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의 중국식당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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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홀로 떠나 있다는 것. 익숙한 언어도 표정도 풍경도 모두 사라진 어느날 문득, 내가 길 모퉁이에 몸을 구기고 서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그리고 완전한 홀로, 혼자. 그 것이 주는 적막감과 고독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완전한 자유로움 사고의 일탈과 익숙한 것의 소중함 깨닫기.

허수경 시인의 이책은 이런것들을 모두 담고 있다. 메모 형식으로 그날그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이야기 하듯 혼잣말로 풀어낸 그 메모를 보면서 시인이 걸었던 그 거리 그리고 그 거리에 쏟아낸 생각들을 조금 느껴본다. 책 부분부분 그리운 이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카페 어느 테라스에서 펜을 들고 편지를 쓰고 있는 시인의 환영이 보인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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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SE - 비트윈 2disc, 할인행사
미하일 하네케 감독, 이자벨 위뻬르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그녀는 가끔 창밖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푸석하고 헝클어진 머리에는 새치가 듬성듬성 있고, 남자와 한번도 접촉해 보지 못한 기름기 없어 보일 정도로 깡마른 몸피를 가지고 있는 그녀. 피아노 레슨을 할 때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서서 학생이 박자나 음표를 틀릴 때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건반에 잘못 착지한 손을 찰싹찰싹 때리곤 한다. 세계 꼬집는 듯한 그녀의 손맛과 신경질적인 톤 높은 목소리. 오늘도 레슨을 마친 그녀는 문을 열고 거리로 나간다. 푸석거리는 여자는 어떤 의욕도 없이 길을 걷기 시작한다. 

관계의 결과물, 감독 미하엘 하네키의 시선

  영화 <퍼니 게임>의 미하엘 하네키 감독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를 스크린으로 옮겨 <피아니스트>란 영화를 가지고 돌아왔다. 휴양지에서 단란한 한 가족이 달걀을 빌리러 온 두 젊은이에 의해 이유 없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 <퍼니 게임>은 예상과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해 비평가는 물론 관객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들고 나온 <피아니스트> 역시 <퍼니 게임>처럼 당혹스럽고 불편한 여정을 따라가로독 관객을 이끌고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여자 주인공 ‘에리카’의 행동에 적극적인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즉 어떤 장면에서도 ‘에리카’가 왜 이런 행위를 하느냐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감독은 연상의 여인과 연하의 남자가 만나는 운명이 예정된 멜로드라마의 틀에서 벗어난다. 결국 미하엘 하네키 감독은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메스로 자르듯 예리하게 갈라내어 이질적인 행위와 인물과 그들의 삶의 표정의 몽타주를 통해 끝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의 심연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피아노 치는 여자의 이야기 이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전문가인 주인공 ‘에리카’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건조한 하기 그녀의 삶의 목표는 피아노로 이미 결정 내려져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오직 피아노 치는 주체로서의 역할만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의 시선을 피해 피아노로 영토화 되어 있는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탈 영토 화하려는 접속을 시도한다. 그러던 중 ‘에리카’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구애하는 제자 ‘클레메’와의 피아노 레슨이라는 접속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에리카’는 ‘클레메’를 만나기전 숨진 채 행했던 욕망들을 ‘클레메’를 통해 욕망의 문턱 넘어서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위치는 바뀌게 된다.‘에리카’가 ‘클레메’에게 집착할수록 그는 끊임없이 ‘에리카’라는 영토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어머니로 인해 코드 화된 ‘에리카’의 욕망은 ‘클레메’를 만나면서 욕망의 여과장치를 부셔버리지만 그녀는 결국 어깨에 칼을 꽂으며 돌아선다. 즉 그녀는 끝까지 전쟁기계가 되지는 못한다. 다 쥐어짜서 남는 마지막 한 방울은 자신의 삶을 지배해온 ‘음악’이라고 말하면서 박자도 무시하고, 음표도 무시한 채 거리를 걸어간다.


연주되는 욕망의 공간

  영화 <피아니스트>의 공간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에리카’와 그녀의 어머니가 생활하는 공간인 집과 ‘에리카’가 ‘클레메’와 접속하는 공간은 피아노 레슨 교실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공간에서 ‘에리카’의 욕망은 대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밖에 다른 공간으로는 ‘에리카’의 욕망이 여과장치 없이 쏟아지는 집의 한부분인 욕실과 포르노 샵 그리고 ‘클레메’와 키스와 오럴섹스를 나누는 화장실이 있다.

