는 어떨지 자못 기대된다. 



집안은 슬아 중심의 가녀장 체제로 재배치되었다. 오늘날 복희와 웅이는 슬아 밑에서 일한다. 출판사 업무뿐만 아니라 집안일도 부부의 몫이다. 웅이가 주로 청소와 빨래를 하고 복희가 부엌일을 책임진다. 복희의 월급은 웅이 월급의 두 배다.
"엄마의 노동이 아빠의 노동보다 대체 불가하기 때문이야."
가녀장이 말했다. 이에 관해 웅이는 어떠한 불만도 없다. - P40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살림을 직접 해본 가장만이 그렇게 돈을 쓴다. 살림만으로 어떻게 하루가 다 가버리는지, 그 시간을 아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에 그는 정식으로 복희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복희는 음식을 만드는 데만은 천재다. 슬아는 복희의 재능을 사서 누린다. 복희는 가장 잘하는 일로 돈을 번다. - P40

그 말은 다사다난한 노동의 역사를 품고 있다. 한때 웅이는 자동차 부품 상가의 직원이었고 수영 강사였고 노가다꾼이었고 목공소의 일꾼이었고 벽난로 시공자였고 산업 잠수사였고 대리운전 기사였고 트럭 운전사였다. 그 모든 일을 몸에 익히자 웬만한 현장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전에 웅이는 문학청년이었다. 복희도 슬아도 웅이 자신마저도 잊고 지내지만 말이다. 문예창작과 학부생으로서의 한 학기와 만능 노동자로서의 삼십 년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P51

슬아에게도 장군 못지않은 고유한 지랄성이 있기 때문이다. 룸미러에 비친 슬아의 얼굴이 무섭지는 않지만 슬아는 슬아 나름대로 예민하다. 하지만 사성장군을 모셔본 경력은 슬아의 운전기사로 일하는 내내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된다. 웅이는 지난 세월의 모든 노동이 이렇게 귀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결국 딸을 잘 모시려고 그 모든 일을 해온 것만 같다. - P52

슬아는 장군과 달리 자신의 신용카드를 차에 두고 내린다. 웅이가 운전병이던 시절 사성장군은 밥을 사 먹으라며 늘 만 원짜리 지폐 한 장만을 차에 두고 내렸는데, 돌아올 때마다 꼭 거스름돈을 확인하였다. 거스름돈을 정확히 돌려줘야 하는 웅이는 눈치가 보여서 늘 저렴한 메뉴를 사 먹을 수밖에 없었다. 끼니를 대충 때우고는 타이어와 보닛을 광나게 닦으며 장군을 기다렸다. 슬아를 기다리면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맘 편히 슬아의 카드로 밥을 먹고 간식을 사고 기름을 넣고 세차를 하고 넷플릭스를 시청하며 대기한다. 장군을 모시던 웅이는 이제 장녀를 모신다. 장녀와 맞담배를 피우면서 차를 몰고 퇴근한다. - P51

복희는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 채로, 그러니까 자신과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된 채로 서재를 떠난다. 서재를 떠나 부엌으로 간다. 저녁을 차릴 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책을 읽지 않아도 살 수 있고 살아가야 하지만, 밥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한 끼의 식사는 한 편의 글만한 대접도 못 받는다. - P235

"‘엄마 손맛‘이란 말은 있어도 ‘아빠 손맛‘이란 말은 없어요. 집밥에 대한 향수도 대부분 ‘아빠 밥‘이 아닌 ‘엄마 밥‘에 국한되어 있고요. 한편 식당 종업원을 ‘이모‘라고는 불러도 ‘고모‘라고는 절대 안 부르죠. 밥하거나 살림하거나 돌보는 여자들의 호칭은 모계 쪽 여자들과 더 유관한 느낌이야. 무의식 중에 고모를 이모의 우위에 두는 건 아닐까?" - P262

가족의 유산 중 좋은 것만을 물려받을 수 있을까.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멀리 갈 수 있을까.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인 채로 말이다. 슬아가 아직 탐구중인 그 일을 미래의 아이는 좀더 수월히 해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 P307

