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 명함만 없던 여자들의 진짜 '일' 이야기 자기만의 방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생 노동해왔지만, 주로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혹은 집사람)로 호명받았던 여성들의 이야기. 여기에 실린 이들은 하나 같이 신산(辛酸)한 삶을 건너왔지만, 슬프다기보단 강인함이 느껴졌다. 어느 세대에게든 쉬운 시대는 없겠지만,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험난한 시절을 온몸으로 헤치며 넘어온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랄까. 


어쩌면 이 분들은 '내 인생이 뭐 특별할 게 있다고. 책에 나올 만큼 대단한 건 아니다. 우리 세대 여자들은 다 그렇게 살았다' 라고 손사래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상을 생각하면 실제로 흔한 이야기가 맞기도 할 테고. 그러나 흔하다고 꼭 특별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경향신문 젠더 기획팀>은 책의 기획 의도를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평생 일한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고 싶었다. 언제나 N잡러였지만 '집사람'이라 불린 여성들, 이름보다  누구의 아내나 엄마로 불려온 여성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일의 기쁨을 느끼며 '진짜 가장은 나'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여성들, 남존여비의 시대에 태어나 페미니즘 시대를 지켜보고  있는 여성들." (5쪽)


너무나 흔해서 대부분, 중요하지 않게 여겼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책의 형태로 들려준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에 감사드린다.


그런데 나는 이런 분야의 책들을 읽을 때마다 종종 서운해진다. '언니들' 혹은 '언니'라는 표현 말이다. 왜 '여성 서사'라고 꼭 여성들만 이 책의 독자라고 생각하는지. 이 책에선 여성 독자를 주된 타겟으로 했기에 아마 이런 부제가 나왔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출판 시장에서도 여성 독자가 더 많다는 말도 들었지만) 나 같은 남성 독자도 있는데 말이다. 큰언니들 옆에 괄호 치고 (큰누나들)로 해도 좋았을 텐데. 


책에서 내 아쉬움이란 그냥 그 정도다.


2024.08.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이 내가 되고, 내가 일이 된 사람들이 있다. 이 책에서는 베테랑, 좀 더 오래된 말로는 ‘장인(匠人)‘과 비슷한 뜻이려나. 이 책에서 다룬 직업들은 세공사·조리사·로프공·어부·안마사·마필관리사·식자공·세신사·수어통역사·일러스트레이터·조산사·배우로 13명의 베테랑이 나온다.

베테랑은 아무나 될 수 없다. 단순히 한 분야에서 물리적인 시간을 오래 보낸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창 시절에 배운 ‘방망이 깎는 노인‘ 이야기가 떠오른다. 방망이를 빨리 만들어달라는 주인공의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예술 작품을 만들듯 노인 자신만의 기준으로 최고의 완성품을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 (그게 수필이었는지 소설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노동과 직업병 문제를 다루어온 르포 작가 희정은, 베테랑들의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저자는 몸의 관점에서 베테랑들의 일과 삶을 들여다보며, 책의 프롤로그에서 말한다. 노동이라는 것은 냉정해서 어떤 성과나 기술도 대가 없이 내주지 않았다고.

그것은 신체적인 고질병이다. 어떤 직업이든 직업병은 다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육체 노동인데 열악한 노동 조건 탓에 몸을 돌볼 여력이 없다 보니 그 문제는 더 심화된다. 그럼에도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성실히 살아온 베테랑들에게 저자는 귀를 기울인다.

