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게 ‘우리‘와 ‘너희를 구별해 말하는 가일을 보자, 상남은 또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가일이 말을 이었다.
"아까 공장으로 내려갔다 당한 사람들, 너희들이 말하는 비누인간들, 식량 가지러 간 거 아니야. 대화하려고 간 거라고, 우리는계속해서 말하고 또 말했는데…….."
"네가 인간이 아닌 건 충분히 알겠으니까, 그만 떠들어‘
상남은 가일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나는 뭐 하러 데려온 거야?"
"인질."
대답은 짧았다. 가일은 슬픈 표정으로 덧붙였다.
"네가 마지막 희망이야. 우리는 살고 싶어." - P105

마을에 울려 퍼지는 ‘위험하지 않습니다‘는 문구가 ‘죄 없는 그들을 당신들이 죽였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마을 주민 중, 손에 하얀 피를 묻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도 아니었잖아."
"맞아요. 중요한 건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죠."
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었지만, 사람과 다르지 않았음을, 그들도 우리와 같았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이도 있었고,
배려심 깊고 푸근한 이도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한 계절이 지나도록 부대끼며 같이 살았으니까. 같이 일하고, 물건을 사고팔았으며, 같이 공부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 P112

"사,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살인이야?"
누군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분들이 사람이 아니면 뭔가요?"
"피도 하얗고, 피, 피부도 하얗고."
"실종자 중에 백색증 환자가 있었나요? 피부색이 다르면 사람이아닌가요? 이 세상에는 많은 희귀병이 있죠. 그분들은 사람이 아닌가요? 사람의 정의가 뭔가요?"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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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는 내가 손을 뗐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페달을 밟았는데 뱀처럼 이리 꿈틀, 저리 꿈틀 하면서도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가는 거였다. 난 너무 기뻐서 팔짝거리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지오가 놀라서 또 넘어질까 봐 입을 막았다. 우스꽝스럽게 비틀대며 앞으로 꾸역꾸역 나아가는 지오의 자전거를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지오가 뒤를돌아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건처음 보았다. 우리의 첫 번째 작은 성공이었다. - P19

나는 또 네 생각을 한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네가 지금 여기 있었으면, 여긴 숨어 있기 좋은곳이니까. 욕심과 미움이 힘을 다투는 곳이 아니니까. 다시 세상이 고요해질 때까지 너를 데려와 여기 함께 숨어 있고 싶다. - P54

나는가파른 림 로드에서 산양을 올려다보았다. 산양은나를 내려다보았다. 발밑은 붉은 절벽, 하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내가 무사히 지나가게만 해 달라고 빌던 벼랑길에, 저 작고 예쁜 것이 살고 있더구나. 남편과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보다시피 무사히 늙었단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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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느닷없이 들어서였다.
소녀의 옷차림은 초라하지도 사치하지도 더럽지도않은 그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거였고, 머리 모양도 약간의 멋을 낸 티가 귀여운, 그 나이의 평균치의 머리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대화가 있고, 자유와 구속이 적당히 조화된 가정으로서의 집이었다. - P48

그 소년도 남보다 더 불량해 보이거나 초라해 보이지 않는 평균치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집 없는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 났다. 남부럽지 않게 거두어주는 집은 있을지 모르지만 타인과 제대로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가족이 있는 집은 없는 아이처럼 보였고, 괜히 백화점 안을 쏘다니는 소년 소녀들의태반이 완전한 집은 못 가진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근거없는 생각도 들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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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는 곁에 계속 있어 주지 않았어. 가까이 있으면 손가락을 아프게 할 수 있다면서 금방 가 버렸어.
아침에 일어나서도 나는 너무 외로웠어. 손가락이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식구들한테 명령만 내려서 그런 걸까. 우리 할아버지는 안 그랬어. 열 시간 넘는 수술을 받고 나서도 우리에게 다정하게 말했어. 나랑 형을 보고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웃어 주기까지 했거든. - P41

"그러면 할아버지처럼 사람들한테 짜증도안 내고, 말도 이쁘게 해 볼래?"
"노력은 해 볼게요."
"그래, 우선은 좋은 마음으로 하루를 지내야해. 그런 다음에 유행 팽이를 돌리다가 할아버지를 불러. 우리 선규 손톱을 두 배로 빨리 자라나게 해 줄 테니까."
"헐! 할아버지는 그런 것도 조종할 수 있어요?" - P32

꿈을 이룬 사람들은 팔을 높이 들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려. 모르는 사람들도 팔짝팔짝 뛰면서 같이 기뻐해 주고, 그런데 내가 얼떨결에 꿈을 이룬 순간에는 변하는 게 없더라. 친구들에게 병을 옮길까 봐 얼른 교실에서 나와야했어.
"강선규는 오후 두 시에 오세요."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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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은재 사계절 아동문고 100
강경수 외 지음, 모예진 그림 / 사계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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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가 코로나로 매몰된 채 1년하고도 반이 되어간다. 세상은 힘들고 사람들의 마음은 각박해지고, 여러 편으로 갈라서 나와 다른 곳에 서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다투고.....

