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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생각 - 논리적이며 비판적인 사고를 위한 안내서
제이미 화이트 지음, 유자화 옮김 / 오늘의책 / 2010년 12월
평점 :
최근 몇 년 동안 서점가에는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었고,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책들도 많았으며, 자신의 철학서에 소크라테스의 기본 사상들을 결합시킨 책들도 심심치 않게 보고 있다. 철학서라면 소크라테스의 단계적 고찰은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저자의 책속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제자를 또 한 번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제이미 화이트. 캠브리지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했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발행하는 철학 저널인 <분석>에서 30세 미만의 철학자가 쓴 최고의 글에 수여하는 저명한 상을 받았다. 저자는 현재 우리의 사고와 언어에 만연한 추론상의 논리적 오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피력하고 잘못된 추론의식에 갇혀있는 독자들을 계몽하고자 이 책을 폈다.
책은 총 12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우리가 범하는 혹은 깨닫지 못하는 논리의 오류 12가지가 그 주제이다. 저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1장-애매어.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운운하면서 논쟁의 핵심을 ‘권리부여’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허위적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의견을 고수할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 즉 근거나 합당한 논증 등이 있을 때에만 그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 또한 권리의 의미는 먼저 그 의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난 다음에야 명백해진다.
2장-동기. 의견을 뒷받침하는 숨은 동기가 있다고 해서 그 의견이 틀렸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동기는 오직 ‘증언’을 다룰 때 그 사람의 신뢰성을 판단하는 데 관계된다. 동기의 오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그저’란 말을 쓰려고 한다.
3장-권위. 권위의 오류는 ‘국민’으로 인해 오히려 번성하고 있다. 권위는 때로 전문성에 기초하나, 민주주의 정치에서의 법제화된 권력은 국민에게 주어진다. 그렇기에 정치가들은 끊임없이 여론을 들썩인다. 그리고 국민의 의견은 단지 어떤 정책을 채택할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뿐이므로 얼마든지 열등한 정책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님이 납신다.)
때로는 불분명하거나 모호한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함으로써 완전히 불일치했던 논점을 해결할 수 있다. (51쪽)
순전히 명백한 기준이 부족할 뿐이어서 단어의 정의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지면 의견의 불일치는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53쪽)
4장-편견. 신비에 대한 열광은 순전히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 무엇도 본질적으로 신비롭지 않다. 신비는 정보와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을 드러낼 뿐이다. 의견의 근거를 대는 대신 믿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분야에 대해 아는 바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믿음의 문제라고 선언하는 것은 대개 자기 패배다. 단지 자기가 변론할 수 없는 주장에 대해서만 사람들은 믿음의 문제를 들먹거릴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 의견이 자명하다거나 명백하다고 말한다면 의심해봐야 한다. 명백하다면 그 말에 깃든 명백함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5장-논박. 발언 자격 -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견의 오락적 가치는 소모적이라는 것에 동의의지만 의견을 반복해서 말한다거나 일관성이 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악당의 생각이라고 해서 전부 잘못된 것으로 매도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사례로 히틀러를 들고 있다.)
6장-반계몽주의. 은어는 보통 덜 경멸적으로 전문용어라고 불린다. 전문성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이용하는 이런 말들은 사실 알고 보면 별로 대단치도 않는 것들이다. 지식인들은 책임회피를 위해 교묘한 말이라는 장치를 이용하고 냉소적 인용부호를 이용하여 독자에게 혼란을 준다.
7장-불일치.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논리적인 결과를 인식하는 일은 인간의 지적 능력과 의지를 벗어난다. 대중적인 논쟁을 오염시키는 대부분의 불일치는 사소한 노력만으로도 찾아내 없앨 수 있다. 모순을 일으키는 사실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모순이 현실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현실에 있다는 생각은 오로지 ‘모순’이 모순이 아닌 어떤 것을 뜻할 때만 가능하다. 19세기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 같은 이들은 ‘모순’의 뜻을 ‘반대나 갈등’정도로 다루었다.
8장-애매한 말. 애매한 말을 쓰는 사람은 딱딱하고 지적인 용어를 의미론적인 교묘함으로 포장하려고 한다. 재정의 또는 애매한 말의 다의적 사용은 지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고, 실제적 문제 해결도 못한다. 어떤 것을 다르게 묘사하거나 상투어로 새롭게 바꾼다고 해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완곡어법이 하다는 사실이야말로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분명치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이는 일이다.
