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풀어쓴 역경
주싱 풀어씀, 고광민 옮김 / 김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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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 고급스럽고 내용도 수준급이다/매화역수의 기본도 상세히 알려주고 64괘384효를 간결하지만 꼭 필요한 해석을 담고 있다/만화주역보다 설명은 덜하지만 그책만큼 소중한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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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염파요법
유태우 지음 / 음양맥진출판사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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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우박사는 고려수지침 창시자이다/은근히 수지침은 전세계적으로 퍼져있다/수지침을 배우면서 알게된책이다/손에는 기운이 있고 이 기운은 시공을 초월하여 사람을 치유할수있다는 주장이다/한의학지식과 양자역학이 이론적 근거로 나와있고 일본에서의 실험결과를 보여줌으로써 신뢰성을 높이고 있다/과거 우리의 어머니들이 손을 비비면서 멀리있는 가족을 위해 기도한것을 생각해보면 일리가있다/<물은 답을알고있다1~2>와 같이 읽으면 이 신비함에 더 큰 효력을 느낄수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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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코드 - 생의비밀
정명철 / 창조인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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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학 공부를하다보면 손전체에대해서 공부하게된다/수지침을 통해서 손에 408개의 기혈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욥기 37장 7절에는 ‘그가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적혀 있다./손은 들여다볼수록신기하다/이책에서도 코끼리아저씨코가손이라는 게 신기한게 아니라 인간의 손이 신기하다고 말한다/이책은 결국 부적책이다/지문 특히 엄지의 지문을 통해서 타고난 명을 알아 그에 맞게 부적을 쓰고있다/수상학을 깊이있게공부하고자하는 이라면 소장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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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33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조대호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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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문단1-2]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substance)가 말해지는 네 가지 방식을 제시한다.1)

(a)그것을 위한 있음인 것(what being is for that thing).
(b)그것의 보편자.
(c)그것의 유.
(d)밑에 깔린 것(what underlies).

3장에서는 이 네 가지 중 (d)밑에 깔린 것을 검토한다.
밑에 깔린 것이란 ‘그것에 의해서 다른 것들이 서술되는 것이며, 그것 자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서술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밑에 깔린 것이라 불릴 수 있는 것에는 ①질료 ②형상 ③질료와 형상의 합성체가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가 말해지는 네 가지 방식들 중 (d)밑에 깔린 것을 가장 먼저 검토하는 까닭은 가장 밑에 깔린 것이 실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윗 문단에서 제시한 기체에 대한 정의는 분명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실체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①기체가 ‘그것에 의해서 다른 것들이 서술되는 것이며, 그것 자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서술되지 않는 것’이고, ②기체가 실체와 같다면, ③기체의 후보들 중에서도 가장 기체인 것은 질료이기 때문에 ④질료가 실체가 되어야한다. 그러나 과연 질료는 실체인가?

[문단3]
하나의 물체에서 물체(bodies)의 피동적 속성(attributes)2)‧능동적 속성(products)3)‧능력(capatities)4), 그리고 물체를 구성하는 길이‧넓이‧깊이 등을 제거하면 오직 질료만이 남기 때문에, 기체가 실체라면 질료가 실체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질료는 자체적으로 ‘어떤 것’ 혹은 ‘어떤 양’ 혹은 ‘그것에 의해 존재(being)가 한계 지워진 어떤 것’도 아니고, 이것들의 부정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질료가 A의 부정이려면 부정되어지는 A가 전제 돼야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료는 애초에 어떤 것도 아니고, 어떤 양도 아니고, 그것에 의해 존재가 결정된(determined)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의 부정이 될 수가 없다. 즉 질료는 ‘어떤 것인 실체’ 혹은 ‘어떤 양’ 혹은 ‘그것에 의해 존재가 결정된 어떤 것(실체와 양을 뺀 나머지 범주)’이라는 인간의 10범주를 통한 인식을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질료는 실체가 가져야할 ‘분리 가능성’과 ‘이것임’의 특성을 결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분리 가능성’과 ‘이것임’은 A와 B혹은 B와 C의 다름을 인식하는 인간의 지성적 판단 아래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질료로서의 청동은 그 자체로는 분리된 무엇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질료로서의 청동은 동상이나 그릇 심지어는 하나의 덩어리 등의 구체적이고 ‘특정한 형상’을 띄고 드러난다. 따라서 청동은 질료인 상태로는 다른 것과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특정 형태를 띰으로써만 청동 아닌 다른 것과 [혹은 다른 개체의 청동과] 구분된다. 즉, 우리는 질료를 그 자체로 분리된 것으로 인식할 수 없으며, ‘질료와 형상의 합성’을 통해서만 청동을 인식 가능하다. 물론 우리는 A라는 개체의 질료로서의 청동과 B라는 개체의 질료로서의 청동이 분리됨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A와 B라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합성체를 인지함으로서 각각의 개체엔 각각의 분리되어 존재하는 질료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식하는 것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또한 질료는 ‘이것임’이 아니다. 질료는 분리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것과 구분된 이것, 그것과 구분된 이것으로 지시될 수 없다.

[마무리]
실체는 기체일 수 없다. 기체의 정의가 그 자체로 실체와 같다면, 가장 기체인 것은 질료이기 때문에, 질료가 실체여야만 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실체는 ‘그것에 의해서 다른 것들이 서술되는 것이며, 그것 자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서술되지 않는 것’이라는 조건 외에도 ‘분리 가능성’과 ‘이것임’을 만족시켜야한다. 하지만 질료는 ‘어떤 실체’혹은 ‘어떤 범주’도 아닌 인간의 지성을 벗어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른 것과 ‘분리’하여 ‘이것’혹은 ‘저것’으로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기체의 정의는 실체를 이루는 필요조건일 수는 있으나 충분조건 일 수는 없다.

Chapter 4
[문단1]
앞서 살폈듯, 3장의 첫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substance)가 말해지는 네 가지 방식을 제시했다. 4장에서는 이 네 가지 방식 중 ‘(a)그것을 위한 있음인 것(이하, 그것의 무엇임)’을 살필 것이다.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것의 무엇임’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하여, 논리적 관찰(logical remarks)의 방법을 사용하겠다고 한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논리적 관찰이 무엇인지는 본 논의의 끝에서 밝혀질수 있다.

