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형이상학 1 ㅣ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33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조대호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Chapter 3
[문단1-2]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substance)가 말해지는 네 가지 방식을 제시한다.1)
(a)그것을 위한 있음인 것(what being is for that thing).
(b)그것의 보편자.
(c)그것의 유.
(d)밑에 깔린 것(what underlies).
3장에서는 이 네 가지 중 (d)밑에 깔린 것을 검토한다.
밑에 깔린 것이란 ‘그것에 의해서 다른 것들이 서술되는 것이며, 그것 자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서술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밑에 깔린 것이라 불릴 수 있는 것에는 ①질료 ②형상 ③질료와 형상의 합성체가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가 말해지는 네 가지 방식들 중 (d)밑에 깔린 것을 가장 먼저 검토하는 까닭은 가장 밑에 깔린 것이 실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윗 문단에서 제시한 기체에 대한 정의는 분명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실체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①기체가 ‘그것에 의해서 다른 것들이 서술되는 것이며, 그것 자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서술되지 않는 것’이고, ②기체가 실체와 같다면, ③기체의 후보들 중에서도 가장 기체인 것은 질료이기 때문에 ④질료가 실체가 되어야한다. 그러나 과연 질료는 실체인가?
[문단3]
하나의 물체에서 물체(bodies)의 피동적 속성(attributes)2)‧능동적 속성(products)3)‧능력(capatities)4), 그리고 물체를 구성하는 길이‧넓이‧깊이 등을 제거하면 오직 질료만이 남기 때문에, 기체가 실체라면 질료가 실체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질료는 자체적으로 ‘어떤 것’ 혹은 ‘어떤 양’ 혹은 ‘그것에 의해 존재(being)가 한계 지워진 어떤 것’도 아니고, 이것들의 부정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질료가 A의 부정이려면 부정되어지는 A가 전제 돼야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료는 애초에 어떤 것도 아니고, 어떤 양도 아니고, 그것에 의해 존재가 결정된(determined)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의 부정이 될 수가 없다. 즉 질료는 ‘어떤 것인 실체’ 혹은 ‘어떤 양’ 혹은 ‘그것에 의해 존재가 결정된 어떤 것(실체와 양을 뺀 나머지 범주)’이라는 인간의 10범주를 통한 인식을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질료는 실체가 가져야할 ‘분리 가능성’과 ‘이것임’의 특성을 결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분리 가능성’과 ‘이것임’은 A와 B혹은 B와 C의 다름을 인식하는 인간의 지성적 판단 아래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질료로서의 청동은 그 자체로는 분리된 무엇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질료로서의 청동은 동상이나 그릇 심지어는 하나의 덩어리 등의 구체적이고 ‘특정한 형상’을 띄고 드러난다. 따라서 청동은 질료인 상태로는 다른 것과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특정 형태를 띰으로써만 청동 아닌 다른 것과 [혹은 다른 개체의 청동과] 구분된다. 즉, 우리는 질료를 그 자체로 분리된 것으로 인식할 수 없으며, ‘질료와 형상의 합성’을 통해서만 청동을 인식 가능하다. 물론 우리는 A라는 개체의 질료로서의 청동과 B라는 개체의 질료로서의 청동이 분리됨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A와 B라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합성체를 인지함으로서 각각의 개체엔 각각의 분리되어 존재하는 질료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식하는 것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또한 질료는 ‘이것임’이 아니다. 질료는 분리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것과 구분된 이것, 그것과 구분된 이것으로 지시될 수 없다.
[마무리]
실체는 기체일 수 없다. 기체의 정의가 그 자체로 실체와 같다면, 가장 기체인 것은 질료이기 때문에, 질료가 실체여야만 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실체는 ‘그것에 의해서 다른 것들이 서술되는 것이며, 그것 자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서술되지 않는 것’이라는 조건 외에도 ‘분리 가능성’과 ‘이것임’을 만족시켜야한다. 하지만 질료는 ‘어떤 실체’혹은 ‘어떤 범주’도 아닌 인간의 지성을 벗어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른 것과 ‘분리’하여 ‘이것’혹은 ‘저것’으로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기체의 정의는 실체를 이루는 필요조건일 수는 있으나 충분조건 일 수는 없다.
Chapter 4
[문단1]
앞서 살폈듯, 3장의 첫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substance)가 말해지는 네 가지 방식을 제시했다. 4장에서는 이 네 가지 방식 중 ‘(a)그것을 위한 있음인 것(이하, 그것의 무엇임)’을 살필 것이다.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것의 무엇임’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하여, 논리적 관찰(logical remarks)의 방법을 사용하겠다고 한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논리적 관찰이 무엇인지는 본 논의의 끝에서 밝혀질수 있다.