  집이라는 공간은 ‘에리카’에게 끊임없는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녀는 집에서 수많은 문들을 열고 닫는다. 그러나 어느 하나 그녀에게 소통 가능한 문은 없다. 문들은 끊임없이 ‘에리카’를 감싸며 그녀의 모든 욕망을 철저히 봉쇄하려고 한다. 집이라는 홈패 인 공간에서 그녀의 욕망은 영하의 냉장고에 저장해 놓을 수밖에 없다. 집이라는 공간의 권력자인 그녀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에리카’의 삶을 통제 한다. 그녀에게 피아노만을 강요한다. ‘에리카’에게는 절대 화장이마 화려한 옷들은 허락되지 않는다. 늦은 귀가 역시도 금지된다. 결국 집은 ‘에리카’에게는 냉동 창고 이며 피아노는 그녀의 또 다른 냉동고가 되어 그녀의 여성성을 모두 얼려버리고 만다.

  ‘에리카’는 집에서 새로운 공간을 찾는다. 동결시킨 그녀의 여성성을 찾기 위한 공간인 욕실에서 그녀는 스스로 질에 상처를 낸다. 다리 사이로, 욕탕 사이러 번지는 붉은 피는 창백한 그녀의 삶과 집이라는 공간에게 던지는 그녀 나름의 복수이다. 그러나 강제적인 월경의식이 코드화 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삶과 삶의 공간에서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 그것은 텅 빈 신체를 만들어 낼 뿐이다. 강제적 월경의식은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강밀한 힘들을 비워버리는 행위이다.

  화장실이라는 공간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에리카’는 욕망이 치솟을 때마다 요의를 느꼈다. 욕실에서의 의식 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요의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몸 속 가득 꽉 차 있는 뜨거운 것을 오래도록 쏟아낸다.

  이전 까지 그녀는 포르노 샵을 들락거리며 그녀의 쌓아둔 욕망을 분출했다. 여성적 판타지를 감추고 살아가는 그녀 나름대로의 안전한 방식의 욕망분출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요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집이라는 공간과 대립되는 공간은 피아노 레슨 교실이다. 물론 이 공간은 제자 ‘클레메’를 만나기 전 집고 같은 홈패 인 공간으로 그녀에게 복종과 욕망의 억압을 강요했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권력자가 어머니 이었다면 레슨 교실에서는 피아노가 새로운 권력자가 되어 그녀의 욕망들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클레메’와 접속함으로서 이 공간은 매끄러운 공간이 되려고 한다. 그녀의 욕망들은 선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첫 시작이 되는 공간으로. 그녀의 욕망들은 더 이상 코드화 되지 않고 여과 없이 쏟아져 나와 새로운 윤곽선을 그리게 된다.

  그러나 ‘에리카’와 ‘클레메’는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는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그녀는 혼동하게 된다. 배설과 배출이 혼동되는 화장실이란 공간이 과연 그녀에게 진정한 탈주를, 그녀를 붙들고 있는 것을 너머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감독은 관객에게 답을 제시하지 않은 채 영화를 고문에 가까운 퍼니 게임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레슨 교실을 벗어난 에리카의 탈주는 멈추고 말 것이라 생각한다. 더 이상 그녀의 욕망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생성하고 창조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텅 빈 신체로, 황량한 신체로 만들 뿐이다.   

  레슨 교실에서 ‘클레메’와의 접속이 ‘에리카’자신의 삶에 다양한 배치를 가져다 줄 수 있음에도 그녀는 스스로 멈추고 말았다. ‘에리카’에게는 슈만과 슈베르트의 피아노 곳은 너무나 쉬울지 몰라도 리좀의 간주곡은 연주하기 결코 쉬운 것이 아닐 것이다.

  집과 ‘클레메’가 오기전의 레슨 교실은 ‘에리카’의 삶의 영역 중의 한 부분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것을 크게 보면 국가장치로 이해 할 수 있다. 가정이라는 가족제도는 근대 국가장치가 만들어낸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 이다. 레슨 교실 역시 ‘에리카’를 선생이라는 직업으로 분류하려는 국가적 장치이다. 가정이라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녀의 모든 욕망을 통제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강요되어 온 그 통제에 익숙해져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순응하며 살았다. 그러나 ‘클레메’ 를 만남으로서 근대적 국가장치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그녀와 ‘클레메’의 사랑이 영화를 보는 내내 고문으로 다가 올 수도 있다. 어쩌면 감독 미하엘 하네키는 예술 자본론과 국가장치에 종속되어 투쟁하지 않고 살아가는 관객에게 통렬한 비판의식을 감독 나름의 퍼니 게임을 통해 제시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자웅동체의 욕망과 억압