[문단2]
각각의 것의 무엇임은 자체적으로(in its own right) 말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무엇임은 예술적인 것의 무엇임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 자체로 예술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때 내가 그 자체로 예술적이지는 않다고 함은 어떤 의미인가? 예술적인 것이 자체적으로 나의 무엇임이라면 나는 항상 예술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내가 미술이나 음악을 배운 경우 나는 예술적이지만, 배우지 못했을 경우 나는 예술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나는 자체적으로 예술적이지 않고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예술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적임을 나의 무엇임이라 할 수 없다. 나의 무엇임은 나 자체로서 말해지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것의 ~임이 자체적으로 말해진다고해서, 그 ~임이 모두 어떤 것의 무엇임은 아니다. 예를 들면, 데모크리토스에게서 모든 표면(X)은 그 자체로 하얀 것(Y)이다(X=Y). 따라서 [데모크리토스의 입장에서] 표면에 대한 정의를 할 때 그 정의항에는 ‘하얌’이 들어가고5), 역으로 하얌에 대한 정의에서는 정의항에는 ‘표면’이 들어가야 한다6). 즉, 표면이 그 자체로 하얀 것 일 경우, ‘X는 그 자체로 Y다’가 성립할 뿐 아니라, 그 역 ‘Y는 그 체로 X다’역시 성립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것의 무엇임을 표현하는 정식은 그 것 자체를 포함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즉, X의 정의항에는 X 혹은 X와 같은 Y가 들어가지 않아야한다.7)따라서 표면의 무엇임에 대해 물었을 때, ‘표면임은 하얀 것임이다’ ‘표면임은 하얀 표면임이다’라는 서술은 표면의 무엇임에 관한 적절하지 못한 답변이 된다.

Point: X의 무엇임은 X에 대해 자체적으로 말해지는 Y이다. 그러나 Y가 X와 동치관계에 있을 경우 Y는 X의 무엇임이라 말해질수 없다. 따라서 X의 무엇임은 X에 대해 자체적으로 말해지되 X와 같지 않은 무엇이다.

[문단3]
실체 아닌 ‘다른 범주들’과 다른 범주들 밑에 깔려있는 ‘실체’의 ‘합성체’는 무엇임을 가지고 있는가?
하얀 사람의 예를 살펴보자. 우리는 하얀 사람의 이름을 cloak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cloak의 무엇임은 무엇인가? cloak은 자체적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얀 사람을 cloak이라 할 경우 그것은 하얀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얀 사람을 cloak이라고 부르는 경우, cloak은 ‘사람’이 생략된 하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때 하얀 사람이 하얀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얀 사람의 무엇임이 하얀 것의 무엇임과 같지는 않다. 하얀 사람을 하얀 것으로 표기함은 생략에 의한 무엇임이다.
반면 하얀 것의 무엇임을 말 할 때 누군가는 하얀 사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사람’이 추가되는 방식으로 하얀 것의 무엇임이 주어지는 경우이다. 해당 경우 역시 추가에 의해 무엇임이 주어졌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무엇임이 말해지는 경우가 아니다.
정리하면, 합성체는 자체적으로 이야기되지 않고 생략이나 추가를 수반하기 때문에, 무엇임을 갖지 못한다. 다른 말로, 어떤 것의 무엇임은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될 필요 없이, 자체적으로 ‘이것’으로 지시될 때에만 이야기될 수 있다. 이때 부가적 서술 없이 ‘이것’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체뿐이므로, 실체와 속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합성체는 무엇임을 가질 수 없다.

Point :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될 필요 없이 ‘이것’으로 지시되는 실체만이 그것의 무엇임을 갖는다. 반면 합성체는 추가나 생략에 의해서만 서술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합성체는 무엇임을 갖지 않는다.

[문단4]


어떤 것들의 정식이 정의인 것들에 대해서만 무엇임이 존재한다. 이때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이름과 정식이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정의가 이름과 정식이 같은 것이라면 그 정식은 정의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서사시 ‘일리아드’는 24권의 서사시, 호모의 걸작, 최고의 고전으로 치환하여 사용하여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미 [문단2]에서도 논의 되었듯 이름인 X와 이름에 대한 정식인Y가 치환 가능한 경우, Y는 X에 대한 정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정의는 어떤 정식에 대하여 성립하는가? 정의는 정식이 첫째가는 것을 대상으로 할 때 성립한다. 이때 첫째가는 것이란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됨 없이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첫째가는 것을 ‘유에 속하는 형상(종)’으로 본다. 즉, 정의는 어떤 ‘종’에 대한 정의이며 정의항은 유와 종차로 이루어진다.
이때 주의해할 점은 첫째가는 것으로서의 종이 ‘유가 종차에 의해 서술 받는 방식의 합성체’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차+유’의 합성은 ‘하얀+사람’의 합성과 같지 않다. ‘하얀 사람’과 같은 합성체의 경우 ‘하얀’이 ‘사람’을 수식하기 때문에(‘하얀’이 ‘사람’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되는 구조로 표현된다. 정의 역시 유+종차의 두 항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의에서 종차가 유와 관계 맺는 방식은 하얌이 사람과 관계 맺는 의존적인 방식과 다르다. 하얀+사람의 경우 결합이 이루어진 후에도 하얌과 사람이 사라지지 않고 하얌이 사람에 속하게 될(의존하게 될) 뿐인 반면, 종차(A:이성적)+유의 합성(B:동물)은 사태 상 A가 B밑으로 술어 되는 방식으로 결합하지 않고 A와 B가 합쳐져 ‘단 하나의 종’(C:사람)이 된다. 즉 종차+유의 합성의 경우 언어상에서는 두 개의 항으로 구성된 한 항이 다른 항을 수식하는 구조를 보일지지라도, 사태 상으로는 종차와 유가 합쳐져 하나의 ‘단일한 종’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종으로 나타나는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됨 없이 표현되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oint : “X는 Y이다”라는 명제에서, X의 정식인 Y가 X의 정의일 때라야만 우리는 X의 무엇임을 이야기할 수 있다. X가 정의를 가지려면 ①X는 첫째가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첫째가는 것이란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해 수식되지 않는 것을, 즉 실체를, 나타낸다. ②X와 Y는 치환 가능해서는 안 된다. X와 Y가 치환 가능한 경우 Y는 X에 대한 정의라고 말해질수 없다. ③Y항은 유에 속하는 종을 표현한다. 유와 종차는 합성되어 단일한 실체를 나타내며 이때 Y는 X와 같지 않은 ‘X의 무엇임’이다. (합성체의 경우 합성의 내용과 합성체가 같음 --- ex 하얀+사람=하얀 사람)