복희가 기쁜 마음으로 무화과를 딴다. 복희에게 아름다움이란 계절의 흐름, 맑은 날에나 궂은날에나 자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들. 웅이에게 아름다움이란 슬픔과 기쁨의 극치를 다 아는 가수의 목소리. 밥하고 글쓰는 두 여자. 슬아에게 아름다움이란 단정하고 힘 있는 언어, 그리고 동료가 된 모부의 뒷모습. - P308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팀이 되고자 한다. 가족일수록 그래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 - P308

슬아는 집으로 돌아가버린 어린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월화수목금토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기 위해서라고. 다시 잘해볼 기회를 주려고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라고. 그러느라 복희는 창틀을 닦고, 웅이는 바닥을 밀고, 슬아는 썼던 글을 고치고 또 새 글을 쓴다고.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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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꾸준하게 > 공자가 말하는, 우리가 배워야 하는 이유

예전에 책 쓰기 수업(온라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각자 자유 주제로 글을 쓰고 온라인에 올리면 강사가 코멘트와 함께 약간의 첨삭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미션을 완수하면 80% 이상 환급받는 강의라서 열심히 썼던 기억이 난다.

난 ‘고전 읽기‘라는 프로젝트를 내걸고 매주 고전 두 권을 읽고 서평 두 편을 썼다. 다른 책도 아니고 고전을, 일주일에 한 편도 아니고 두 편이라니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돈이 걸려서 그런지 결국 다 쓰긴 했다.

그렇게 완성한 원고는 책으로 엮어서 지금 내 서가에 있다. 알라딘 서재에도 일부 싣긴 했지만 전체 글은 브런치에 있으니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그때 쓴 더 많은 글이 궁금한 사람은 아래 링크로 오시길.

https://brunch.co.kr/brunchbook/classics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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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중·고딩 시절 윤리와 도덕 과목을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만점 아니면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을 정도였는데도 생각나는 여성 철학자가 없다. 그나마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유일하게 곧바로 떠올랐던 한나 아렌트(책에서는 '해나 아렌트'라고 나오던)도 내가 옛날에 혼자 책을 읽고 알게된 이름이었다. 


이런 일이 단지 역사만의 일은 아닐 테다. 내가 어려서부터 알았던 여성 과학자도 퀴리부인 정도. 물론 해당 학문에 관심이 많다면 더 많은 이름을 알았겠지만, 왜 공교육에서는 여성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여성사를 다룬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나도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테니까. 우리에겐 더 많은 여성사가 필요하다.

플라톤(Platon)의 《국가(Republic)》를 페미니즘 철학을 다룬 작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플라톤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이상적인 도시국가를 통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그의 생각은 시대를 앞서갔다. - P6

플라톤은 소크라테스(Socrates)의 입을 빌려 ‘재능 있고 지적인 여성들도 남성들과 함께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플라톤이 제시한 ‘철인왕(Philosopher Kings)‘은 백성을 철학적으로 완벽하게 계몽하고 도시를 조화롭게 만드는 이상적인 통치자를 말한다. - P6

일례로 《철학: 100명의 주요 사상가들(Philosophy; 100 Essential Thinkers)》(2002)에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와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두 명의 여성만 등장한다. 《위대한 철학자들: 소크라테스부터 튜링까지(The Great Philosophers: From Socrates to Turing)》(2000)에는 여성 철학자가 단 한 명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 책은 현대 철학자가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남성 철학자만 다뤘다. 제목을 말 그대로 《철학의 역사(The History of Philosophy)》(2019)로 내세운 A. C. 그레일링(Anthony Clifford Grayling)의 책에서도 여성 철학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세 쪽 반에 걸쳐 ‘페미니즘 철학‘을 간략히 소개한 곳에서 여성 철학자는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한 명만 등장할 뿐이다. - P7

