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옷을 입은 여인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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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게 온갖 실질적인 희생을 다 하면서도 좀 터프한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스타일이다(제일 손해보는 타입). 나의 가장 나쁘고, 어둡고, 초라하고, 슬프고, 절망적인 구석은 모두 엄마의 품안에 있다. 엄마는 그걸 다 받아서 자신의 고통으로 용해했다.


아빠는 좀 다르다. 말과 표현만큼은 저세상 다정함이지만 주는 사랑보단 받는 사랑에 능하다. 어딜가든 순식간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밝고, 유쾌하고, 단순한 사람.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빠가 화를 내는 걸 한번도 본적이 없다. 인생 최악의 배신을 당했을 때도 내가 분노를 샀을 때도 아빠가 최대치로 화를 표현하는 방법은 침묵하는 것이었다. 상대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그런 아빠가 완전히 변했다. 공황장애는 아빠에게서 웃음과 여유, 수다와 농담을 모조리 앗아가버린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아빠의 아빠다움에 기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18)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결핍보다 나은 것이 없다.


스무살에 집에서 나온 이후 나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반드시 집으로 가야할 경우에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 나는 다른 도시로,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대학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 후 첫직장을 구했을 때 아빠는 거의 매일을 내가 퇴근할 시간에 맞춰서 전화했다. 시차 없는 곳에 내가 있다는 게, 그렇게 쉽게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아빠에겐 거의 감격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아빤 주로 본인의 이야기를 했다. 뭘 먹었는지, 누구와 만났는지, 어떤 걸 보았는지, 뭘 했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아빠는 내게 자주 전화를 건다. 어쩌다 코드가 맞아 전처럼 밝은 대화를 할 수 있을 때면 나는 그대로 목놓아 울고 싶어진다. 울지 않으려고 더 크고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내가 우리의 화양연화를 놓쳤다는 자각이 들면, 가족이라는 구심점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 원심력의 자장을 시험했던 지난 날들을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돌이켜봐도 내게는 이 길뿐이었다.


그렇다면 평생 가족 안으로 자신을 유배시켜 스스로가 가족의 구심점이 되는 삶은 어떠했을까?


"애머스트 칼리지의 재무 담당이자 변호사며 상원 의원(20)"이었던 아버지. 수시로 드나드는 명사들. 유복한 가정환경. 비록 어머니는 심한 우울증으로 아이들의 삶에 부재하다시피했지만 평생 함께 살며 서로를 보살폈던 삼남매.


나는 이 삶이 안온했으리라 생각한다. "느리고 조심스러우며 고요한 삶 쪽에서, 하루하루의 그늘진 사면에서(114)" 강렬한 삶을 찾고자 했던 역대급 은둔자의 성향에 잘 맞았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살 수 없었던 삶에 대한 격렬한 질투와 함께 아무리 돌이켜도 그에게 역시 다른 길은 없었으리란 이해에 닿게 된다.


에밀리 디킨슨은 애머스트로, 디킨슨가의 정원으로, 저택 안으로, 방 안으로, 자기 자신의 안으로 침잠해 삶을 관조했다.


(33) 주변 사람들이 저마다 야심을 드러내며 무언가가 되고 싶어할 때 그녀는 그 무엇도 되지 않고 이름 없이 죽겠다는 당당한 꿈을 꾼다. 겸손이 그녀의 오만이며, 소멸이 그녀의 승리이다.


보뱅이라는 필터를 거쳐 재구성된 디킨슨의 삶은 단속적이고 산발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오히려 그럼으로써 더욱 충실하게 재현된다. 누구의 삶도 종으로 또는 횡으로 하나의 방향성을 띠고 질서정연하게 흐르지 않는다. 강렬한 순간들의 스냅샷이 모여 인생의 지문을 만들어내며, 그 지문은 본디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수많은 자료 조사와 참고문헌의 흔적이 비쳐 보인다. 그러나 그 모든 흔적은 결국 보뱅의 시어로 화한다. 그가 디킨슨에게 바치는 몹시도 아름다운 송가가 된다. 두 시인의 목소리가 공명하는 지점에서 독자는 자신과 비슷한 영혼의 결을 발견하고, 우리가 미치지 않았음을 확인받는 일종의 사면을 행하게 된다. 이로써 디킨슨은 고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수호 성인이 된다.


(24) 결국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세상을 섬기든(돈, 명예, 소음) 삶을 섬기든(방황하는 사고, 비사교적인 영혼, 울새의 용맹), 그건 취향의 문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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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6 0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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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6 0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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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6 11: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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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6 13: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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