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줬으면 그만이지 -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
김주완 지음 / 피플파워 / 2023년 1월
평점 :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얽힌 고사가 있다. 간략하게만 말해보겠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에 평원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에서는 평원군을 초나라에 보내 초나라에 동맹을 청하기로 했다. 평원군은 문무를 겸비한 식객 20명과 함께 가기로 하고 우선 19명을 뽑았지만, 나머지 한 명을 뽑기가 어려웠다.
수천 명에 달하는 식객 중에서 모수라는 사람이 자신이 함께 가고 싶다고 청했다. 그런 모수를 보고 평원군은, '재능이 있는 사람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주머니 바깥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 라고 말하며 모수가 자격이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모수는, 주머니 속에 넣지 않았으니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평원군에게 되물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고사성어 '낭중지추'는 빼어난 인물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밖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이 고사를 외우고 있는 건 아니고(대략적인 뜻과 유래는 알고 있었지만) 조금 전에 인터넷에서 다시 찾아봤다.]
그런데 원래 뜻이야 그렇더라도 꼭 비상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물들을 이야기할 때도 이 말을 써도 되지 않을까. 훌륭한 언행을 하고도 스스로 내세우길 꺼렸으나 마침내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분들. 채현국·김장하 선생 같은 사람들이 낭중지추 아닐까.
말년에는 언론 인터뷰도 하고, 팟캐스트에도 나가고, 강연 활동도 활발히 하긴 했지만, 채현국 선생도 8년 전 한겨레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는 철저히 언론을 피해 대중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김장하 선생의 행적도 범상치않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 IMF 전까진 한약방이 엄청 잘 돼서 돈을 많이 벌었다지만, 어떻게 이처럼 평생 남에게 베풀고만 살 수 있을까. 보통 베풀고 사는 자수성가한 사람들 이야기는 젊을 땐 열심히 재산을 모았다가 늙어서 사회에 환원하는 패턴이었던 것 같은데, 그걸 스물너댓 살부터 시작했다니 놀랍다. 그것도 철저히 자신을 되도록 적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가 만일 일제강점기에 살았더라면 이회영 선생처럼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았을까. 김장하 선생이 장학사업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기념사업 들을 금전적으로 지원했음을 보면 응당 그리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선생을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마음을 함께했던 그의 아내 최송두 여사까지. 그렇다고 형제자매를 잘 돌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지.
언론보도를 통해서 가끔 인간 같지 않은 이들을 만나지만 그럼에도 내가 세상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그 반대편에 김장하 선생 같은 분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보다 많아 보이는 이유는, 선한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을 드러내길 꺼리고 악한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자극적인 뉴스가 더 잘 팔리는 까닭도 있다.
어쩌면 우리 세상에는 더 많은 김장하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들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길 싫어해서 우리가 모를 뿐. 사실 일상적인 뉴스에도 김장하만큼은 아니지만 작은 천사,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비명소리를 듣고 뛰쳐나와 흉기 난동자를 제압한 사람 이야기, 불이 난 전기차에서 사람을 구조한 성인 남자 네 명의 이야기. 그런 작은 천사·영웅들의 뉴스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유튜브 재생목록에 조금씩 모으고 있다. 가끔씩이라도 그런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내 안에 살고 있는 작은 천사가 작은 악마보다 점점 더 힘이 세지겠지.
'작은 김장하'가 되고 싶다. 굳이 '작은'이라는 말을 붙인 건 김장하 선생처럼 사는 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처럼 젊을 때부터 돈을 많이 벌어도 그렇게 평생 베풀고 살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작은 김장하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이 땅에 작은 김장하가 많았으면 좋겠다. 김장하 선생 같은 분들만 몇 사람 있는 것보다 우리가 모두 조금씩 작은 김장하가 된다면 조금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김장하 선생 이야기를 알려준 김주완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이 책이 수많은 작은 김장하를 키워낼 마중물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