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불균형은 여전하다. 철학과에서 여성 교수가 절반을 차지하는 대학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2015년 미국 상위 20위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22퍼센트에 불과했다. 철학의 일부 분야에서는 1970년대 이후로 여성 철학자가 단 한 명도 증가하지 않았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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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여성 철학사
리베카 벅스턴.리사 화이팅 외 지음, 박일귀 옮김 / 탐나는책 / 202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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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중/고딩 시절에 여성 철학자를 배운 기억이 없다. 여성 독립운동가도 유관순 열사밖에 몰랐다. 훌륭한 여성 독립운동가가 그렇게 많은 줄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앞으로도 여성사 책을 다양하게 내줬으면 좋겠다. 나도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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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첫 학기 첫 시험 때 딱 한 번 90점대 점수를 맞아본 이후로 영어에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점수는 계속 떨어져 고등학교 때는 아예 바닥을 기어서 흔히 말하는 영포자가 됐다. 그 후로도 영어를 잘하고 싶은 욕심이 전혀 없었다. 영어를 못하는 걸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대학 때 있었던 영어 교양 수업은 기초 수준이라 그런지 열심히 하다 보니 그럭저럭 통과했고, 학부를 마칠 때엔 꼭 따야 하는 토익 점수를 간신히 넘겨 졸업에 성공했다.


이 후로 영어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다가 학부 졸업하고 2년 반 뒤에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입학 경쟁률이 높아서 다른 데처럼 높은 토익이나 토플 점수를 요구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그렇지는 않아서 영포자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했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난생 처음으로 기숙사라는 곳에 살아봤는데, 두 번째 학기 때 룸메이트가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같은 방은 아니었지만 같은 건물에 네팔 사람도 있어 가끔 우리 방에 놀러 왔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나는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지금도 카톡으로 연락하는) 튀르키예인 친구를 만나게 됐으니, 외국어 공부에 자극을 받기에 상당히 좋은 환경이 조성됐다. 나의 룸메이트는 무려 5개 국어(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영어, 나머지 2개는 까먹었다)를 이해하는 언어 능력자에 아들 하나를 둔 언어능력자였다. 거기에 한국어는 해당하지 않았기에 나는 간단한 영어 회화는 직접, 좀 어려운 대화는 파파고에 의존해 간간히 대화를 시도했다. 


그 친구가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알았거나, 내가 영어 회화를 기본이라도 했다면 친해졌을 수도 있겠으나, 둘 다 아니라서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가 외국도 아닌데 내가 전공 공부 대신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릴 수도 없었다. 영어 못해도 그냥 들이대는 성격도 아니고. 거기다가 카톡으로 사귄 튀르키예인 친구는 한국어를 너무 잘했다. 결국 나보다 먼저 대학원 학기를 마친 룸메이트는 고향인 아프리카 모잠비크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아마도 이 책들을 만나면서 영어 공부에 다시 불이 붙었던 것 같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면 영어책 한 권을 씹어먹어보라는 MBC 김민식 PD,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방황하다가 영어로 된 외화를 미친듯이 보다가 영어를 깨치고 미국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신왕국의 이야기는 이 책을 읽던 당시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한동안 유명한 영어 교육 유튜브 채널도 구독해서 열심히 보고, 외화도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가 최소 4년 이상은 됐으니 꾸준히 했더라면 꽤 늘었을 터인데 늘 오래 못 가는 게 문제다. 영어 교육 유튜브 채널은 지금도 가끔 보긴 한데 그때만큼은 아니다.


그 뒤로는 무수히 많은 시도를 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영어판과 한국어판을 도서관에서 같이 빌려와서 집에서 열심히 해석하기도 했고. 여기는 책 소개를 하는 공간이니까 각설하고 내가 여태껏 읽은 영어책을 생각나는 대로 말해보겠다.





영어 알려주는 남자, 유튜버 영알남이 유튜브에서 한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책이다. 난 유튜브에서 먼저 보고 책을 나중에 샀었다. 요즘엔 어쩐지 유튜브에서 영어를 잘 안 알려주는데, 어쨌든 그 덕분에 영단어에 접근하는 눈이 트였다. 영단어 하나에 들어있는 수많은 뜻 하나 하나를 외우는 게 아니라 '영단어에 있는 그림을 이해해야 한다' 라고 그는 말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for는 당연히 '~를 위해' 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외워버리면 for의 의미 중 반만 알게 되죠. for의 그림은 보다 입체적입니다. '주고 받는 교환'의 그림이죠. 한쪽만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 대한 대가가 따르는 그림이에요. 무언가를 받을 때는 그에 대한 대가가 따르잖아요? 이렇게 상호 주고받는 것이 for의 그림입니다."


