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카프카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계속 잃고 있어. 소중한 기회와 가능성, 돌이킬 수 없는 감정. 그것이 살아가는 하나의 의미지.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아마 머릿속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기억으로 남겨두기 위한 작은 방이 있어."


무슨말 보다 그저 '하루키다운 소설'이다가, 이 책의 배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을 가진 문장일듯 하다. 비록 하루키를 읽고, 그와 어떤 방향이라도 소통을 하였고, 또 하고 있는 이들끼리만 통하는 문장이겠지만, 그 어떤 문장보다도, 이 책은 하루키스럽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리라 느껴진다. 도대체 하루키다운게 뭐냐고? 글쎄,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내가 느끼는 하루키의 하루키스러움은, 자기만의 내면속에 웅크리고 있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그런 연기(煙氣)들을, 직접적으로든, 아니면 메타포를 통해서든 참으로 묘한 내면의 울림을 통해 표현함에 있다. 누구든지 생각하곤 하는, 나만의 진지함과 내 주변의 진지함. 그 세계의 진지함. 그 진지함의 갈퀴로 사람들의 마음속 찌꺼기들을 여기저기 긁어주는데서 느끼는 신선함과 상쾌함을. 난 그것을 하루키 소설이 던져주는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다 좋은데 말이지, 그의 인물들은 정말 지나치게 진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무슨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진지할 수 있지? 평상시에 우리의 대화가 그렇게 진지한 것이었나? 가식같단 말이지."

분명,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자신만의 진지한 내면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무슨 고민과 생각이 있어도 당신을 만나서는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늘어놓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한숨으로 헤어진다. 그 한숨을 바라보라. 우울하고, 고민이 있고, 삶이 고달프고, 또는 사랑에 빠졌을 때,.그때 우리가 절실히 바라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다. 이 가슴속에서 썩어문드러지고 있는 감정을 아무데나 휙!휙 던져버리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우리는 평상시의 얼굴이라는 봉투속에 이 썩어가는 감정들을 하나, 둘 쌓아놓기만 한다. 하지만 더이상 그 평상의 얼굴이라는 봉투속의 감정들이 넘칠무렵, 그 악취가 자신의 사위를 감싸고, 터지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그제서야 울며불며 외친다. "나.. 괴롭다니까!!"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 어떤 '격식', '의식'을 차리려고 한다. 사실, 소설속의 인물들이 그 진지함을 전혀 방해받지 않고 술술 내뱉을 때, 오히려 그 원활함에 하지 않아도 될 고민과, 상처를 받을지 모르지만, 우리처럼 가슴이 미어 터질때를 기다리는, 즉, 어떤 "때"와 어떤 "격식"을 차린다는 것은 가식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주보는 서로가 상대의 얼굴에서 고민의 자취를 느끼고 있을때, 그럼에도 어떤 격식이 터뜨려지지 않음을, 그 폭발을 기다리는 것은, 알고도 모르는 척. 그게 사실 진정한 가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 소설의 인물은, 결코 가식적이지 않다. 그래도 껄끄로워 보인다면 가식적인 우리의 모습을 비웃는 것 같은 그들에게서 느끼는 어떤 불편함이다. 

지금 나 자신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이 진지하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진지하고, 필사적으로 먹이를 달라 조르는 금붕어도 진지하고, 저기 끓고있는 라면 또한 진지하다. 그 무엇도 자신의 진지함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하루키의 인물은 우리의 내면에 뭉쳐져 있는 진지함들을 그저 밖으로 끌어내온 죄밖에 없다. 

