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한승태는 전국을 돌며 험한 일을 했고 이를 토대로 인간의 조건(시대의 창 펴냄)을 썼습니다. 지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예능 프로와 이름이 같고요.
작가가 처음 쓸 때 책 제목으로 `퀴닝(Queening)`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제목으로 정해지면서 마지막 장 제목으로 남았지요.

계층 상승이 힘들어진 요즘, 딱 어울릴 만한 이야기 제목이었습니다. 물론 출판사 쪽에서 작명한 `인간의 조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마디로 여러 군상의 인간을 겪으면서 삶의 조건을 생각해보게 되니까요.

인간의 조건에는 한승태가 일한 곳 5군데를 담고 있습니다.
꽃게잡이하는 진도, 편의점과 주유소가 있는 서울, 돼지 농장이 있는 아산, 비닐하우스가 있는 춘천, 자동차 부품 공장이 있는 당진을 말입니다.
마지막 6장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각색한 겁니다. 물론 한승태가 지금까지 일한 곳을 회상하는 내용도 담겨 있으니 일종의 에필로그라 봐도 무방합니다.

인간의 조건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요? 장의 첫부분에 있는 하이라이트에 있었습니다.

부제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 와 뒷 표지에 있는 홍보 문구 `치열하지만 가난한, 세상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각자 일을 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사는 우리의 모습, 우리나라 그 자체의 축소판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함축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의 조건`은 노동 현장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치열하고 슬프지만 사실이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읽고 나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우리가 겪었던 일들이 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하는 생각에서요.
한번 쯤 읽어보며 생각하기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퀴닝은 체스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내가 그 단어를 알게 된 것은 수년 전, 신림동의 어느 고시원에서 살던 무렵이었다.
(중략)
 상대 진영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오는 졸(즉, 체스의 폰Pawn. 여기서는 핸드폰과 헷갈리니 그냥 졸이라고 해두자)이 하나 있었다.
(중략)
 그런데 그 졸이 내 진영 끝에 도달하자 갑자기 환하게 빛나며 여왕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중략)
 체스에서도 졸은 한 번에 한 칸씩 전진하는 것밖에 못하는 가장 약한 말이었다. 그런데 폰이 한 칸씩 한 칸씩 전진해서 상대편 진영의 끝에 도달하면, (아마도 그 노고를 가상히 여기) 잡힌 말 중 어떤 말로도 변신할 수 있다. 이 규칙의 정식 명칭은 승진Promotion이지만 주로 가장 강력한 여왕으로 바뀌기 따문에 여왕Queen이 된다는 의미의 퀴닝Queening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중략)
 나는 퀴닝을 계층 상승의(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표현으로는 `개천에서 용 난다`) 은유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책 제목으로 쓸 만하다고 생각한 건 세상에서 나 혼자뿐이었던 모양이다.

- 서문_우리도 퀴닝 할 수 있을까? 中 에서


 "그래, 뱃일이 힘들지. 그치만 무슨 일이든 다 마찬가진기라. 막내야 바라, 니가 평생 여 있을 거 아이다 아이가? 이 세상에 있제, 이 세상에 안 힘든 일은 없다. 무슨 일이든 다 힘든기라. 니 당장은 뱃일이 제일 힘든 거 같제? 여만 나가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 같제? 근데 그게 안 그렇다. 니 앞으로 무슨 일을 하건 그거 다 힘들 끼라. 내가 앞날이 창창한 아한테 악담을 하는 게 이이고 일이란 게 그런 기라, 일은 우찌 됐든 힘든 기라."

- 1부. 이틀발이_진도, 꽃게잡이

 
매주 한 번 씩 들르는 슈퍼바이저는 접객 관련 불만 신고가 줄지 않는다며 언제나 투덜거렸다. 그는 어떤 손님이 알바와 다툰 일을 회사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회장님이 그걸 읽으시곤 해당 편의점이랑 계약을 해지하라며 노발대발했다는 이야기를 빼먹지 않고 들려줬다. 모든 서비스업 종사자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적힌 어깨띠와 녹슨 못을 박은 각목을 하나씩 지급한다면 손님과 종업원 사이의 싸움이 획기적으로 감소하리라 생각하지만, 서비스업계가 이런 혁신적인 제안을 받아들일 만한 안목을 갖추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 2부. 빈민의 호텔_서울, 편의점과 주유소

 분뇨장에 똥을 버릴 때는 종겨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돈사마다 외부에 분뇨장이 있었다. ㄷ자 형태로 벽을 두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하루 사이에 부쩍 늘어난 똥 바다 위에 똥을 쏟아부었다. 똥물을 헤치고 분뇨장 안쪽까지 리어카를 끌고 갈 자신이 없어서 분뇨장 입구에만 똥이 잔뜩 쌓였다. 나는 종교도 없고 신이란 존재를 늘 의심했지만, `철철철` 소리를 내며 검붉은 똥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걸 보고 있으면 저절로 입으로는 신을 부르짖게 된다. 이틀 동안 분뇨장에서 신을 찾은 횟수가 그 이전까지 기도한 횟수를 압도할 것 같았다. 신심이 시든 종교인에게 분뇨장에서 일해볼 것을 권한다.

- 3부. 과자의 집의 기록_아산, 돼지 농장

 해가 지고, 냉기와 빨간색 물이 기다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냄비에 물을 끓여 얼굴을 씻고 빨간 물을 데워서 밥을 먹었다. 밤이 깊어지면 난데없이 `쾅쾅, 투투투투`하며 기계음이 들렸다. 온풍기 돌아가는 소리였다. 미니 하우스 내부 온도가 30도 이하로 내려가면 자동으로 온풍기가 작동했다. 온풍기에 달린 두꺼운 비닐 호스가 미니하우스 내부로 연결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온풍기 바람을 숙소에서는 느낄 수가 없었다. 오이보다 우선순위가 낮다고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농장은 기본적으로 지붕과 쌀만을 제공했다. 이런 유의 간소함에는 우리나라의 복지 시스템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 4부. 면죄부_춘천, 비닐하우스

 한국 사람이라는 단어에는 최면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아저씨들은 입버릇처럼 "그래도 힘들 땐 한국 사람밖에 없어" 하며 서로를 위로했지만 바로 그 힘든 시기, 즉 낮은 보수, 긴 작업 시간, 위험한 작업 환경을 제공하는 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편리하게 잊어버렸다. ㆍㆍㆍㆍㆍㆍ 식사 시간이면 중국인들을 향해 "니 씨팔러마!" 하며 킬킬대는 남자들이 숙소에 들어오면 중국인들이 시끄럽게 떠든다느니 도무지 에티켓이란 걸 모른다느니 하며 화를 냈다. 이런 상황에는 심술궂음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 5부. T. G. I. F._당진, 자동차 부품 공장

 
나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 6부. 퀴닝Quee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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