우리말 '가다'도 사전을 찾아보면 10개가 넘는 뜻이 있지만, 우리가 그 많은 뜻을 다 머릿속에 집어넣고 사는 게 아닌 것처럼. 우리말 '가다'는 아마 어떤 곳으로 이동하는 그림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 하나의 그림을 가지고 물리적인 뜻으로도, 추상적인 뜻으로도 잘 응용해서 다양한 뜻으로 파생된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자세한 건 책에 나온다. 유튜브로 보는 게 더 빠르긴 한데 여긴 책을 소개하는 공간이니까. 유튜브에서 보고 싶은 사람은 영알남 '영단어'라고 검색해서 시청하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옛날에 전자책으로 1권을 샀는데, 2권 3권도 나왔는지는 방금 알았다. 책 제목은 김영철이 진행하는 라디오 <김영철의 파워FM> 속 코너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그 코너가 지금은 없지만 거기서 타일러가 고정 게스트로 나와서 미국식 영어를 소개했었다.



한 권은 '어원 사전'이고 다른 한 권은 '표현 사전'이라고 되어 있지만 둘다 영숙어의 어원을 소개한 책이다. 이 나이에 다시 입시를 준비할 것도 아닌데, 영단어를 단어장에 있는 데로 달달 외우는 건 너무 노잼이라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밌게 익힐 수 있을까 해서 샀었다. 사실 끝까지 제대로 읽어보진 못하고 알라딘에 중고책으로 팔았지만, 책이 별로라서 그렇게 한 건 아니다. 서가에 있는 책을 대량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책들도 그때 같이 팔았다. 언젠가 다시 사서 볼 생각이다.



비교적 최근(?)에 읽었다. 여태까지 읽어온 언어(혹은 영어)를 다룬 책 중에서 제일 재밌었던 것 같다. 영어를 둘러싼 언어의 세계를 재미나게 풀어낸 책이다. 본문에서 꼭 영어만을 이야기하진 않지만, 이 책의 완독한 입장에서는 책 제목을 '영어의 탄생'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영어와 영단어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했고,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영어의 역사를 다룬 대목이 가장 핵심적이고 재밌었다. 내가 메모해둔 구절 몇 개만 소개하고 이 책 소개는 마무리하겠다.


"흔히 쓰는 영어 단어 가운데 최소한 절반 가까이가 앵글로색슨어가 아닌 다른 언어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영어는 여기저기서 단어를 엄청나게 빌려 온 언어 가운데 하나지만, 다른 언어들도 외국어의 어휘를 차용하는 데 크나큰 열성을 보였다. 아르메니아어는 전체 언어 가운데 토착어에서 유래한 것의 비율이 겨우 23퍼센트이고, 알바니아어는 그 비율이 겨우 8퍼센트다." (126쪽)


영어는 정말 거의 모든 언어에서 단어를 가져왔다. shampoo(샴푸)는 힌디어에서, chaparral(덤불)은 바스크어에서, caucus(간부회의)는 엘곤퀸 인디언 언어에서, ketchup(케첩)은 중국어에서, potato(감자)는 아이티 원주민 언어에서, sofa(소파)는 아랍어에서, boondocks(산림)는 필리핀의 타갈로그에서, slogan(구호)은 게일어에서 가져왔다. 이를 능가하는 절충주의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영어는 이런 일을 수 세기 동안이나 계속해왔다. 보와 케이블에 따르면, 16세기만 해도 무려 50가지 언어로부터 단어를 차용했다고 한다." (122쪽)


"때로는 혼란을 조장하기에 딱 알맞게 똑같은 단어가 상충하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단어를 모순어라고 한다. sanction이라는 단어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재가)'과 '금지당하는 것(제재)'을 모두 의미할 수 있다. cleave라는 단어는 뭔가를 '절반으로 뚝 자른 것(쪼개다; 가르다)'과 '서로 붙이는 것(부착하다; 고수하다)'을 모두 의미할 수 있다. sanguine한 사람은 '성미 급하고 잔인한' 사람이거나 '차분하고 쾌활한' 사람일 수 있다. 뭔가가 fast한 것은 어딘가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는 것'이거나 '재빨리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문을 bolted하면 '잠갔다'는 뜻이지만, 말馬이 bolted하면 '달려 나갔다'는 뜻이다. 회의를 wind up했다면 그걸 '끝냈다'는 뜻이요, 시계를 wind up했다면 그걸 '움직이려고 태엽을 감는다'는 뜻이다. ravish는 '강간한다'는 뜻이지만, 이와 동시에 '황홀하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17쪽)