9장-논점회피. 논점 회피의 오류는 논쟁을 일으키는 것을 정확히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논점회피는 일치하지 않는 의견의 근원에 이르지 못할 때 일어나므로 기정사실로 여기는 것의 근본을 탐구해야만 불일치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
10장-우연. 우연을 믿지 않는다는 태도는 자기가 그 분야에 빈틈없는 사람이라는 허영심에서 나온 과시욕의 일부다. 우연을 믿지 않는 것은 실제로 존재치 않는 일을 믿게 만든다. 우연한 일을 설명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11장-통계. 만연되어있는 통계상의 어수룩함으로 인해 이 같은 터무니없는 통계가 의사 결정을 좌우할 확실한 사실로 둔갑된다. 언론, 정치, 경제 분야에서 내놓는 통계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졌는지 별다른 정보도 주지 않은 채 자신들이 주장하는 통계적 사실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열린 비평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운 통계로 충격 받는 일을 즐긴다. 다만 통계가 믿을 수 있어야 한다.
12장-도덕병. 도덕적인 진지함에는 이견을 달 수 없다는 생각은 보편적인만큼이나 유해하다. 이런 생각은 비이성적인 것을 허용하며 도덕적으로도 진지하지 못하다.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문제를 논의한다면 그 어느 때보다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도덕적인 온도가 올라가면 진실에 대한 우리의 헌신도 커져야 하고 적절한 추론도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진지함이 이성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믿음에 대한 자아 중심적 태도에 근거한다. 도덕적인 진지함에서 지적인 진지함을 분리하는 일은 지적으로 경박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어렵다.
저자는 똑똑하다. 세상이 취하고 있는 이기적인 사고방식과 비논리적 술수, 무지에서 비롯된 어불성설 등을 잘 포착하고 독자들이 이에 현혹되거나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지 않도록 일종의 계몽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어려운 말도 아주 쉽게 풀어냄으로써 누구나 저자의 의도와 설명을 잘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놓은 필력도 좋으며 예화와 함께 이어나가는 여러 이야기들이 번잡함도 없고 지루함도 없다. 또한 12가지의 오류의 포착도 놀랍고, 그 구성력도 돋보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분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음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는 타 독자들은 저자로 인해 조금 더 똑똑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리라.
그러나 독자는 저자가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는 무신론자이며, 끊임없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세계관을 거침없이 적어 내려가고 있고, 지식적으로 근거도 없고 앞으로도 밝혀낼 수 없으리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지금의 기독교인의 신앙에 냉소를 보낸다.
그는 우연을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해도 과학자가 증명해 낸 것은 다 지식으로 받아들인다. 지식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으며, 자기 뇌를 지식의 보고로 삼기에 자기 뇌로 수긍하는 것만을 믿는다. 그것이 저자가 가지고 있는 한계이며, 독자가 저자의 글을 지지해 줄 수 없는 이유이다.
수학은 사람들이 만든 학문이고, 일종의 규약이다. 법은 사람사이에서 만든 제도이며 사람에게만 적용하며, 모든 것은 사람의 뇌로만 판단할 수 있다. 거기에 영적인 영역을 적용해서 ‘3은 1이 아니니까 삼위일체는 거짓이다’라고 말한다. 자웅동체를 과학으로 2가 아닌 1로 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 더불어 부모는 자식에게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사람의 숫자는 둘일지라도 부모로서의 위치에 고저가 있는 것도 아니며, 부모라는 개념과 지위를 자식은 나누어서 보지 않고 그저 ‘하나뿐인 나의 부모’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가 지적한 여러 가지 신학적인 부분의 비판을 같이 따져주자면 서평정도로는 부족하고 시간을 따로 내야 하기에 다 담지는 않겠다. 영적 개념을 숫자로 이해시키지 않으면 믿음도 헛것이라고 주장하는 저자. 과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담배는 쾌락을 추구하기에 핀다고 하는데, 이처럼 지식만을 연호하는 그가, 자신에게만은 그 잘난 지식보다 쾌락 선호를 용인하는 것으로도 저자의 뇌를 긍정해 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지적인 교만으로 살지 말고, 삶에 대한 제대로 된 깨달음과 가치관을 가지고 진정한 지혜를 깨달아 참된 지식을 전수하는 저자로 살아가시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