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언젠가는 죽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다. 다만 그 날을 기약할 수 없을 뿐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측은한 동정심은 인간을 다르게 변모하게 하는가 보다. 츠구미는 삶에 대한 동경이나 생존에 대한 욕구보다는 그러한 두려움과 동정심을 뛰어넘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언제일지 모르지만 마치 기약된 죽음인냥 매순간 내가 원하는 것을 치열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건 죽음을 기다리는 자의 사치스러운 여유일지도 모르지만 두려움과 동정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일게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남자 주인공 정원처럼 죽음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아버지를 위해 사진관 현상기 작동법이나 텔레비전 사용법을 꼼꼼히 적어두는 것이라든지, 다림의 사랑을 멀리서 지켜보며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다소 정적인 운명관이다. 반면 츠구미는 여름 바닷가의 햇살처럼 치열하고 열정적이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써놓은 편지인냥 마리아를 놀래킨 도깨비 우편함 사건이라든지, 중학교 때 자신의 병약함을 놀리던 반 친구를 향해 얼굴이 파랗게 되도록 화를 낸 일이라든지, 남자친구 쿄이치의 강아지 겐고로를 훔쳐간 남학생을 위해 파놓은 구멍, 그리고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쿄이치에 대한 감정 표현 등등 주변의 배려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츠구미의 모습은 더없이 얄미운 말괄량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의 여성이다.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멀쩡한 사람이 어느 날 이름없는 병이나 사고로 죽기도 하고 치유불가능한 병에 걸려 수 년동안 사는 이들도 있다. 언제 죽을지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흔히 하는 얘기로 내일 죽는다고 하면 오늘 저녁에 나는 무엇을 할까? 마지막 츠구미의 편지는 죽음을 준비하는 이의 편지이긴 하지만 그건 츠구미 답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츠구미 또한 평범한 여성일 뿐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누구나 한 번쯤 하게 되는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