‘에리카’는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성을 가로지는 형태로 무성(insexualite)의 은밀한 형태로 지배되어 왔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끝임 없이 여성적 장신구들을 그녀에게서 제거하려 든다. 새로 산 드레스를 빼앗으면서 유행을 지나면 입지 못할 천박한 옷이라며 빼앗은 어머니와 그녀는 옥신각신 하다 머리채를 잡고 싸운다. 그러면서 집안일에 대한 것들을 그녀에게 제외시켜 준다. 피아노 하나만을 위해서라는 하나의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두 모녀는 한 침대를 사용한다. 나란히 잠을 자는 모습에서 부부 같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그녀는 일종의 남근 적 상징이 되고 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텍스트 <소돔과 고모라>를 분석하면서 태초의 자웅동체를 언급했다. 원래 자웅동체는 동일한 식물 안에서 두 개의 성이 현실적으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하나는 양성이어어서 두개의 성을 가지고 있지만 두 성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의 자웅동체 개념은 횡단적 성으로 부연될 수 있다. 성의 횡단이란 개인 속에서 두 가지 성이라는 두 파편의 공존,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부분적 대상들의 공존을 가리킨다. 즉 한 주체 속에서 하나의 성이 아니요, 두 개의 성이 아니라 n 개의 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각자에게 여러 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떤 여성적 성도 나타나지 않고 메말라 있는 ‘에리카’는 끊임없이 어머니가 강요하는 남성적 성을 벗어나려 애쓴다. 그래서 강제적인 월경의식이나 포르노 영화를 통해 오르가즘도 느껴보려 시도한다. 그러나 여성적 욕망들의 웅성거림은 결국 ‘클레메’와의 접속을 통해 확연히 들어난다. 그리고 그와의 접속을 통해 그녀는 두 성 사이에 공통된 것이 없지만 횡단적인 방법으로 끊임없이 두 성이 서로 교통할 수 있게 시도한다. ‘클레메’와의 접속을 통해 늑대들의 웅성거림 같은 그녀의 욕망과 무의식은 하나의 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다양한 성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지시한다. 그럼으로써 어머니에게 강요되었던 남성성에 대한 부정적 거부를 벗어나고 관음증으로 병든 여성성을 치료함으로써 다양한 성적 존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며 그녀 스스로도 자유로워지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앙티 오이디푸스>에서 현대인의 정체성이라 규정한 정신 분열 자에게 주체는 중심에 있지 않다고 했다. 즉 주체는 가장자리에 있으며 고정된 자기 동일성을 가지지 못한다. 또한 들뢰즈는 인간은 온갖 형태로 온갖 종류의 생명과 접촉하고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율적이고 자유롭고 확고하게 정의된 인간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의 욕망은 서로 조화되지 않는 것이다. ‘클레메’를 만난 ‘에리카’의 성감대는 유기체의 단편이 아니라 개체 이전의 단일한 것들의 분포상태이다. 그것은 하나의 분산되고 무전부적인 순수한 다양성이요, 통일도 전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에리카‘는 ‘클레메’를 통해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만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요 둘을 이룬다는 것도 아니라 수천수만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 하는 기계들 혹은 인간적이지 않은 성이다. 그러나 미리 말하겠지만 그녀의 그런 깨달음은 장치들에 의해 너무나 길들여져 그녀가 끝까지 놓아버리지 못한 것들에 의해 결국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피아노 건반 88개에서 연주되는 욕망

  ‘에리카’가 포르노 테이프이나  ‘클레메’의 남근을 관음(觀淫)하는 동안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피아노 연주곡을 관음(觀音)할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에리카’는 생계를 위해, 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사회적 위치에 의해 등등 너무도 많은 이유를 가지고 피아노 위 건반위에 손을 내려놓는다. ‘에리카’의 수많은 다른 제자들은 학점을 위해, 명예를 위해 피아노를 친다. 즉 인정받기 위해 손을 내려놓는다. 다양한 원인들에 의해 피아노 위에 손가락을 내려놓지만 88개 건반 위에 내려놓는 손가락의 원인들은 욕망하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이다. 그들의 욕망은 근대 사회장치가 만들어 놓은 결핍 때문이다.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배가 고프고 허기가 진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욕망한다.