세월히 흘러 전업이 생기고 일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면서, 그때 나를 놀라게 한 자부심이 놀랍도록 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회사에서 받은 부당함을 토로하다가도 "이 직업을 유지하는 데는 어떤 능력이나 기술이 필요한가요?" 라고 물으면, 표정이 슬며시 밝아졌다. - P8

자신을 최고라 자칭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저마다 최선을 다하여 지키는 선이 있다. 고객 앞에서 자신이 모르는 것은 없게 하고 싶었다. 망망대해 어디서든 빈 그물로 오는 일이 없는 자신을 믿었다. 수십 미터 하늘 위에서 목숨은 하나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그런 사람이지. 수저를 가지런히 놓는 자부심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 P10

노동이라는 것은 냉정하여 무엇이건 지키고자 한다면 몸을 움직여야 했다. 찰나의 성과도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기술도 대가 없이 내주지 않았다. 시간을 내놓은 베테랑들은 둥근 달과 함께 퇴근해야 했고, 굳은 살이 박혀야 했고, 눈물을 머금어야 했고, 살이 벗겨져야 했고,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오래 한자리에 붙박였다. - P11

"나뭇결을 헤아리며 거기에서 자기 인생을 읽는 사람이 목수이고, 철 덩어리가 어디가 아픈지 귀를 열다가 문득 거기서 세상 목소리를 찾는 사람이 엔지니어라고 생각하고 산다." 해도 티가 안 나는 그림자 노동 같은 일을 두고 "문지르고 닦다 보면 내 마음도 닦인다는 말을 좋아한다." - P14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꾸준하게 2023-11-19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고 보니 리뷰는 아니고 간략한 책 소개 정도 되겠네요.
 
줬으면 그만이지 -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김주완 지음 / 피플파워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얽힌 고사가 있다. 간략하게만 말해보겠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에 평원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에서는 평원군을 초나라에 보내 초나라에 동맹을 청하기로 했다. 평원군은 문무를 겸비한 식객 20명과 함께 가기로 하고 우선 19명을 뽑았지만, 나머지 한 명을 뽑기가 어려웠다.


수천 명에 달하는 식객 중에서 모수라는 사람이 자신이 함께 가고 싶다고 청했다. 그런 모수를 보고 평원군은, '재능이 있는 사람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주머니 바깥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 라고 말하며 모수가 자격이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모수는, 주머니 속에 넣지 않았으니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평원군에게 되물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 '낭중지추'는 빼어난 인물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밖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이 고사를 외우고 있는 건 아니고(대략적인 뜻과 유래는 알고 있었지만) 조금 전에 인터넷에서 다시 찾아봤다.]


그런데 원래 뜻이야 그렇더라도 꼭 비상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물들을 이야기할 때도 이 말을 써도 되지 않을까. 훌륭한 언행을 하고도 스스로 내세우길 꺼렸으나 마침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분들. 채현국·김장하 선생 같은 사람들이 낭중지추 아닐까.


말년에는 언론 인터뷰도 하고, 팟캐스트에도 나가고, 강연 활동도 활발히 하긴 했지만, 채현국 선생도 8년 전 한겨레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는 철저히 언론을 피해 대중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김장하 선생의 행적도 범상치않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 IMF 전까진 한약방이 엄청 잘 돼서 돈을 많이 벌었다지만, 어떻게 이처럼 평생 남에게 베풀고만 살 수 있을까. 보통 베풀고 사는 자수성가한 사람들 이야기는 젊을 땐 열심히 재산을 모았다가 늙어서 사회에 환원하는 패턴이었던 것 같은데, 그걸 스물너댓 살부터 시작했다니 놀랍다. 그것도 철저히 자신을 되도록 적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가 만일 일제강점기에 살았더라면 이회영 선생처럼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았을까. 김장하 선생이 장학사업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기념사업 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했음을 보면 응당 그리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선생을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마음을 함께했던 그의 아내 최송두 여사까지. 그렇다고 형제자매를 잘 돌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지. 


언론보도를 통해서 가끔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을 만나지만 그럼에도 내가 세상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그 반대편에 김장하 선생 같은 분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보다 많아 보이는 이유는, 선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을 드러내길 꺼리고 악한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자극적인 뉴스가 더 잘 팔리는 까닭도 있다.


어쩌면 우리 세상에는 더 많은 김장하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들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길 싫어해서 우리가 모를 뿐. 사실 일상적인 뉴스에도 김장하만큼은 아니지만 작은 천사,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비명소리를 듣고 뛰쳐나와 흉기 난동자를 제압한 사람 이야기, 불이 난 전기차에서 사람을 구조한 성인 남자 네 명의 이야기. 그런 작은 천사·영웅들의 뉴스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유튜브 재생목록에 조금씩 모으고 있다. 가끔씩이라도 그런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내 안에 살고 있는 작은 천사가 작은 악마보다 점점 더 힘이 세지겠지.