<해변의 카프카>는 그런 소설이다. 숨기지 않고, 나를 드러내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다만, 이 <해변의 카프카>의 세계는 진지한 사실성속에 비사실성 - 비현실성을 가지고 진행한다. 그 비현실성이 가지는 메타포의 의도야 이해가지 않는바가 아니지만, 분명 실제의 삶을 배경으로 전개하는 데 있어서는 다소 부조화가 일지 않을 수 없다. 이건 SF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외수"씨의 초기작들이 도인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를 한데 혼합하여 마치 현실인양 표현하는 것처럼,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이외수씨 소설을 SF라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건 조금 다르다. 그 책들은 신비적인 또는 도가적인 내음을 소설전반에 퍼뜨리며 서서히 그런 세계를 드러내는데 비해, <해변의 카프카>는 마치 현실인양 그려놓고 도저히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으로 폭격을 퍼붓는다. 대체 환상주의 소설도 아니고, 사실적이라는 하루키의 소설이 왜 이런거야? 이거 무슨 소설이야? 분명 나도 그건 느끼면서 읽었다. 도저히,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허무맹랑한 구조로 나아가는 이 소설의 발자욱들을 분명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내가 하루키의 소설을 즐기는 이유중의 하나가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말한바 있다. 하지만 내가 즐기는 그 현실성은 하드보일드도 아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묘사력의 화려함도 아니다. 내가 즐기는 리얼리즘은, 뻔히 아닌줄 알고 있는데도, 그래야 하는곳이 그곳에 있고,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뻔뻔한' 하루키의 진행법이다. 나는 이렇게 비현실도 현실처럼 읊어내는 하루키를 즐기는 것이고, 그래서 굳이 따지지 않는다. "아니 KFC할아버지는 통닭 이제 안팔아요?", "거기, 별장이 어딨지? 대체 그런 숲이 어딨어?" "거기 천국이야? 버뮤다야? 말도안돼."



이 책을 하루키의 가장 위대한 소설로까지는 보지 않지만, 하루키로서는 괜찮은 소설 하나 썼다는 생각을 한다. 분명, <상실의 시대> 만큼 사람의 마음을 끄집어 당기지는 못했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만큼의 충격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 둘을 절충했다고나 할까. 이 두 작품의 장점들을 섞어 놓았다는 생각은 문득 들었다.

즉, 이 <해변의 카프카>는 그저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자기의 마음에 동시에 두고 있는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소설이라고 본다. <상실의 시대>만을 떠올리며 보는 이는, 이 복잡하고 기이한 배경에 거부감을 느낄터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만을 떠올리며 보는 이는, 이 소설의 밋밋함에 실망감을 금치 못할 게다. 하지만 이 둘을 다 마음에 지니고 본다면, 이 두가지의 하루키적 특징을 맛 볼 수 있을터다.

그 둘과 동행한다고 이 책이 반드시 좋아 보일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을 좋지 않게 보는 시선들을 살펴보았을 때, 분명 그 둘 중 - <상실의 시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 어느 하나만의 추억을 가지고 이 책을 평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될 터이다.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것들이 주었던 너무도 강렬하고 자극적인 맛은 사람에게 집착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의 맛을 즐기는 것 못지 않게, 왜 간혹 섞어 먹는 재미도 만만치 않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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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sta 2004-09-11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년대 초 까지만 해도 <난 왕가위가 좋더라><난 하루키를 읽어>라고 말하면 좀 멋져보이던 시절이었죠.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말이 진부한 느낌까지 안겨주는 지금, 저는 여전히 하루키를 좋아합니다. 아직은 평가를 보류하고 싶은 몇몇 일본 작가들 무리에 하루키까지 포함시키는 건 좀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해변의 카프카>에 악평 일색이라는게 좀 씁쓸하던 차에 호의가 느껴지는 리뷰를 읽으니 마음이 먼저 반가와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_ 2004-09-11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놓고 하루키에 대해 알은체하며 그게 독서의 깊이를 말해주는 양 말하는 사람들을 볼때면, 그렇게 하루키를 우상화시키는게 오히려 그의 글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사람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상실의 시대에서는 정말 지나치게 큰 충격을 받은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는 정말 즐기고픈 작가로서 하루키를 접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