  이들과 ‘클레메’의 욕망은 분명 다르다. 그래서 일까? 분명 ‘에리카’를 포함한 그녀의 제자들의 피아노 연주곡의 느낌과 ‘클레메’의 연주 느낌은 사뭇 달랐다. 음악의 선곡 역시 이전 사람들이 느리고 무거웠다면 그의 연주곡은 경쾌하고 따른 느낌의 곡이었다. ‘클레메’의 욕망은 ‘에리카’를 사랑하고자 함이다.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과목을 전공한 그는 ‘에리카’의 관심과 사랑을 위해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에 내려놓는 그의 손은 결국 기관 없는 신체가 될 수 있다. 손이 어떤 이웃 항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그의 손은 다른 기능을 하고 있다.

건반 88개에 내려놓는 ‘클레메’의 손은 무수한 욕망의 웅성거림을 가지고 ‘에리카’를 향햐 간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과 접속하는 순간 둘의 욕망은 모두 구부러지고 만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거죠? 라고 아무리 ‘클레메’가 외쳐 보아도 ‘에리카’는 대답할 수 없다. 결국 에로티즘 본연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이 ‘클레메’에게 보일 뿐이다.


길들이려는 욕망, 그 구부러짐

  배설과 배출이 혼동되는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 ‘에리카’와 ‘클레메’는 육체적 접속을 한다. 정사는 늙은 여자에 대한 젊은 남자의 사랑의 아름다움 모습을 기대한 관객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멜로라는 장르적 관성이나 에로라는 외설을 완벽하게 거부한다.    둘의 관계는 ‘에리카’가 주도하는 쾌락의 도구로 남성의 성기를 화면에 위치시킨다. “니 꺼 보지 말고 내 얼굴을 봐.”라고 요구하는 그녀는 삽입을 하지 않고도 쾌락을 느낀다. ‘클레메’는 마지못해 응하면서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그와의 관계에서 그녀의 손은 새로운 기계로 작용한다. 새로운 건반 위에 손을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둘의 관계는 점점 사디즘과 마조히즘적인 행동으로 변하게 된다. ‘에리카’는 ‘클레메’에게 마조히즘적인 행동을 원한다. ‘클레메’는 마지못해 그녀의 부탁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조히즘적인 위치를 고수하려고 든다. 그것은 그녀 안에 가득 들어찬 나르시시즘적인 욕망의 충동을 들어내는 것이다. 근대적 국가장치에 길들여진 모습을 다 토해내려는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삶이 어떤 것도 변화 시키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복수의 한 방법으로 그녀는 텅 빈 신체를 지니기 위해 마조히즘적인 위치를 고수하려고 든다. 

  들뢰즈는 마조히즘을 연구한 저서에서 사디즘은 타인의 고통에서 쾌감을 얻으며 마조히즘은 쾌감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으로 스스로 고통을 겪는다고 했다. 즉 사디즘은 양적 되풀이에 의해 작용하며 마조히즘은 질적 긴장감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클레메’는 사디즘 적 행동을 함으로서 고통을 겪고 ‘에리카’는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발을 붙들고 있는 영토 화되고 코드 화된 것들에 의해 고통을 겪는다.

  <냉정함과 잔인성>이란 저서에서는 마조히스트가 자신의 특이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박해자를 교육시키고 설득한다고 서술했다. 사디스트가 계약을 혐오하고 파괴하는 것과는 반대로 마조히스트는 계약을 선호한다. ‘에리카’역시 먼저 그런 행동들을 제안해 왔으며 ‘클레메’의 거부에 그를 끊임없이 설득해 왔다. 한 두 차례 그는 그녀의 계약을 이행했지만 매번 그것을 그만두고자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붙잡아두려고 만 했다. 여기에서 보면 소유는 사디스트 특유의 광기이며 계약은 마조히스트들의 광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의 성기를 보고 구토하는 ‘에리카’의 행동에 ‘클레메’는 그녀의 육체에 강간과 폭력을 자행한다. 돌연 “네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자신을 망가뜨리면서 얻는 극단적인 자기 우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가 원했던 것은 단순히 섹스가 아니었다. 피아노 건반을 치며 수줍게 사랑이라는 어떤 숭고한 대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제자와 선생의 사랑, 늙음과 젊음의 사랑이라는 소수자의 사랑을 그는 이루기를 바랐던 것이다.