'작은 김장하'가 되고 싶다. 굳이 '작은'이라는 말을 붙인 건 김장하 선생처럼 사는 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처럼 젊을 때부터 돈을 많이 벌어도 그렇게 평생 베풀고 살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작은 김장하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이 땅에 작은 김장하가 많았으면 좋겠다. 김장하 선생 같은 분들만 몇 사람 있는 것보다 우리가 모두 조금씩 작은 김장하가 된다면 조금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김장하 선생 이야기를 알려준 김주완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이 책이 수많은 작은 김장하를 키워낼 마중물이 됐으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23-01-24 07: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짧지만 멋진 리뷰에요!! 저도 작은 꼬맹이 김장하라도좋으니 그분의 올곧은 성품 한자락이라도 닮고 싶네요.

꾸준하게 2023-01-24 09:31   좋아요 1 | URL
사실 아직 다 읽진 못했어요. ㅎㅎ 리뷰라고 하기엔 좀 부족하지만 이런 책은 독서 기록을 꼭 남기고 싶었어요. 😄😄
 
영어는 붕어빵이다
오세웅 지음 / 넥서스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어째서인지 최근 들어 언어학(?) 쪽 책을 집중적으로 파고 있다. 한국어 문법과 어원에 관한 관심은 못해도 최소 10년 이상은 된 것 같은데, 요즘엔 그 방향이 영어까지 확장됐다. 학창 시절에, 아니 적어도 대학 시절부터라도 영어에 이 정도로 깊은 관심이 있었더라면 지금쯤 영어를 엄청 잘하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대학을 졸업한 지도 꽤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말이다. 만일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의 수준이 지금 정도였다면 언어학과를 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내가 언어 쪽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봐야 어려운 언어학 학술서를 읽는 건 아니라서 너무 나간 것일 수도 있다. (대학 때랑 대학원 때 전공인 역사는 고딩 때 이미 혼자서 학술서를 읽을 정도였거든.) 그렇지만 인생은 모르는 거다. 영어를 다뤘지만 수험서가 아닌 책을 내가 이렇게 많이 읽을 줄이야. 그거와는 상관없이 영어는 여전히 못한다. 


(토익 공부를 안 하고 있긴 하지만) 토익 시험을 치면 한 200점대 나오지 않을까. 그래도 지금처럼 관심을 계속 두다 보면 언젠가는 잘하는 날이 오겠지. 아직은 짝사랑 중이다. 점수와 상관없이 사랑은 계속된다. 그 연장선에서 오늘 도서관에서 오세웅 교수의 『영어는 붕어빵이다』를 빌려왔다.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 이 책 한 권만 있진 않지만 오늘은 페이퍼가 아니라 '리뷰'니까 다른 책은 다음에 소개하겠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직유와 은유를 다음과 같이 배운다. '사과 같은 내 얼굴'하면 얼굴을 사과에 빗댄 '직유'이고, '내 마음은 호수요' 라고 하면 마음을 호수에 비유한 '은유'라고. 처음엔 둘 다 분명 참신한 표현이었겠지만 너무 많이 듣다 보니 식상한 표현이 된 지도 오래됐다. 그걸 문학에서는 '죽은 비유'라고 말하지만, 어쨌든 이 두 표현은 거의 모든 한국 사람이 알고 있는 직유와 은유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비유는 문학에만 존재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일상에 아주 흔하다. 


