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남는 한나에 대한 기억

한나의 모습들은 나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마음속의 스크린에 투사하면 조금도 변하거나 마모되지 않은 채로한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나는 그 모습들을 잊고 지낼때가 많다. 하지만 그 모습들은 언제나 나의 마음속에 다시 떠오르고, 그러면 나는 여러 번에 걸쳐 차례차례 나의 마음속 스크린에 비추어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중 하나는 부엌에서 스타킹을 신고 있는 한나이다. 또 다른 모습은 욕조 앞에 서서양팔을 활짝 벌린 채 큰 타월을 들고 있는 한나이다. 달리는자전거 바람에 치맛자락을 휘날리는 한나도 있다. 그다음으로아버지의 서재에 서 있는 한나가 있다.  - P70

나는 그녀에게 그 비단 잠옷을 선물했다. 그것은 가지색고 가느다란 어깨 끈이 달려 있어서 어깨와 팔이 드러나기:어 있었다. 치맛단은 복사뼈까지 내려왔다. 잠옷은 반짝이면서은은하게 속이 비쳤다. 한나가 기뻐하며 웃자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발밑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빙그르르 돌기도 했다.
스텝을 몇 걸음 밟다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기도 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깐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계속 춤을추었다. 그것 역시 내게 남아 있는 한나의 모습들 중 하나이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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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어나 앉았다.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쪽지가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서 탁자 옆과 아래, 그리고 침대 밑과 침대 속까지 찾아보았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아침 식사를 가지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써놓고 나갔거든요."
"그랬어? 난 쪽지를 보지 못했어."
"내 말을 못 믿겠어요?"
"물론 널 믿지. 하지만 나는 쪽지를 보지 못했어."
우리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와 쪽지를낚아채어디론가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져간 걸까? 모든 게 오해였나? 그녀의 분노, 나의 터진 입술,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 나의 속수무책 등 모든 것이?
나는 계속해서 찾았어야 했을까? 쪽지를 한나가 화난 이유를, 내가 속수무책으로 당한 까닭을?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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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는 그렇게 우는 사람이 없었다. 
또 우리 집에서는 사람을 때리지도 않았다. 손으로는 물론이고 가죽 허리띠로 때리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모든 걸 대화로 해결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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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어차피 지는 싸움

그 후 몇 주 동안 나는 그녀하고 싸우지 않았다. 그녀가위협을 해오면 나는 지체 없이 무조건 항복했다. 나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맡았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실수들을 시인했고, 내가 결코 품지도 않은 의도들을 고백했다. 그녀가 냉정하고 뻣뻣하게 나오면, 나는 어서 다시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고용서해주고 사랑해달라고 애원했다. 때때로 나는 그녀 자신의차갑고 딱딱한 태도 때문에 그녀 스스로도 고통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나의 변명과 맹세, 애원의 따스함을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가끔 나는 그녀가 내게서 너무 쉽게 승리를 거두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았다. 그렇지만 어쨌든 다른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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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아이의 생각 전환.
담이라고 생각하니 슬프다.

내가 부활절 휴가 때 함께 자전거를 타고 교외로 나가자고 제안을 해두었기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러면 우리는 어머니와 아들처럼 한방을 빌려서 온밤 내내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과 제안이 내게 전혀 수치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게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어머니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나는 독방을 얻으려고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병원에 가거나 새외투를 사러 갈 때 어머니와 함께 가는 것, 또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 어머니의 마중을 받는 게 이제 더 이상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와 함께 길을 나섰다가 학교・친구들과 마주치면 나는 혹시 마마보이로 보일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어머니보다 10년이나 젊지만 나의 어머니가 되려면 될수도 있었을 한나와 함께 길거리에 나서는 것은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자랑스러웠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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