[문단5]
[문단4]에 따르면 정의는 종차와 유로 이루어진 정식을 가지는 종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식을 가지는 것만이 무엇임을 갖는다. 즉, 무엇임은 종차와 유의 결합으로 하나의 종을 표현함으로써 드러나며, 이때 종은 실체와 속성으로 이루어진 합성체가 아니라 ‘이것’으로 지시되는 첫째가는 것으로서의 실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때 다양한 방식이란 ‘어떤 것은 무엇인가’가 한 편으로는 실체와 이것을 나타내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양, 질 등등과 같은 실체의 속성으로서의 술어들 각각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것은 사람이다’라고 대답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크다’ ‘이것은 하얗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다’는 실체뿐만 아니라 실체의 속성에도 사용된다. 그러나 실체와 실체의 속성에 ‘~이다’가 사용되는 방식은 같지 않다. 실체에 ‘~이다’가 사용될 경우 첫째가는 방식이고, 실체가 아닌 다른 것들에 ‘~이다’가 쓰일 경우 첫째가는 방식이 아니다. 즉, ‘어떤 것은 무엇인가’는 제한이 없이는 실체에, 제한적8)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 사용된다.
실체 아닌 것에도 첫째가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제한적인 방식으로 ‘~이다’가 사용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예는 우리가 ‘이지 않은 것’의 경우를 통해 더 명확해 진다. 우리는 ‘~이지 않은 것’을 주어로 취할 때조차 is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즉, is의 용례의 첫째가는 방식에서는 실체는 ‘~이다’고 나타내지는 반면, 제한적인 방식으로는 ‘비존재는 비존재이다’라는 문장과 같이, 비존재에 대해서조차도 그리고 비존재가 아닌 존재의 속성에 대해서도 is를 사용 가능하다.

Point : ‘~이다’라는 술어가 첫째로 그리고 제한 없이는 실체에만 사용되고, 제한된 방식으로는 실체 이외의 것들에도 사용될 수 있다. 정의 역시 첫째로 그리고 제한 없이는 실체들에 속하며,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다른 것들에 속할 수 있다.

[문단6]
is가 첫 번째로는 그리고 제한 없이 실체에 해당하고,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 해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임’역시 첫째로 그리고 제한 없이는 실체에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 해당한다. 제한적으로 표현되는 무엇임은 실체가 가지는 속성으로서 질이나 양에 대한 무엇임이다. 이때 질이나 양에 대한 무엇임은 실체에 대한 무엇임과 동음이의어의 관계에 있는 것도 동의어의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실체의 무엇임과 실체의 속성들의 무엇임은 ‘실체라는 한 가지 같은 것에 관계 맺는 방식’으로 있는 것이다.
이때 한 가지 같은 것에 관계 맺는다고 함은 환자와 수술 그리고 수술도구가 ‘의술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 환자 수술 그리고 수술도구는 모두 의술적이라 불리지만, ‘의술적’과 동음이의어이기 때문도 아니고 동의어이기 때문도 아니며 ‘의술적’이라는 단어와의 관련되어 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의 무엇임과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은 실체의 무엇임에 관련하여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이 관계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정리하면 무엇임은 첫째로 그리고 무제한적으로 실체에 속하며, 제한적인 방식으로, 즉, 실체의 무엇임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실체 아닌 것에도 속한다.

Point : [문단5]의 point와 마찬가지로, 무엇임 역시 첫째로는 실체에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 속한다. 우리는 [문단6]을 통해서 ‘제한적으로’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은 실체의 무엇임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인 것은 실체의 무엇임이며, 실체의 무엇임에 관련하여 제한적으로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이 이야기 될 수 있다.

[ 마무리 : logical remarks ]
무엇임은 첫째로는 그리고 무제한적으로는 실체에 대하여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 대하여 말해진다. 이 중,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목한 것은 실체의 무엇임이다.


