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당에 관해 직업적인 편견은 원래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민족의 조상이라고 믿는 단군왕검부터가 정치지도자이자 샤먼이었다고 배웠으니까. 그리고 10대 시절부터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삶과 정신세계를 연구하는 서정록 선생이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 (https://cafe.daum.net/peacetree2) 와 류시화 시인이 쓴 명상 서적과 인디언 관련 서적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아와서 일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믿는다는 제도권 종교 개신교의 신자들보다 무속인의 숫자가 더 많다고 했던가. 무속인들 중에서도 악질 사기꾼들이 있어서 가끔 뉴스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로 무속 자체를 비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해왔다. 


불교, 기독교 같은 제도권 종교라고 해서 전부 좋은 승려, 목사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종교인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악질 범죄자들도 끊임없이 나온다. 그럼에도 이들 종교 자체를 비하하지는 않는다. 일각에서는 개신교에서 일어나는 일부 목사들의 정치 편향 발언과 범죄를 거론하며 '개독교'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목사, 스님하면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 보통은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만 욕할 뿐이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박정희 정권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탄압을 받아왔는데도 여전히 건재한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오염된 사머니즘과 타락한 샤먼이 문제이지 샤머니즘도 우리의 소중한 전통 문화라는 게 나의 기본 입장이었다.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점을 보러 간 적은 없다.


진짜 제대로 된 무속인을 만날 가능성도 희박하거니와 실제로 만난다고 해도 연애운이든, 결혼운이든, 직업운이든 내 미래나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위험을 굳이 미리 알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리고 앞에서 직업적인 편견이 없다고는 했지만 그건 '무속인은 다 사기꾼이다' 라는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일 뿐 직접 가보긴 좀 부담스러운 느낌이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흔히 '신당'이라는 곳이 예전에 강호동이 했던 MBC 예능 '무릎팍도사' 에서 나온 것 같은 그런 이미지니까. 나도 그랬다. KBS Joy 채널에서 이수근과 서장훈이 하는 '무엇이든 물어보살'은 무릎팍보다는 현대적이고 카페 같은 이미지긴 하지만, 그 그게 방송이라서 그렇지 실제로 그런 분이 하는 곳에 신점을 보러 간다고 하면 어쩐지 가기 꺼려진다. 가볍게 '사주카페' 정도야 갈 수 있겠지만.


그런데 요즘 젊은 무당은 그렇지 않나 보다. 신당 대신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색동 한복 대신 무색 면바지를 입고 신점을 봐주는 무당이라니. 그것도 부드러운 표정과 반말이 아닌 친절한 존댓말로. 저자는 자신의 그런 옷차림도 언행 때문에 서비스직 같다는 말을 들었다지만, 무당도 어찌 보면 서비스직이다. 그것도 최소 수천년의 기원을 가진 전문 상담서비스직 아닌가. 전업 무당이자 퀴어 페미니스트 비건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홍칼리 작가가 들려주는 그의 삶이 자못 궁금하다. (나도 아직 다 못 읽었다)

나는 신당 대신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점사를 보고 색색의 한복 대신 편안한 무색 면바지를 입고 다닌다. 내 눈은 동그래서 사람들을 쏘아보기는커녕 소위 ‘기가 센‘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호통보다 존댓말이 익숙한 나는 말투가 너무 친절해서 서비스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 P5

무당이 된 나를 걱정하는 상상과 다르게, 나는 행복해서 무당을 하고 있다. 무당이 된 후 가장 좋은 점은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존재를 끌어안을 수 있고 정화할 수 있는 이 직업이 좋다. 낮에는 따뜻하게 사람들을 감싸고 밤에는 고요하게 기도할 수 있는 일상이 행복하다. 이 달콤한 케이크를 계속 먹고 싶어서 무당이 된 것 같다. 이 케이크를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싶다. - P8

매일매일이 기적의 연속이고 신기한 일들의 반복이라는걸 느낀다. 건조하게 보면 한없이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의 조각들이 사실은 동시성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에너지체다. 무당은 이런 동시성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알아채는 걸훈련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 P17

신령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옆에 와 앉아 이야기해주는 존재라기보다는, 동시성으로 매 순간 함께 존재하는 에너지의 작용에 가깝다. 나는 그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전달하는 사람이다. 물컵이 쏟아지거나, 식물에서 새싹이 튀어나오거나, 반려견 커리가 오늘따라 꼬리를 흔들며 나를 따라오는 일상의 조각이 내게는 모두 메시지가 된다. 작은 일들도 사소하게 여기고 지나가지 않는 것은 이 일을 하면서 얻게 된 큰 기쁨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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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28 0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당도 세대별로 차이가 나는 듯하네요.

꾸준하게 2023-12-28 07:05   좋아요 0 | URL
그런가 봐요. ㅎㅎ 무당도 사람이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으니까요. ☺☺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다. 타인에 대한 물음은 호기심에서부터 신문(訊問), 힐난, 비난까지 다양하다. 묻는 자의 정체나 위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 마디로도 묻는 자의 교양, 인격, 무지, 태도를 알 수 있다. "어쩌다 동성애자가 되었나요?" "자네는 어느 대학을 나왔나?" "왜 아직도 취직을 못했나?" "여자가 왜 이런 일을?" 이런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인권 침해이다. - P78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에 노출되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 상대는 어디에 ‘서‘있는지, 내가 하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런 질문들이 평생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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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에 알라딘에서 전자책으로 사놓고 완독하지 못했던 『이갈리아의 딸들』을 책의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그때 발췌한 구절 중 일부를 여기에 옮겨봤다. 책의 시작은 남성 중심의 기존 단어를 뒤집어 다시 정의하는 것부터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완전히 정반대로 뒤집어 버렸기 때문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초반에 이런 설명이 붙는 것은 불가피할 테다. 웬만한 한국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웠으니까 아래 인용한 구절들이 어떤 의미인지 다들 이해할 수 있으리라. 