"언어학자들은 모든 언어가 은유적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 주변의 사물들은 처음부터 부르는 이름이 있었던 게 아니고 인간들이 상황에 맞게 이름을 붙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표현은 빗대어 표현하는, 즉 비유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빅뱅 이후 원시인이 처음으로 주위 사물에 이름 짓는 과정을 상상해 보라. 사물은 인간이 명칭을 붙여주기 전까지 부르는 이름이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인간이 이름을 붙여줘야 그때부터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이름은 인간의 감각에 가장 이해하기 쉽게 표현을 만들게 마련이다. 골치 아픈 언어이론을 굳이 들먹거리지 않아도 생활 속에 들어 있는 비유적인 표현은 너무 많고 대부분 우리의 감각으로 이해하기 쉽다. '내 가슴이 탄다.' '서울은 지금 한증막 더위' '너는 우물 안 개구리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해치우자.' '정국 급랭' 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5쪽)


더 나아가 저자는 언어학자들의 권위를 빌려 모든 언어가 은유적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붕어빵이다』가 일상 언어의 은유를 학술적 관점에서 논하는 책은 아니니까 이에 관해 좀 깊이 있게 알고 싶은 분은 학술저널 《새국어생활》제 29권 4호에 실린 아주대 국문학과 박재연 교수의 글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를 읽어보면 좋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도 실려있어서 쉽게 찾아서 읽을 수 있다. 논문이지만 국어학과 언어학에 손방(문외한)인 나한테도 어렵지 않은 글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크게 부담 가는 글은 아닐듯하다. 아래에 링크를 첨부한다.)


https://www.korean.go.kr/nkview/nklife/2019_4/29_0404.pdf


언어가 기본적으로 은유라는 점은 외국어 학습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비유는 그 나라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모르고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리뷰하는 책의 제목인 『영어는 붕어빵이다』에 나오는 '붕어빵'도 그렇다. 우린 서로 닮은 사람들을 보고 '붕어빵'이라고 부르는데, 붕어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외국인이 이걸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붕어빵 = 얼굴? 붕어빵과 얼굴이 무슨 상관이야?'하고 의아해할 거다. 


혹시 사전에도 이 뜻이 나오나 궁금해서 '붕어빵'을 방금 국어사전에서 찾아봤다. 두 번째 뜻으로 '서로 얼굴이 닮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있다. 이런 걸 보면 어쩌면 외국인 학습자가 쓰는 한국어 사전에도 붕어빵에 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상에서 쓰는 모든 비유가 사전에 나오는 건 아니다. 또 사전에 나온다고 해도 문화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생으로 외우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기계적으로 영단어를 외울 때 하는 것처럼.


"영어사전에 보면 중요한 단어들은 정의가 수십 개가 넘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일일이 그 정의를 전부 외우려고 하는데, 그보다는 한두 가지 정의만 외우고 나머지는 대개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명한 경우가 많다. 영어공부도 이제는 유동성을 갖고 탄력 있게 해야할 것이다. 예를 들어 embrace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온다. '포옹하다, 기꺼이 받아들이다, (직업)을 잡다, 포함하다, (산들이) 둘러싸다, 깨닫다.' 이 중에 첫번째 의미만 직설적이고 나머지는 모두 비유적인 표현에 쓰인 것을 정의 속에 포함시킨 것이다. 즉 첫번째 의미만 안다면, 나머지는 비유적인 뜻으로 이해하면 굳이 외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 red라는 단어를 보면 '빨간, 피에 물든, 불타는 듯한, 과격한, (손해) 적자의'등의 뜻이 있다. 여기에서도 첫번째 '빨간'이라는 뜻만 알면 나머지는 모두 비유적인 표현을 정의 속에 포함시켰음을 알 수 있다."(6쪽)


그래서 저자 오세웅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사전을 찾아가며 단어를 외울 때는 사전에 나오는 정의를 모두 외우려고 하지 말고 직설적인 뜻 하나만 외우고, 나머진 그 단어가 어떻게 비유적으로 쓰이는지 파악하라고. 영어권 국가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사전을 찾을 때마다 예문을 잘 살피는 거다. 그리고 시간이 충분하다면 영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거다. 물론 그 나라에서 직접 살아보는 게 가장 좋겠지만 아무래도 쉬운 방법은 아니니까.