[문단2]에서 실체인 X의 무엇임은 X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말해지는 Y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4장 전체에 걸쳐서 자신이 의도한 ‘자체적으로 말해짐’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제한해간다.9)그는 먼저 예술적임과 나임의 비교를 통해 자체적이지 않은 무엇임과 자체적인 무엇임을 구분한다. 자체적인 무엇임은 언제나 나에게 속하는 우연적이지 않은 무엇임 이다. 다음으로 자체적으로 하양인 표면의 예시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 ‘자체적으로 말해짐’의 의미를 축소시킨다. X의 무엇임인 Y가 X자체적으로 말해지는 무엇이라 할지라도, X와 Y가 서로 치환 가능할 경우 Y는 X의 무엇임이 될 수 없다.
다음으로 [문단3]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임의 첫 번째 그리고 무제한적(without qualification) 대상인 X는 반드시 ‘이것’으로 지시되는 실체여야만 함을 이야기한다. [윗 문단과 연관하여] 실체는 합성체의 경우와 다르게 추가나 생략에 의해 서술되지 않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즉, 실체만이 무엇임을 갖는다.
그렇다면 X의 무엇임은 어떻게 이야기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문단4]에서 X의 무엇임은 X의 정식인Y가 정의일 때만 X의 무엇임을 이야기가능하다고 한다. 이때 정의는 유에 속하는 종으로 표현되며 유와 종차의 합성은 합성체의 합성과 상이하다. 실체인 종의 무엇임은 유와 종차로 이루어진 정의를 통해 나타나며 유와 종차가 합성되어 하나의 단일한 실체를 표현한다.
이상에서 [문단2-4]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마치면서 알 수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위의 문단들은 실체인 어떤 것의 무엇임이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이라는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즉,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이기 위해 충족되어야할 기준과 배제되어야할 기준을 제시한다.
덧붙여 [문단5‧6]을 통하여서는 실체 아닌 것들의 무엇임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진다. 무엇임은 첫째로는 그리고 무제한적으로는 실체에 속하지만,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도 속할 수 있다. 이때 실체의 무엇임과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의 관계는 실체의 무엇임에 관련하는 방식으로만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이 이야기되는 관계이다. 즉, 실체에 대한 무엇임이 첫째이고 이것을 토대로 제한적으로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이 이야기되는 것이다.
이때, ‘실체의 무엇임은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이다’라는 관점은 실체의 무엇임이 첫째이고 무제한적임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실체의 무엇임은 그것이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수식이나 참조 없이 첫째이고 무제한적이다. 반면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은 자체적으로 말해진 바로 그 무엇임에 기대어서만 이야기 된다. 따라서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4장 전체는 ‘실체의 무엇임은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이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좀 더 명확히 말하면 무엇임에 관하여 X is said to be in its own right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무엇임의 의미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4장이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가 말해지는 네 가지 방식에 대해 말하는 까닭은, 실체의 지시체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실체를 실체라고 부르는 말의 의미(혹은 조건)을 찾기 위함이다.
2) 열이 주전자에 가해질 때, 뜨거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3) 차가운 냄비를 뜨겁게 할 수 있는 능력
4) ~에 관한 능력, attribute의 능력이든 products의 능력이든 상관없음.
5) 표면이 무엇이냐? 하얀 것이다.
6) 하얀 것이 무엇이냐? 표면이다.
7) X를 표현하되 X를 그 정식 안에 포함하지 않는 정식이 X의 무엇임의 정식이 될 수 있다.
8) ‘제한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문단6]을 통해 명확해 질 것이다.
9) 이것이 [문단1]에서 이야기한 logical remark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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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책세상 니체전집 7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미기 옮김 / 책세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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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글에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를 통해 드러나는 자유정신의 전 면모를 살피고자 한다. 니체는 분명 『인간적인』이 자유정신을 위한 책이라고 밝혀 적고 있다.2)그러나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자유정신에 대한 개념규정은 잠언의 형태로 다분히 산발적이다. 뿐만 아니라 잠언의 제시되는 자유정신에 대한 언급의 대부분이 ‘자유정신은 이것이다’라는 직접적인 형태로 제시되고 있지 않고, 종교‧예술‧학문 등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방식으로 그 모습을 언뜻언뜻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니체의 서술방식이 그의 철학함과 맞물려 유의미한 것이라 하더라도3), 이 글에서는 자유정신을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 까닭은 인간은 본래 이해하고 해석하기를 원하는 존재이며, 자신만의 이해와 해석을 통해서만 [니체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가치질서’ ‘자신만의 가치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2. 자유정신의 필요성
니체는 존재를 고통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현자 실레노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가련한 하루살이여, 우연의 자식이여, 고통의 자식이여, 왜 하필이면 듣지 않는 것이 가장 복될 일을 나에게 말하라고 강요하는가? 최상의 것은 그대가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것이네. 태어나지 않는 것, 존재하는 것, 무(無)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네.4)”

그에 따르면 존재는 그 자체로 고통이다. 인간은 “존재의 공포와 불합리5)”를 인식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때 주의해야할 점은 그에게 공포란 ‘무(無)’에서부터 비롯된 공포가 아닌, ‘생명력의 충일함6)’에서부터 오는 공포라는 것이다. 따라서 비극 역시도 “기쁨으로부터, 힘으로부터, 넘쳐흐르는 건강으로부터, 과도한 충만으로 부터 유래한 것”이다. 정리하면, 존재는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생명력의 결핍7)’에 의한 것이 아닌 넘치는 생명력, ‘삶에의 열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러한 삶의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고통 받는 자는 어떻게든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며 ‘도덕‧예술‧학문‧종교’8)등의 체계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설명하는 방법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삶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예술‧학문 등의 설명을 필요로 한다9). 따라서 예술과‧학문은 부조리한 현실의 설명기제로서 긍정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인간적인』에서 예술과 학문에 대한 빈번한 비판을 가한다. 이때 그의 비판의 핵심은 한시대의 예술과 학문이 다음 시대를 설명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도덕이 현실의 유용성을 기반으로 탄생하였지만 절대화되고 형이상학이 되어버리는 사태와 마찬가지로, 예술과 학문은 현실을 견디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되었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를 잃고 현실로부터 유리된다. 다시 말해, 고통을 설명해내기 위해 고안된 한 시대의 체계들이 절대화되어 다음 시대에 전승될 경우, 그것은 변화하는 시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의 설명에 무의미하다. 즉 전통적 가치는 그 가치가 생성된 당대에는 고통을 완화시키는 유용성을 위한 수단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당대와 맞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면 그것이 또 하나의 굴레가 되어 삶에 고통을 더할 뿐이다.
이 때문에 자유정신이 요청된다. 자유정신은 “통상적인 가치평가들과 존중되는 관습들을 전복시키기 위한 지속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요청10)”이다. 자유정신은 기존가치로부터 벗어나려하며, 벗어남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무엇을 기반으로 작동하는가? 이 글은 자유정신의 동인 역시 고통의 원인이기도한 ‘삶에 대한 열정’에 있다고 추론한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자유정신의 반대급부인 수동적인 여성의 정신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유정신의 동인이 ‘감정과 열정’임을 살펴보겠다.