이렇게 단어가 풍부한데도 영어 사용자는 단 하나의 단어에 그야말로 갖가지 의미의 은하계를 부여하는 특이한 성향, 즉 영어를 배우는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만한 성향이 있다. (…)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것을 '다의성'이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는 아주 흔하다. (…) 하지만 다의성의 황제라고 할 만한 단어는 분명 set일 것이다. 얼핏보기에는 전혀 두드러진 구석이 없는 단음절어, 생물로 말하자면 단세포동물에 해당하는 듯하지만 이 녀석은 무려 명사로 58가지, 동사로 126가지, 분사 형용사로 10가지의 용례가 있다. 워낙 의미가 다양하고 제각각이다 보니,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는 이 녀석을 모조리 설명하는 데 무려 6만 단어를 사용한다. 웬만한 단편소설 한 편 분량이다. 외국인의 경우, set의 의미를 파악할 때야말로 진정 영어를 아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115쪽)





얘들은 가장 최근에 읽은 책. 이 두 권은 수험서는 아니지만 수험서처럼 공부하는 마음으로 매일 조금씩 천천히 읽고 있다. 『대한민국 영문법 0교시』는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고, 『신기하게 영어 뇌가 만들어지는 영문법』은 대출해서 읽다가 반납 기한까지 다 못 읽을 것 같아서 아예 구매를 해서 요즘도 읽고 있다. 『대한민국 영문법 0교시』은 그야말로 완전 왕초보가 읽어야 할 책이다. 한국어와 어순이 완전히 다른 영어식 어순에 적응할 수 있게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한다. 


『신기하게 영어 뇌가 만들어지는 영문법』은 앞의 책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갔지만 영어 무식자인 내가 보기에 이 책도 난이도가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니다. 자동사, 타동사, 수동태, to 부정사, 분사구문 들을 초보자들을 위해 정말 쉽지만 깊이 있게 내용을 전달한다.


두 권 다, 수험서가 아니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암기식이 아니라 어원을 설명함으로써 왜 문법이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고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이야기해준다. 역사와 어원 이야기 좋아하는 내겐 이만한 영문법 책이 없다. 전치사를 사전에 나오는 개별적인 뜻보다 단어의 그림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 대목은 앞서 언급한 영알남의 해설과 다르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도 원래 유튜버라서, 책의 각 챕터마다 유튜브 영상으로 통하는 QR코드가 있다. 책과 유튜브 영상을 함께 보면 더 좋을듯하다. 


단기간에 성적을 최대로 내길 목표로 하는 수험생에게는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취미로 영어를 공부하거나, 아직 학생이라도 여유가 좀 있어서 차근차근 기초부터 천천히 재밌게 영어를 익히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영어 교재가 될듯하다. (알라딘에서 후기를 보니까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가 이 책으로 영어공부를 재밌게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달의 마이페이퍼'에서 상금으로 받은 적립금 3만원에 본래 갖고 있던 마일리지를 조금 보태서 주문했다. 오늘 아침에 주문해서 책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 앞에서 소개했던 『걸어다니는 표현사전』, 『걸어다니는 어원사전』처럼 어원을 소개하지만 숙어는 아니고 일반 단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 책 두 권 다 내가 좋아하는 인문학이 주제라 더 재밌을 것 같다. 원래는 이 책 두 권만 짤막하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엄청 길어졌다. 아무리 책 좋아하는 알라디너라도 재미도 없는 긴 글을 끝까지 읽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 (혹시 읽으셨다면 감사합니다. ㅠ)


마지막으로 아직 사지도 읽지도 않았는데 일단 눈여겨본 책들만 덧붙이는 것으로 끝 맺으려 한다. 언젠가 나도 영어를 잘하는 날이 오길 바라면서. (마지막 한 권은 영어 책은 아니지만 영어도 어쨌든 '언어'이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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