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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바로 지금 여기에서, 고유명사로 산다는 것
최진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3월
평점 :
생각해보니, 지난 주 우리가 소막창 안주에 ‘처음처럼’을 마시며 나눈 노변정담 중, 우주생물학적 관점의 필요성과 함께 최진석 교수의 노자론 까기가 있었습니다. 지구생물학의 에피스테메라는 한계를 드러내는 우주생물학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안선생님이 비판하신 노자론에 대해 함께 까보기로 하겠습니다.
마침 김진석 교수가 2011년 <동양담론의 허구성>이란 제목으로 동양담론 전체를 비판했던 적이 있는데, 그 중 ‘노자’ 관련 부분만 정리해보겠습니다.
김진석 교수는 “儒家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양한 방향에서 환영을 받은 것. 특히 서양의 기술문명을 극복한다는 신과학, 그리고 서양의 근원적 근대성에서 이탈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해체론에 의해서까지 재발견되고 찬송 받은” 道家에 대해서 분석합니다.
김교수는 우리에게 도교는 “흔히 개인적인 은둔을 강조한 세계관이라고 알려졌”고 “무위자연도 많은 경우 이런 범주 아래에서 이해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도가는 유가적 수신제가치국과 직접 부딪치기보다는 그것과 피하거나 그것에서 조용히 도망가는 모습이었”고 “비교적 개인적인 몸가짐의 차원에 주의를 기울인 것으로 해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던 것이 서양문화를 비판하는 대안으로 해석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이제 도가는 유가적인 가치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사회적 세계관으로 해석되”고 “서양문명을 비판하는 기준이자 동시에 대안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해체론자들에 “따르면 노자의 도(道)는 우주론적 실체가 아니라 해체적 방법이라고 해석되었”는데, 김교수는 “이러한 시도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해체론은 “모든 텍스트에 틈입하여 텍스트에 틈을 내고 균열을 내는 일”인데, “도덕경은 그렇게 틈을 내는 텍스트에 못 미치는, 오천 자 남짓으로 이루어진 자기 암시적인 주장의 나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천 자로 세상을 해체하고 텍스트를 해체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야말로 어처구니없는 과대망상이 아닌가”라고 김교수는 묻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학문을 배우면 나날이 분별이 보태지고, 도를 닦으면 날마다 망상이 덜어진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마침내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니 아무 것도 하는 바가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도 없다. 따라서 천하를 취함에 있어서 항상 무욕으로 하지만 욕심으로 꾀하면 천하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而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故取天下 常而無事48 장)" 이 문장에 대한 김교수의 논평은 이렇습니다.
“학문은 분별을 자행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배우는 일과 이렇게 단순하게 대립된 도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단순한 주장과 대립을 좋은 뜻의 해체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노자는 세상을 취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체적 관점에서 도가를 번역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 치세술의 관점을 대개 은폐하고 가린다. --- 이러한 탈정치화는, --- 무지한 왜곡 아니면 음모의 결과이다. 동양의 지배계급은 그러한 탈-정치화된 노자 해석을 선호하고 더 나아가 널리 유포시켰다고 할 수 있는데---”
김교수는 또다른 예를 듭니다. “장차 움츠러들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펴야 하고 약해지려고 하면 반드시 강해야 한다. 장차 쓰러지려고 하면 먼저 일어나야 하고, 빼앗으려고 하면 마땅히 보태주어야 한다. 이것을 미묘한 이치라 한다. 유약함은 강장함을 이기게 마련이므로 물고기는 연못의 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이로운 유약함이라는 통치법을 백성들로 하여금 보게 해서는 안 된다(36장)”
이 문장에 대해 김교수는 노자는 “백성을 무지하게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만든 채로 다스리는 법”을 설하고 있다며 “도가를 동양의 영원한 지혜라고 일컫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꼽는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명백히 나와 있는 지배술이 알게 모르게 가려지는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요컨대 “노자를 동양의 영원한 지혜와 서양의 대안으로 여기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음모와 새로운 음모의 결합이라는 것”입니다.
김교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노자는 그저 아주 약한 것, 겨우 존재하는 것, 아주 낮은 데 있는 것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노자가 우주적 상징으로 내세우는 물에서 드러”납니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게 없지만 강한 것을 꺾는 데에는 이보다 나은 게 없으니, 물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드러움이 강장함을 이기고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는 줄은 누구나 알지만 어느 누구도 행사하지 못한다(78 장)” 김교수는 이 챕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물론 이렇게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는 차원이 있고,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경우도 꽤 많다. 그리고 그것을 활동하는 것이 처세와 치세의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자가 물의 상징을 빌려 말하듯이, 낮은 곳에 있고 미미한 것은 그 자체로 긍정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기고 지배하기 위하여 높이 평가된다면, 그런 현명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현명함은 노회함과 음험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왜 강하게 하면 좋지 않은가? 강한 것은 다시 강한 것을 유발하고, 사회적으로 적을 만드는 일이다. 노자의 무위는 적을 만들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다스리는 법이다.”
결국 노자의 “무위는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정치, 자연의 정치”라는 게 김교수의 설명입니다. .
“물의 현묘한 겸손은 은근하고 노회하기는 하다. 그러나 최상의 선은 물과 같기만 한 것일까? 지나치게 노회한 부드러움이 아닐까? 장기적으로는 물이 바위도 뚫고 불로 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는 다만 그런 장기적인 기획만이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실천은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순간적이고 직접적인 힘의 표출을 요구하고, 때로는 그냥 이기지 않기로 끝나는 수도 많다.”
김교수는 끝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있습니다. “서양문명이 초래한 위험과 위기를 이야기하는 담론이 흔히 의존하는 노자의 이념”은 “환경 생태론의 이름을 빌려 가상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은 소중한 이념”이지만 결국 노자의 철학은 “상대를 앞에서 공격하지도 않고 적을 만들지도 않는 노회한 방법.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듦으로써 지배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은 백 배로 늘어나고 인을 끊고 의를 잊으면 백성은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울 것이며, 기교를 끊고 지혜를 놓으면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絶聖棄智 民利白培,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絶智 盜賊無有, 19장)”
이 문장에서도 김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으로 바라봅니다. “인간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관계를 순백으로 부정하고 비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안선생님이나 김교수의 논의가 다 맞는 건 아니지만 지젝이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고 불평한 걸 생각하면 이러한 소수의 비판적 관점 역시 의의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노자를 전쟁기계로 쓰느냐 국가장치로 쓰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듯합니다. 모든 게 그렇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