3. 자유정신의 동력 : 감정과 열정


자유정신의 동력이 ‘감정과 열정11)’이라는 근거는 여성의 수동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확인가능하다. 니체는 여성을 “사회에서 인정된 권력과 관념들을 더 많이 존중12)”하는 수동적인 인간유형으로 이야기한다. 반면 남성은 능동적이고 진취적이라는 점에서, ‘좀더 높은 정신13)’의 소유자이다. 따라서 니체에게 여성은 [본능적으로] 남편의 ‘좀더 높은 정신’에 대하여 항상 음모를 꾸미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어서 여성에 대한 비판은 ‘여성적인 지성14)’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심화된다. 니체는 “여성들은 오성을 가지고 있고 남성들은 감정과 정열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자체로서는 수동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오성15)”을 비판한다. 이미 앞선 문단에서 비판한 바와 같이 수동성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기존의 가치에 순응하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전해 내려오는 관습이 현실에 적합한지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감정과 열정’을 가진 남성은 ‘좀 더 높은 정신’의 소유자로 이야기 된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좀 더 높은 정신’인 남성의 정신이 그 자체로 ‘자유정신’과 동치를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유정신은 남성적 열정을 동인으로 삼기는 하지만,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주어진 것을 토대로 사유해 나가는 여성적 지성인 오성 역시 필요 하다. 자유정신 아래에서는 “이 충동16)(감정과 열정)이 그 자체로서는 수동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오성을 그렇게 멀리 이끌어”준다. 니체는 남성적 충동이 여성적 오성을 이끌어 줄 경우 “남성들이 그들의 오성으로 훨씬 많이 앞으로 나아간17)”다고 이야기 한다. 즉, 자유정신은 오성을 소유하되 오성에 머물지 않고, 감정과 열정이라는 충동을 동력삼아 작용할 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확인하였듯 자유정신이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인 오성과 동력으로서의 열정이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이글에서는 자유정신의 동력으로서 ‘감정과 열정’에 주목하고자한다. 그 까닭은 기존의 가치에 대한 문제제기와 기존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남은 ‘감정과 열정’이라는 힘을 빌려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성만 가지고는 기존의 가치로부터 벗어남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감정과 열정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오성의 도움 없이는 멀리 나아갈 수 없을지라도 기존의 가치에 대한 거부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4. 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
니체가 기존의 가치로부터의 탈출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앞서 이야기 했듯 구시대의 가치가 신시대의 현실에 알맞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이 여타의 철학들과 구별되는 까닭은 니체는 역사 속에서 즉 시간 속에서 철학했기 때문이며, 당대의 문제들 당대의 현실에 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의 가치로부터 벗어남이 모든 것이 무가치화 된 상태, 즉 혼돈을 뜻하지 않는다. 니체는 “불결한 환경에서 더 깨끗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더러운 물로도 몸을 씻어야 한다.18)”라고 이야기한다. 즉, 그의 자유정신은 기존의 가치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무가치화된 상태 역시 아니다. 자유정신은 시대의 흐름 안에서 능동적으로 당대의 현실에 유용한 적절한 가치의 위계를 세우고자할 때에 의미가 있다.


이상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니체의 철학은 철저히 ‘현실적인 것’을 토대로 전개된다. 그렇다면 그에게 ‘현실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가 생각하는 ‘현실적인 것’을 ‘4.1.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현실’과 ‘4.2. 처해진 사태로서의 현실’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4.1.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현실
니체에게 현실적인 것이란 한편으로는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것’이다. 니체는 『인간적인1』의 477절에서 “전쟁은 필수적인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이는 “만물은 유전한다”고 이야기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변화에 대한 사고와 맥을 같이한다. 그의 철학에서 생성‧변화에 대한 사유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플라톤으로부터 비롯된 이데아와 같은 영원불변한 진리에 대한 비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적 삶은 영원불변한 이데아의 세계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고 완결되지 않는 현실 안에서의 삶이다.
니체의 ‘방랑자19)’ 개념역시 진리의 생성‧변화와 연관되어 중요하다. 방랑자는 ‘궁극적 목표’가 없이 진리를 향해 끝없이 방랑하는 자이다. 이때 궁극적 목표가 없다함은 모든 가치가 상실되어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알맞은 목표와 가치가 그때그때 새롭게 탐구됨을 의미한다. 변화하는 진리를 찾기 위한 방랑자의 모습은 역사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생성과 변화 속에서 사유할 줄 아는 방랑자야말로 철저하게 현실에 발 딛고 사는 인간이다.

4.2. 처해진 사태로서의 현실
니체에게 현실적인 것이란 ‘처해진 사태 그 자체’이다. 후설의 ‘사태 자체로’라는 말을 상기해볼 때, 니체의 처해진 사태로서의 현실은 기존의 가치로 인한 편견이 적용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주의할 점은 ‘있는 그대로의 사태’가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니체는 ‘인식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의 구분을 통해, 인간 각자가 처해있는 현재의 사태는 인식의 대상이기에 앞서 생명력을 가진 현실이라고 이야기한다.20)그러나 인식의 나무에 집중하는 인간은 “얼굴의 아름다움, 말의 명료함, 성격의 선량함과 건실함21)”에 주의를 기울일 뿐, ‘인식의 햇빛22)’이 강하면 강할수록 짙어지는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 이때 그림자는 빛의 결여가 아니라 빛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존재하는 한 쌍이다. 그림자는 다른 말로 오류일 수 있고 부조리일수 있으며 이성에 반대하는 비이성일수도 있다. 세계의 부조리와 오류는 그 자체로 무의미하지 않다. 오히려 니체는 “인간에게 가치있고 놀랍고 기쁨에 넘치는 것으로 만들었던 모든 것, 즉 그 과정을 만들었던 것은 정열, 오류 그리고 자기기만이다23)”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세계가 어떤 영원한 합리성의 총괄 개념”이라는 이성의 판단은 옳지 않으며 “세계의 부분이 반드시 전적으로 이성적이지”도 않다24). 그렇기 때문에 ‘인식’만으로는 세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으며, 다른 방법이 요청된다.


니체는 “관찰력25)”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관찰은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26)”에 대한 관찰이며, 관찰을 통해 가까이 있는 것들의 가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그 순간을 ‘하나의 축복된 순간’이라고 이야기하면서27), “가장 사소한 것 가장 일상적인 것”에 대한 “예리한 안목”이 필요함을 주장한다.28)
그런데 인식의 빛 아래서 아름다움에만 집중하는 삶은 왜 행복한 삶일 수 없는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세계라면 분명 행복한 삶이 아닌가? 니체는 관찰력의 결여가 ‘무기력’을 야기한다고 이야기한다.29)무기력을 야기시키는 것은 비이성이 아니라 비이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식의 햇빛의 잘못된 방향성이다30). 그림자를 수용하지 못하는 인식은 사물의 단면밖에 파악하지 못한다31). 사물은 삼차원의 공간에서 생동하며, 그 생동함을 관찰할 수 있으려면 사물 뒤편에 놓인 그림자에 대한 수용이 필요하다. 그림자 없는 삶은 단편화된 삶, 무미건조하게 추상화된 삶이다. 오류32)기도하고 이상의 거부33)이기도한 그림자를 받아들임은, 어쩌면 부조리가 편재하는 삶 자체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4.3. 시대정신으로서의 자유정신
니체는 시대정신을 “스스로에게 저항하고 또 자신을 짊어지는 것34)”이라 이야기한다. 시대정신으로서의 자유정신은 스스로를 ‘감내함’과 동시에 ‘넘어섬’이다.
이때 시대정신이 스스로를 감내한다고 함은 무슨 의미인가? 시대정신의 감내함은 2장 294절에서 ‘모든 덕 중의 덕’인 ‘사려 깊음’을 가짐이다. 주지하다시피 자유정신은 열정을 동력으로 움직이기는 하지만, 이에 앞서서 주어진 사태35)를 깊이 체험함 역시 필요하다. 즉, 사려 깊음은 체험에 깊이 머무름이며 “스스로 그 체험의 입 속으로 뛰어36)”듬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자유정신의 최고의 덕이 사려 깊음이라고 할 때, 자유정신의 ‘자유’는 방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유정신의 자유는 현시대를 뼛속깊이 체험하고서 나아가는 자유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유정신이 자유정신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수 있는 까닭은 여전히 넘어섬에 있다. 현시대의 고통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열정을 원동력삼아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 역사 안에서 정체되지 않으며 함께 발맞추어 나아가는 것, 기존의 가치체계로부터의 끊임없는 탈출, 그것이 자유정신이 현실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5. 학문과 자유정신