남성이 기본값인 우리 세상과 달리 여기선 여성을 기본값으로 하고 있다. 영어에선 'man'이 남자이자 사람이고 여성을 표현하려면 'woman'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정반대의 세계인 이갈리아에선 'wom'이 여성이자 인간이고 남성은 'man'을 붙여 'manwom'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영어에서는 남성에게는 기혼/미혼 여부와 상관없이 성 앞에 'Mr'을 붙이고 미혼 여성에겐 'Miss' 혹은 'Ms',기혼 여성에겐 'Mrs'를 붙인다. 물론 요즘엔 미혼/기혼 상관없이 'Ms'를 성 앞에 붙이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지만, 예전엔 철저히 구분해서 말했을 테다. 


어째서 별도의 말이 생길 정도로 여성의 결혼 여부가 그렇게 중요할까. 남성에 해당하는 낱말은 없고, 오직 여성에게만. 해커스 유학 블로그를 보니 영미권에서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 성을 따르기 때문에 성 앞에 붙는 호칭이 달라진다는데, 별로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만일 그런 거였다면 오늘날 Ms를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에게 모두 쓸 수 있도록 하진 않았을 거니까. 한국어에서는 그런 표현은 없지만, 지금도 회사의 취업 면접 때는 여성 면접자가 결혼했는지 여부를 물어보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남성 면접자에게도 가끔 물어보기는 한다지만 (나는 못 들어봤다) 그 의도가 다르다. 다들 알 테니까 그 의도를 여기서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소설 속 이갈리아의 세상에서는 완전히 반대다. 여성의 미혼과 기혼 여부를 구분하는 단어는 따로 없고, 맨움(남성)의 기혼은 성 앞에 Msass(미재즈)를 붙인다. 그러면 이 책에서는 맨움이 결혼하면 움(여성)의 성을 따르는 건가? 그건 좀 더 읽어봐야겠다.

움 wom 1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이라고 분류되는 성(性)의 인간. 2. 어떤 성의 인간이든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예를 들어 spokswom(대변인), seawom(뱃사람), 3. 일반적인 인간을 움으로 지칭할 수도 있다.

맨움 manwom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 이라고 분류되는 성(性)의 인간.
미즈 Ms 움의 성, 성명 앞에 붙이는 경칭.
미재즈 Msass (미즈에 맨움형 어미 -ass가 결합한 것으로) 기혼 맨움의 성, 또는 그 아내의 성 앞에 붙여 기혼 맨움을 나타내는 경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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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무속인들과 다르게 한복 대신 청바지를 입고 신당 대신 카페에서 점을 본다는(그런 분도 있구나!) 전업 무당 홍칼리 작가의 에세이 『신령님이 보고 계셔』와 10년 차 편의점 점주 봉달호 작가의 삼각김밥 이야기 『삼각김밥』. 글쓰기를 업으로 하거나 사회적인 권위를 지닌 이들이 주로 책을 쓰던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정말 다양한 이력을 지닌 사람들이 책을 쓰는 것 같다.


요즘은 꼭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삶을 영상의 형태로 전시하는 시대지만, 그래도 텍스트는 영상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그만의 매력이 있다. 갈수록 줄어드는 독서인구는 걱정되지만, 그럼에도 그거와는 별개로 작가층의 다양화는 반갑다.


본래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이들은 아니지만, 책 날개를 보니 이미 여러 권의 책을 낸 저자들이라니 믿고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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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독서 테마는 '마이너리티: 소수자'다. 여성·청소년·아동·장애인·노인·성소수자·산업재해 노동자 들을 다룬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어보려고 한다. 그외의 다른 분야 책들도 섞어서 읽겠지만, 주된 독서 분야는 이렇게 될 것 같다. 위에 첨부한 책에서『십 대 밑바닥 노동』은 예전에 알게된 책인데,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노동자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노동 실태를 다뤘다. 오래 전에 알라딘 보관함에 담아뒀는데, 이걸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는지 아닌지 기억이 안 난다. 설령 읽었다고 해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라면 다시 읽어서 나쁠 건 없겠지. 2015년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이 나온 후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청소년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산업 현장에서 죽어가고 있다. 


『장애학의 도전』과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는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오마이뉴스 박정훈 기자의 저서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에서 알게 된 책이다. 『장애학의 도전』은 장애인 인권과 관련해서 읽어볼 만한 책일듯하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는 오늘 박정훈 기자의 위 저서에서 접한 질병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평생 지병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내년에 읽을 예정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질병인들을 '회복해야 할' '관리가 덜 된' 존재로 보는 것도 반대한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 활동가가 제시한 질병권의 개념은 간단히 말하자면 아파도 괜찮을 권리다. 건강이 전부라는 말이 통용되고 실제로 건강을 잃으면 다 잃은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조한 활동가는 "회복되지 않는 아픈 몸으로도 어떻게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에서 질병권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빌려서도 읽겠지만, 서가에도 몇 권 구비해둘 생각이다. 내년 독서 테마는 사실 엄청나게 광범위하고,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지만, 내가 해당 분야들의 전문가가 될 건 아니니까 일단 얕게라도 두루두루 읽어보려 한다. 적어도 아직은 내 삶에서 직접 대면해본 적이 없는 주제들이다. 책을 몇 십 권을 읽든 내 삶에 직결되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해 공감력과 이해력을 키우는 데엔 한계가 다분하겠지만, 그래도 공부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읽으려 한다. 내가 공부가 직업인 사람은 아니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그래도 뭐든 보고, 읽고, 들으면서 공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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