아이들은 그 시간을,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뉴스에서는 하루도 코로나 이야기를 거른적이 없다. 이야기에 '아이들'은 얼마나 등장했을까. 등교중지, 등교시작, 온라인수업의 폐해, 매체에 중독되는 아이들 같은 뉴스거리가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본 어른들은 얼마나 될까.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진지하게 그런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다.

여섯편의 이야기에 그런 아이들의 시선을 담은 거 같아 서늘하고, 부끄럽고, 안타깝게 읽었다. (정의로운 은재)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과 소용없는 짓일지 몰라도 그걸 지켜보려는 사람들, (그 날밤, 홍이와 길동이) 아이들을 괴롭히는 어른들 나아가 그 어른이 부모일 때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이 어떨까, (골목이 열리는 순간) 재지않고 순수하게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내 친구를 만드는 일이 제일 어려운 세상, (살아 있는 맛) 사육장에 동물들을 가두어 기르듯이 우리는 모르고 있지만 우리도 그렇게 갇혀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손톱끝만큼의 이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커녕 자신만 이해받고 싶어하는 어른들 또는 무관심한 사람들- 그게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바이, 바이)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결국 진짜로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이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

오늘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음을 묻는 이야기를 건네봐야겠다.

바다 말대로 양동이를 쓰는 건 언제나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난 후였다. 찬물을 한 번 뒤집어쓴다고 못된 마음이 마법처럼 녹아 없어지지도 않았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은재는 알았다. 모두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겠지. 양동이가 없는 다른 곳에서. 그렇다면 지금껏 은재가 한 일은 뭐였을까? 은재의 속마음만 시원해질 뿐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그러면....은재는 바다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러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오하림_정의로운 은재) - P26

우리 안에는 좋은 마음도 있고 나쁜 마음도 있어. 나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아주 못된 짓을 하기도 하지.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좋은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면, 아버지도 오늘 일을 틀림없이 후회할 거야."
"흥, 나중에 후회를 하든지 말든지."
"길동아, 우리가 세상의 나쁜 마음들을 다 혼내 주자..(진형민_그날 밤, 홍이와 길동이) - P58

내 머리를 위해서라도 잘못 본 게 아니면 좋겠다. 엄마도 반가워할 텐데. 혹시 나처럼 그걸 본 애가 있을까. 내 머리가 멀쩡하다는 걸 증명해 줄 사람. 단 하나라도.

‘그런 애가 있다면 내가 평생 친구로 인정할 거야. 그런 애면 돼, 내 친구는. 진짜로 봤으면 어떻게, 상상이면 어때. 나한테는 다를 게 없는걸. 어차피 세상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잖아. 나는 내가 본 걸 믿을래. 그때 분명히 가슴이 막 설레고 행복했단 말이야. 그걸 본 애가 하나도 없다면, 그때 행복해질 권리는 나한테만 있었던 거야!‘(황선미_골목이 열리는 순간) - P72

어두운 거리와는 달리 집집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집집마다 안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실과 수업 때 봤던 닭장과 돼지사육장이 떠올랐다. 층층이 쌓인 공간에 갇혀 있는 사람들 모습이 사육장에 갇힌 동물들과 벼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모두 다 청결과 위생에 힘쓰는 공간이었다. 살아있는 맛을 내기 위해 노력한다는 농장 주인의 말도 떠올랐다. 사람들이 동물들을 우리에 가두니 거꾸로 동물들이 사람들을 집에 가둔 것 같았다. 이제 사람들도 살아 있는 맛이 날까? (전성현_살아 있는 맛) - P114

전광판 화면에 ‘평화는 힘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이다.‘라는 글이 떴다. 이해가 없으면 평화는 유지되기 힘들다고?
나는 할머니가 기를 쓰고 시위에 나가는 이유도, 아빠가 그런 할머니를 못마땅하게만 여기는 이유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엄마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이해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손톱 끝만큼도 서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 우리 집에서 더 이상 나 혼자 애쓰고 싶지 않다.
‘왜 나만 이해해야 해!‘(최나미_손톱 끝만큼의 이해) - P142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수한 별들이 밤하늘에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나와는 상관없어질 아름다운 광경. 이 거대한 우주의 수많은 생명체 중 나의 존재가 지워져 간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우주는 팽창하고 은하는 반짝일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별들이 더 아름다웠다. 왜 이전에는 하늘을 올려다볼 생각을 안했을까? 왜 다이빙대에서 돌아섰을까? 왜 친구들과 다투었을까? 왜 사랑한다는 말을 아꼈을까? 왜 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야, 세상의 아름다움을 더 자세히 발견했을까.(강경수_바이, 바이)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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