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나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굴고 있다. 저 혼자 태어나서 저 스스로 자라고 어른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모든 걸 저혼자 판단하고 결정하고 언젠가부터 내게는 통보만 한다. 심지어 통보하지 않는 것들도 많다. 딸애가 말하지 않지만 내가아는 것들, 내가 모른 척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딸애와 나사이로 고요히 시퍼렇게 흐르는 것을 난 매일 본다. - P37
가끔씩 딸애의 이런 말이 왜 협박처럼 들리는 것일까. 울먹일 것 같은 저런 표정이 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훨씬 더 강력한 수단이 되는 걸까. 딸애는 그걸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 P33
나라고 뭐 언제까지 엄마한테 손을 벌리겠어.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게 동의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다만 딸애의 상황을 헤아리려고 최선을 다할뿐이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해 보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오래전 내 부모가 내게 했던 것처럼 열심히, 더 열심히노력하라는 말을 딸애에게는 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 - P31
청년들은 젠이 여기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하긴 이떤 의미에서 그들이 만나러 온 젠은 이곳에 없다. 그러면 여기 있는 젠은 젠이 아닌가? 이들은 젠에게 벌을 주러 온 것인까? 존경받아 마땅한 젊은 날에 비해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어졌는지, 지금 네 꼴이 어떤지 보라는 말을 에둘러 하고있는 걸까? - P24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 P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