  가정이라는 사회라는 국가적 장치를 벗어나기 위해 ‘클레메’를 택한 ‘에리카’.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위해 ‘에리카’를 선택한 ‘클레메’. 그들은 코드화 된 것에서 탈주하려 노력했으나 결국은 텅 빈 신체 기관으로만 남아버렸다. 다시 근대적 장치 속으로 녹아 들어가 그 삶을 다시 살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클레메’와 ‘에리카’의 접속은 전쟁기계가 되지 못하고 쾌락기계도 아닌 황폐함만을 남긴 채 끊나버리고 만 것이다.

  그들의 욕망은 결국 일상 속으로 돌아가 정지선 위에 머무를 것이다. ‘에리카’의 욕망은 여전히 길들여지지 않고 어깨에 칼을 꼽고 집으로 발걸음을 되돌리는 마지막 장면처럼 다시 홈패 인 공간들 속에서 움직일 것이다. 가끔 칼리 꼽힌 자리가 따끔거릴 것이다. 원래 기억이란 잔인성의 체계를 가지고 있기에.  


에필로그

   영화<피아니스트>는 창백하고 묘한 분위기의 영화였다. 또한 숨 막히는 분위기에 압도되는 영화였다. 젊은 남자 제자와 늙은 여자 선생의 사랑이라는 생각에 정통 멜로를 생각했던 나에게 감독은 예술자본론을 비판했다. 그리고 사도마조히즘을 빌려 섹슈얼리티에 대한 직설법으로 텅 빈 자본주의의 맨살을 드러내보였다.

  이 영화에서 ‘에리카’는 스무 번 이상 문을 열고 닫는다. 내러티브 전개상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한 장면인데. ‘에리카’는 문을 열고 닫을 때 마다 다른 페르소나를 쓴다. 한 가정의 딸로, 교수로, 포르고 즐겨보는 천박한 여자로, 마조히스트로, 질투하는 여자로 등등 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그녀는 다른 공간에 접속되고 다른 인물이 된다. 또한 문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들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에리카는 끊임없이 문을 열고 닫았지만 아직도 닫고 열어야 할 문들은 그녀를 수천 겹으로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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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1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갑니다.

어항에사는고래 2004-10-1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네.
 
Love & Free - 자기를 찾아 떠나는 젊음의 세계방랑기
다카하시 아유무 글, 사진, 차수연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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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번주 들어 팽이처럼 내 안에서 빙빙 돌기 시작한게 역마살이 맞는다보다. 그래 어쨰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했지. 한동안 세계지도 보는 일이 뜸하다 했지. 한동안 여권을 뒤적거리는 일이 적다고 했지.

책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적은 기록들과 저자가 찍은 사진으로 구성되어있다. 그의 기록이라는 것은 여행 가이드가 섞어 약간의 입담 수준의 그렇고 그런 여행기가 아니다. 그의 기록들은 항상 자신에게로 향해있는 촉수처럼 감각적이고 섬세하고 예민하고 풍부하다. 이런 나의 간드러지고 과장된 표현은 아마도 그의 짧은 기록의 몇 페이지에서 감동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샌드위치 속의 베이컨과 치즈 같은 그의 사진들 역시 그의 여행기를 풍부하게 해 주는 그 무언가가 되고 있다. 뭐, 사진이 흑백이라 좀 아쉬운 점이 있지만 칼라로 올릴 경우 책값 역시 큰 폭으로 오르기에 이정도로 만족하고.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책의 제목이 그냥 여타의 여행기와 엇비슷한 느낌이기에 소홀한 느낌도 지울수가 없다.

저자는 여행을 하면서 보고, 느끼고, 체험했던 것을 자신 안에서 자신의 언어로 잘 우려내고 있다. 그동안 내가 거첬던 몇권의 여행기 중, 기억에 남아 한동안 나를 어지럽게 할 사진과 그의 언어의 기록.  아침 일찍 도서관에가자마자 빌려본 이 책 한권에 역마살에 불이 확 지펴졌다. 내일 당장이라도 적금 탈탈털어 떠나야 할 것 같다.  여권의 유효기간이 얼마나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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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우물에서의 은어낚시 - 1990년대 한국단편소설선
이남호 엮음 / 작가정신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요즘도 과자 종합 세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 어릴때만 해도 생일이나 어린이 날 혹은 명절에 받던 오리온 종합과자 선물 세트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각  종류의 비스켓, 쿠키, 카라멜, 초콜렛, 껌이 들은 그 상자를 얻는 때는 세계를 다 얻은 듯 그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방 구석에 숨겨두고 혼자서 아껴아껴 먹었다.

 

왜 신성한 소설 앞에서 과자타라여며 종합과자 선물 셋트를 말하냐고?