5절에서는 현실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학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인간적인』을 통하여 니체는 학문에 대하여 두 가지 판단을 내린다. 그 하나는 학문에 대한 긍정적 평가이고 나머지는 부정적 평가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니체는 학문의 근거물음을 옹호하지만 그 근거를 묻는 상이한 방식에 대하여는 회의적이다. 5.1.을 통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살피도록 하자.

5.1. 학문에 대한 비판37)
니체의 학문에 대한 태도는 『비극의 탄생』과 『인간적인』에서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비극의 탄생』에서는 ‘소크라테스’를 필두로 하는 학문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그리스적 명랑성’이 그리스 문화의 황혼에 불과하며, 학문 역시 염세주의에 대한 공포와 도피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자문하고 있다. 반면 『인간적인』에서는 학문이 지닌 ‘근거묻는 능력38)’에 대한 옹호가 나타난다. 그럼에도 니체의 학문비판은 2권 2장 171절과 179절을 통하여 두드러진다.
171절에서 니체는 학문하는 사람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 한 부류는 유능하고 성공적인 학자인 ‘학문의 직원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철학자’이다. 두 부류모두 자유정신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우선 ‘학문의 직원들’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면 ‘학문의 직원들’은 “유능하고 가장 철저한 학자”들 이지만 “자신의 삶의 목표를 더 낮은 곳에 두게 될 위험”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비판된다.39)그들의 목표가 더 낮아지는 까닭은 그들의 “엄격”성 때문이다.40)그들은 “연구자의 개별 과제 영역을 가능한 제한하여 다루어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해가 가면서 인식”한다.41)따라서 학문의 직원들은 해명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되며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반감과 후각을 획득”하게 된다.42)즉, “의미에서 불완전하게 남겨질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직원들은 “작은 일을 대가답게 다스리는” “난쟁이”가 되어버리며43), 자유정신의 비판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철학자들’은 학문의 직원들보다 몰염치하며, 편협하며, 어리석은 인간 부류이다. 그들은 자신이 학문의 직원들의 고용주도 아니면서 “다른 직원들이 일해서 얻고 확보해둔 것을, 마치 그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더 저급한 부류의 존재에 속하는 사람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용한다44).”그들의 이러한 몰염치함 역시 비판 받아 마땅한 것이 거니와, 그들은 “자신의 공간에서만, 그들 자신의 땅에서만 살 수”있는 편협함을 가진다45). 학문의 직원들이 가졌던 연구 영역의 편협함과는 다르게, 철학자들의 편협함은 모든 지식을 자신의 관점아래서만 바라본다는 점에 있다. 적어도 학문의 직원들은 성실하며 엄격하기에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는다. 반면 철학자들은 그들의 사상에 맞는 것 그들에게 속할만한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철학하는 부류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개인적인 인식-구조를 가지고 하나의 학문이 완성되고 목표에 도달할 것46)”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에 이른다. 니체는 이렇듯 근거를 스스로 찾지 않고 전통적인 가치체제의 권위를 근거로 철학하는 방식의 학문함을 ‘형이상학’이라 비판해왔다. 따라서 철학자의 다른 이름은 ‘형이상학자’이다.
‘학문의 직원들’과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이 상이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학문함’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때 학문함은 ‘근거를 물음’이다. 따라서 학문의 직원들의 근거물음과 철학자들의 근거물음 그리고 자유정신의 근거물음의 차이를 밝힐 필요가 있다.

5.2. 니체의 학문
해당 절에서는 학문의 직원들의 근거물음과 철학자들의 근거물음 그리고 니체의 근거물음을 비교함으로써 니체가 자유정신이 추구하는 학문함이 무엇인지를 살피도록 하겠다. 니체가 학문의 직원들과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까닭은 그들의 근거물음이 가진 맹점 때문이다.
위의 절에서 철학자들 비판의 핵심은 “의미에서 불완전하게 남겨질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작은 일을 대가답게 다스리는” “난쟁이”가 되어버림에 있다47). 즉, 학문의 직원들은 불완전한 것 불합리적인을 견뎌내지 못함으로써 완전하고 인식 가능한 것, 즉 생명의 나무가 아닌 인식의 나무만을 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니체의 학문함은 사태의 불합리함을 현존의 한 조건으로 인정한다. 때문에 자유정신은 생성 변화하는 삶과 세계로부터 진리를 구한다. 반면, 학문의 직원들은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반감과 후각48)”을 가지며, 그로인해 불완전한 것을 제거하고 생동하는 삶을 단순화 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그들은 추상화되고 단순화되어 완전해 보이는 것만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으로부터 근거를 구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편협함’에 매몰되기에, 삶의 새로운 지평을 꿈꿀 수 없게 된다.
반면 형이상학자들의 근거물음은 어떠한가. 형이상학자들도 분명 근거를 가지고 학문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학문함의 근거를 이미 권위가 부여된 전통적인 가치체계에서 찾는다. 그들은 스스로 근거를 찾지 않고 직원들의 근거를 도용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것인 것 마냥 이용함으로써 능동적인 근거 찾기에 소홀하다. 학문의 직원들이 끊임없이 근거를 찾되 그 근거는 세계의 비합리성 불완전성을 설명해내지 못하는 반쪽자리 근거인 반면, 철학자들은 이러한 학문의 직원들의 성과를 절대적인 것으로 활용하고 자신의 생각인 것 마냥 표절한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지성을 지닌 염세주의자’로서 니체의 학문함은 어떠한가? 학문의 관점에서 자유정신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자유정신은 ‘염세주의자’로서 ‘끊임없이’ 기존의 가치들의 근거를 의심하고 전도시킨다. 둘째, 자유정신은 ‘지성’을 지녔기 때문에 근거를 묻는 학문적 작업을 ‘스스로’ 진행한다. 셋째, 자유정신은 자신의 근거를 ‘현실적인 삶과 세계에’서 찾는다.
위의 세 가지 특징 중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단연 세 번째 특징인 자유정신의 토대가 ‘현실적인 삶과 세계’에 있다는 것에 있다. 이 세 번째 특징을 근거로 학문의 직원들과 자유정신은 구별되기 때문에, 자유정신은 학문의 정신을 가지되 기존의 학문들과는 다르게 학문할 수 있다. 즉, 인간에게 가치 있고 명확한 것들에만 집중하는 기존의 학문과는 다르게, 자유정신은 학문함에 있어 비논리적인 세계에 머무를 줄 알고 변화하는 세계를 감내하여 그것을 토대로 세상을 설명할 줄 안다. 따라서 니체의 학문함은, 기존의 그 어떤 학문함보다 역사적으로 철학함이고 현실적으로 철학함이다.