이제야 왜 영어를 공부할 때 예문을 암기하는 게 좋다고 하는지, 미드로 하는 공부가 왜 좋은지 진정으로 이해된다. 이 방법은 단지 영어만이 아니라 당연히 다른 모든 외국어에도 적용이 될 테다. 아직은 제1 외국어인 영어 하나만으로도 빌빌대지만, 바이링구얼(다국어 능력자)을 꿈꾸는 나는, 언젠가 다른 외국어들을 공부할 때도 이 방법을 채택해봐야겠다. 이런 종류의 책을 내가 학생 때 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참 아쉽다. 하지만 아직 살 날은 많다. 내 인생 끝난 거 아니니까 외국어 능력자라는 꿈을 향해, 더디지만 조금씩 가보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믿고 읽는 작가, 이슬아 작가가 돌아왔다.

이메일 뉴스레터 <일간 이슬아>로 이번 가녀장 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글이 어느 장르에 들어갈까 궁금했는데 소설이다. 이슬아 작가의 첫 소설이다.

이번 책의 제목은 『가녀장의 시대』. '가녀장'이라는 이름은 예전에 <님과 함께>라는 가상 연애 프로그램에서 윤정수와 호흡을 맞췄던 김숙의 '가모장' 발언을 연상하게 한다. 그 낱말이 국어사전에 있기는 하지만, 이는 오랫동안 가부장제의 전통이 뿌리내린 나라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가부장'에 대한 통쾌한 미러링이라며 환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과거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진 '남성호주제'라는 희한한 제도가 있었다. 부계 혈통을 기반으로 한 일원적이고 수직적인 위계 체제였다. 가부장이라는 절대적인 권위자 아래 모든 가족 구성원이 놓여있었다.

자녀들은 물론이고, 배우자인 아내마저도 가부장인 남편에 법적으로 종속되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남편이 아내보다 먼저 죽으면 아들이 가장을 이어받는다는 점이었다. 아들 나이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아들이 미성년이면 엄마가 실질적으로 가계를 책임질 수밖에 없는데도 법적인 가장은 어린 아들이었다. 공고했던 가부장제는 IMF 사태를 겪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2008년에 드디어 '남성호주제'가 완전히 폐지되면서 적어도 제도상에서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제 가부장제는 문화적으로도 숨을 다해가는데 이처럼 우리 사회가 거쳐 온 사회·문화적 배경을 돌이켜보니, 이슬아 작가가 쓴 첫 소설의 제목에서 '가녀장'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은듯하다.






이슬아 작가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픽션'인 소설 『가녀장의 시대』에서 슬아는 '낮잠'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는 가녀장이다. 슬아가 가녀장인 이유는 (당연한 말이지만) 집안의 경제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딸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자기만의 직업이 있었던 아빠인 웅, 엄마인 복희는 슬아가 사장인 작은 출판사의 직원이다.

제목이 '가녀장의 시대'인 만큼 소설은 주로 슬아와 슬아를 둘러싼 낮잠 출판사의 직원이자 가족의 이야기를 슬아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가끔은 슬아가 아닌 복희가 슬아를 관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편 소설'이라고는 되어있지만 내용이 시간이나 사건 순으로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라, 각각 독립된 에피소드를 한 권으로 엮은 거라서 어느 편을 먼저 읽어도 무방할듯하다. 저자와 편집자가 더 잘 알겠지만, 장편소설이라기보다는 연작소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앞에서 '가부장제니 '가모장'이니 하면서 거창하게 말을 꺼내긴 했으나, 이 책에서 그런 진지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가녀장'이라는 어휘에서 내가 혼자 떠올린 감상일 뿐이다. (다만 과거 60~80년대에 오빠나 남동생의 학업을 뒷바라지하고 가족을 전적으로 부양하면서도 가장이 될 수 없었던, 옛날의 공순이 시절을 경험했던 분들께는 감격스러운 호칭이 아닐까.)

이 책은 시트콤을 보듯 편하게 감상하면 된다. 한창 재미나게 읽는 중에 깊이를 발견하게 되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다. 이메일에서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이미 생각했던 건데, 언젠가 영화나 드라마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