왜긴...오정희라는 양갱부터 구효서라는 카라멜을 지나 공지영이라는 비스켓을 씹고 성석제라는 스넥을 부스러기까지 털어 넣고 윤대녕, 신경이라는 쿠키를 담백하게 먹고 은희경, 전경린초콜렛을 핥아먹고 마지막으로 이만교라는 껌으로 입가심 할 수 있는 완벽한 종합선물 셋트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소설집이 그랬다. 90년대를 한꺼번에 훅 훑어 담은 책.

어느 작품하나 떨어지는 것 없이 그 작가의 최고 결정의 작품을 담았다. 그리고 90년대라는 시대에서 결코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작가들을 다루고 있다.  한국 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건 아니건 한번쯤은 이름 들어봤던 작가의 발견에 흥미를 붙잡고 읽을 수 있다. 한국 소설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분들 그래서 한번쯤 이 작품들을 읽어 본 분들에게는 정리의 의미로 다시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 역시 그 작가의 그 작품이 어디 있는지 도통 찾을 수 없을 때 이책을  집어든다. 70년대 80년대를 정리한 무수한 책들 속에서 90년대를 정리하고 회고한 이 책의 의미는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제본한것 같은 느낌의 편집이나 표지가 조금 섭섭한 인상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톡톡'이라는 독특한 사탕이 있었다.

소금 알갱이처럼 굵은 가루 사탕을 입에 넣으면 팝콘 튀기는 듯이 입안에서 톡톡 튀어 올라  '톡톡'이란 이름이 붙었던 그 사탕. 기억하는 분, 있을라나 모르겠지만. 종합과자 셋트가 서서히 사라질 무렵 그 사탕이 나왔는지 내 기억 속에 과자 상자에는 '톡톡'이 없었다.  종합과자 선물 셋트에는 오정희의 옛우물 부터 윤성희의 '계단"까지 뿐인 것이다.  사탕 '톡톡'같은 2000년대의 작가 박민규, 정이현 그리고 등등의 작가들은 이제 어느 상자에 담아야 할까? 요즘 아이들은 무얼 먹는지, 무슨 선물을 받았을 때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을 느끼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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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것은 모두 혼자다 - 박상우 작가수첩
박상우 지음 / 하늘연못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 본다는 일은 언제나 설레이면서도 가슴 조마조마한 일이다.어릴적 열쇠로 잠궈 놓은 동생의 일기장부터 아버지, 어머니의 일기 그리고 체육시간 혼자 교실에 남아 서랍 속에 있는 아이들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일까지.

내 마음의 옥탑방으로 99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작가, 박상우의 이 책을 보는 일도 나이게는 일기를 훔쳐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설레이면서 조마조마 하면도 혹시 등 뒤에 누가 서 있지는 않을까 자꾸만 귀돌아보면서.

책의 내용을 보면 일상 속에서 부딪힌 풍경이나 사람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얻은 느낌들의 기록이다. 그 기록은 순간의 메모이기 떄문에 걸러지지 않고 포장되지 않았다. 그 글들은 방금 잡아올린 생선처럼 싱싱하고 생금 밭에서 뽑아온 상추처럼 푸릇루릇하다.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인 터라 작가가 찌은 사진들도 몇페이지 실려 있고, 소설처럼 개연성이나 필연성은 없지만 순간순간 작가의 느낌과 생각 그 진액을 그대로 마시는 기분이다.  어떤날의 기록하나 하나뿐만이 아니라 작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질문을 끝임없이 던지는 작가의 뒷모습도 볼 수 있다.

정제된 여과기를 통과한 소설 읽기고 좋지만 나는 이 책처럼 작가가 방금 쏟아낸 싱싱한 메모들을 좋아한다.  소설 속의 인물로, 풍경으로, 사건으로 다시 탄생되지 않고 사산 될지라도 그 사산의 흔적을 보는 일은 독자로써는 일기장을 훔쳐보는 일만큼 흥미로운 것이다. 사산 된 그 흔적들은 그가 써왔던 그리고 앞으로 그가 쓰게 될 소설 속에서 여백의 공간을 채워나갈 것이라 생각한다.

언젠부턴가 가방 한구석에 꼭 넣어다니는 수첩 하나. 모퉁이가 다 닳은 수첩을 넘겨본다. 아직 내 안에 임신 중인 그 어떤 기록. 가끔 헛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 떄마다 용기를 던져준다. 그 어떤 날의 기록 속에 나는 치열하게 살았고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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