6. 예술과 자유정신
6절에서는 예술의 역할과 위치를 살펴보고, 니체에게 진정한 예술함은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6.1. 예술에 대한 이중적 평가
『인간적인』에서 니체는 예술에 대한 상이한 평가를 내린다. 니체는 1권 31절에서 “비논리적인 것이 세계에 필요하며, 오히려 비논리적인 것에서 좋은 것에서 좋은 것이 생겨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니체는 이성을 비이성보다 상급의 위치에 놓는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니체는 2권 1장 261절에서 “머리만으로 자신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진리의 눈”으로 보았을 때 “상급”이라고 한다. 264절에서도 역시 “마음의 흥분은 보통 두뇌와 판단의 질병과 관련”된다고 이야기하면서, 머리가 마음보다 상급의 것임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유의해야할 것은 이성적인 것이 비이성적인 것 보다 상급의 것이라고 하여 비이성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까닭은 2권 1장 319절과 337절을 통해 명확해 진다. 319절에서 니체는 “이성의 결핍(비이성)”이 상실되면 “많은 것들이 상실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뿐만 아니라 337절에서는 만약 인간이 “저 지위, 명예, 동료, 쾌락, 편안함, 예술이 가져오는 기쁨을 포기”할 경우 남는 것은 “지혜”가 아닌 “삶에 대한 염증”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리하면 니체는 이성적 가치가 우위에 있음, 즉 상급의 것임을 부정하지 않지만, 삶을 견뎌내는 데에는 비이성적 가치들이 반드시 필수적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비극의 탄생』과는 다르게 『인간적인』에서는 학문이 예술보다 상급의 것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예술은 삶을 위해서도 학문을 위해서도 필요한 근본적인 토대로서 요청된다. 2권 1장 98절에서 니체는 “만약 우리가 어느 정도 비학문적인 인간으로 머무르지 않는다면” 학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학문함은 분명 인간만이 가진 지성적 작업이요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인간의 비이성적 본성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학문도 삶도 인간에게는 고통으로만 다가올 뿐이다.

6.2. 예술의 핵 : 정열
니체에게 예술함이 무엇인지 알아보기에 앞서 예술함의 핵심이 되는 ‘정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정열은 본고의 2장에서는 이미 고통의 원인에 해당하고, 6.1.에서는 삶을 위해 필요한 비이성적 가치에 해당한다. 정열이 고통의 원인이고 학문과 예술이 고통스러운 삶을 설명하는 기제일 때, 예술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감정을 기반으로 한 표현 행위인 반면 학문은 고통의 원인과 반대되는 냉정함과 냉철함을 기반으로 한다.49)예술의 핵은 정열이고 학문의 핵은 냉철함이다.


정열과 정열을 바탕으로한 예술이 인간의 삶에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정열은 그 자체로 고통의 원인으로서 당연히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철학적으로 음흉한 자들”은 “모든 세계의 존재의 성격을 비난하기 위하여 인간적인 정열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성격”을 비난한다.50)니체에게 역시 정열은 분명 ‘극복’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열을 극복하려는 목적은 결코 ‘존재의 성격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요, 자유정신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니체는 “자기 자신의 정열을 극복한 사람은, 마치 숲과 늪을 정복한 개척자처럼 가장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한다”라고 이야기한다.51)정열이 극복된 토지에만 “훌륭한 정신적인 작업의 씨”가 뿌려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52)

6.3. 니체의 예술함
그렇다면 니체에게 예술함은 무엇인가. 니체가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은 당대의 ‘예술이라고 이해된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당대의 예술은 ‘의지(열정)53)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 반면 진정한 의미의 예술가들은 “의지를(열정을) 구속하는 자, 동물을 길들이는 자, 인간을 창조하는자54)”이다.
이에 따라, 의지를 해방시키는 자의 입장에서 ‘예술이라고 이해된 것’은 “감정을 억제하지 않은 무질서한 영혼에서 나오는 저 강렬하고 다양한 것들의 야만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용솟음침”인 반면, 의지를 구속하는 자에게서 예술은 “지혜롭고 조화로운 방식”이다.55)그들은 “열정과 열정의 동요와 매혹에서 벗어난 영혼”을 가짐으로써 “좀 더 순수한 소재, 좀 더 품의 있는 인간, 좀 더 섬세한 맥락과 문제 해결에 기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지라는 열기에 사로잡힌 예술가와는 구분된다.56)
그렇다면 진정한 예술가와 당대의 예술가의 구분에서 ‘의지의 해방과 구속’은 왜 문제가 되는가? 진정한 예술가가 의지를 구속하는 방식의 예술을 행하는 까닭은 그들이 “가장 완전한 인간57)”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즉, 의지의 해방만을 이야기할 때, 인간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만 나타날 뿐인 반면, 의지의 구속을 통해서는 완전한 인간상을 가지고 그것을 지향할 수 있다.
시인에 대한 니체의 견해 역시 예술에 대한 견해와 마찬가지이다. 살펴보면, 진정한 시인은 “삶을 형성하는 데 소비되지 않을 풍족하고 시적인 힘”을 통해 “미래를 위한 안내”를 하는 부류인 반면, 오늘날의 시인은 “힘과 자연으로 혼동되어버린 미숙함과 방종함을 거침없이 묘사하는” 부류이다.58)정리하면, 진정한 예술은 정열을 무작정 배출하지 않고 그것을 조화롭게 다루게 해주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인간에 다가가는 적절한 도구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7. 나가며


이 글을 통하여 존재가 그 자체로 고통이며, 고통의 원인이 넘치는 생명력 즉 정열에 있음을 밝혔다. 정열은 고통을 낳기도 하지만, 정열은 역시 자유정신을 움직이게 한다. 자유정신이 도래할 때 맞을 수 있는 ‘기쁨에 가득 찬 아침’은 ‘끔찍한 밤’을 보낸 후에만 가능하다59). 존재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삶을) 설명하고자 하며 그 방법으로 학문함과 예술함이 등장한다. 이때 주의할 점은 자유정신이 학문함과 예술함의 방법을 차용하되 기존의 학문 예술과는 다른 방법으로 학문하고 예술을 한다는 사실이다.
자유정신은 근거를 물음에 있어 기존의 학문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것을 토대로 한다. 또한 자유정신은 예술함에 있어 방종함에 매몰되지 않고 정열의 조화롭게 다룸을 목표로 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인간의 나쁜 본성 속에서 나타나는 자연 충동(열정)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해롭지 않은 배수구”를 통해 그것을 조화롭게 사용한다.60)6.3.에서도 볼 수 있듯, 우리는 진정한 예술을 통해서만 ‘가장 완전한 인간상’에 도달 가능하다. 그러나 예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현실을 근거로 높은 정신을 향한 나아감의 행로를 구성하고 그것이 옳은 방향인지 혹은 현세의 삶을 충분히 설명해주는 유용한 것인지를 따져 묻는 학문의 방법론이 도입되어야만 우리는 자유정신이라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61)”는 그것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인간적인』에서 주어진 단서들을 통하여 자유정신에 다다르기 위한 도정의 대략적인 윤곽을 구성하였다. 이 탐구 이전에도 자유정신이 기존가치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치의 질서를 세우려는 정신임은 명확하였지만, 본 연구를 통하여 자유정신이 ‘왜 요청되었으며’62)자유정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며’63)자유정신은 ‘어떻게 자신의 방향을 설정하는지’64)에 대한 큰 틀을 그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니체가 표현한 자유정신을 올바로 설명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어쩌면 니체는 [각주3번에서 이야기했듯] 의도적으로 자유정신에 대한 개념규정을 꺼렸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새로운 전거가 등장한다면 이 글의 주장 역시 언제든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자유정신을 이해해보려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한마디로 규정되기 힘든 자유정신에 다다르기 위한 발자취를 따라가려는 노력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이 자신이 가진 이성적 능력을 통하여 자유정신을 붙잡아보려는 하나의 시도로서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1) 이하에서 『인간적인』으로 표기
2) 1권, 서문, 11쪽.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제목의 우울하고 용감한 책은 바로 그 자유정신들에게 바친 것이다.”
3) 우리가 자유정신에 대한 니체의 서술방식을 통하여 짐작해 볼 수 있는 점은 다음과 같다. 그는 ‘자유정신의 개념이 이것이다’라는 규정을 자의적으로 피한 것이 아닐까? ‘자유정신이 ~이다’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또 하나의 규정된 가치 혹은 관습이 될 우려가 있다. 자유정신은 그 자체로 가치를 탈가치 화시키는 무엇이어야 하므로 니체가 자유정신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을 까닭 역시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비극의 탄생』, 이진우 옮김, 41쪽.
5) 『비극의 탄생』, 이진우 옮김, 67쪽.
6) 『비극의 탄생』, 박찬국 옮김, 14쪽, 역자 각주6번.
7) 『비극의 탄생』, 박찬국 옮김, 14쪽, 역자 각주6번.
8) 본 논의에서는 예술과 학문만을 다루기로 한다.
9)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486절. “인간이 꼭 가져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가벼운 마음 또는 예술과 지식을 통해 가벼워진 마음이 그것이다.”
10)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서문, 9쪽.
11)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411절.
12)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435절.
13)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433절.
14)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411절.
15)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411절.
16) 『비극의 탄생』의 용어를 빌리자면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적절할 것이다.
17)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411절.
18)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1장, 411절.
19)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638절.
20) 괴테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생명의 나무다”
21)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218쪽.
22)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218쪽.
23)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2장, 218쪽.
24)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9절.
25)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6절.
26)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6절.
27)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160절.
28)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6절.
29)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6절.
30)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6절.
31) 그림자 없이 2차원적으로 파악된 사물은 사물에 대한 추상일 뿐이다.
32) “재능 있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진리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오류도 손상시키지 말하야 한다는 괴테의 격언”,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1장, 285절.
33) “자신의 이상을 거부할 때 비로소 최고의 것에 도달하는 에외적인 경우”,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1장, 350절.
34)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1장, 382절.
35) 이때 주어진 사태는 삶에 대한 열정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의미할 것이다.
36)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298절.
37)
38)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정신은 역시 진리를 또는 적어도 진리탐구의 정신을 자기편으로 삼게 될 것이다 :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하고 다른 정신은 신앙을 요구한다.” 『인간적인』, 1권, 225절.
39)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179절.
40)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179절.
41)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179절.
42)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179절.
43)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179절.
44)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171절.
45)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171절.
46) 11월 27일 발제문, 3쪽.
47)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179절.
48)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179절.
49)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욕망의 불과 더불어 마음의 불까지도 타오르게 할 수 있다면 이미 많은 것을 성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철학자 역시 자신의 시대와 공통되는 감정의 냉정함을 지니고 있으면서 또한 자신과 사회의 세계 부정적인 판단으로 감정의 불을 식히게 된다면 이미 많은 것을 성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182절.
50)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37절.
51)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53절.
52)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2장, 53절.
53) 이 글에서는 이때의 의지를 정열 혹은 열정으로 읽는다.
54)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1장, 172절.
55)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1장, 173절.
56)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1장, 172절.
57)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1장, 177절.
58)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1장, 99절.
59)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638절.
60) 『인간적인II』, 김미기 옮김, 1장, 220절.
61) 『인간적인I』, 김미기 옮김, 서문, 11쪽.
62) 그 원인은 고통에 있다.
63) 원동력은 정열 혹은 열정이다.
64) 자유정신이 방향을 설정하는 방법은 현실에 기반을 둔 근거물음을 통해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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