[문단2]
각각의 것의 무엇임은 자체적으로(in its own right) 말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무엇임은 예술적인 것의 무엇임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 자체로 예술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때 내가 그 자체로 예술적이지는 않다고 함은 어떤 의미인가? 예술적인 것이 자체적으로 나의 무엇임이라면 나는 항상 예술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내가 미술이나 음악을 배운 경우 나는 예술적이지만, 배우지 못했을 경우 나는 예술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나는 자체적으로 예술적이지 않고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예술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적임을 나의 무엇임이라 할 수 없다. 나의 무엇임은 나 자체로서 말해지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것의 ~임이 자체적으로 말해진다고해서, 그 ~임이 모두 어떤 것의 무엇임은 아니다. 예를 들면, 데모크리토스에게서 모든 표면(X)은 그 자체로 하얀 것(Y)이다(X=Y). 따라서 [데모크리토스의 입장에서] 표면에 대한 정의를 할 때 그 정의항에는 ‘하얌’이 들어가고5), 역으로 하얌에 대한 정의에서는 정의항에는 ‘표면’이 들어가야 한다6). 즉, 표면이 그 자체로 하얀 것 일 경우, ‘X는 그 자체로 Y다’가 성립할 뿐 아니라, 그 역 ‘Y는 그 체로 X다’역시 성립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것의 무엇임을 표현하는 정식은 그 것 자체를 포함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즉, X의 정의항에는 X 혹은 X와 같은 Y가 들어가지 않아야한다.7)따라서 표면의 무엇임에 대해 물었을 때, ‘표면임은 하얀 것임이다’ ‘표면임은 하얀 표면임이다’라는 서술은 표면의 무엇임에 관한 적절하지 못한 답변이 된다.
Point: X의 무엇임은 X에 대해 자체적으로 말해지는 Y이다. 그러나 Y가 X와 동치관계에 있을 경우 Y는 X의 무엇임이라 말해질수 없다. 따라서 X의 무엇임은 X에 대해 자체적으로 말해지되 X와 같지 않은 무엇이다.
[문단3]
실체 아닌 ‘다른 범주들’과 다른 범주들 밑에 깔려있는 ‘실체’의 ‘합성체’는 무엇임을 가지고 있는가?
하얀 사람의 예를 살펴보자. 우리는 하얀 사람의 이름을 cloak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cloak의 무엇임은 무엇인가? cloak은 자체적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얀 사람을 cloak이라 할 경우 그것은 하얀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얀 사람을 cloak이라고 부르는 경우, cloak은 ‘사람’이 생략된 하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때 하얀 사람이 하얀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얀 사람의 무엇임이 하얀 것의 무엇임과 같지는 않다. 하얀 사람을 하얀 것으로 표기함은 생략에 의한 무엇임이다.
반면 하얀 것의 무엇임을 말 할 때 누군가는 하얀 사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사람’이 추가되는 방식으로 하얀 것의 무엇임이 주어지는 경우이다. 해당 경우 역시 추가에 의해 무엇임이 주어졌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무엇임이 말해지는 경우가 아니다.
정리하면, 합성체는 자체적으로 이야기되지 않고 생략이나 추가를 수반하기 때문에, 무엇임을 갖지 못한다. 다른 말로, 어떤 것의 무엇임은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될 필요 없이, 자체적으로 ‘이것’으로 지시될 때에만 이야기될 수 있다. 이때 부가적 서술 없이 ‘이것’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체뿐이므로, 실체와 속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합성체는 무엇임을 가질 수 없다.
Point :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될 필요 없이 ‘이것’으로 지시되는 실체만이 그것의 무엇임을 갖는다. 반면 합성체는 추가나 생략에 의해서만 서술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합성체는 무엇임을 갖지 않는다.
[문단4]
어떤 것들의 정식이 정의인 것들에 대해서만 무엇임이 존재한다. 이때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이름과 정식이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정의가 이름과 정식이 같은 것이라면 그 정식은 정의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서사시 ‘일리아드’는 24권의 서사시, 호모의 걸작, 최고의 고전으로 치환하여 사용하여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미 [문단2]에서도 논의 되었듯 이름인 X와 이름에 대한 정식인Y가 치환 가능한 경우, Y는 X에 대한 정식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정의는 어떤 정식에 대하여 성립하는가? 정의는 정식이 첫째가는 것을 대상으로 할 때 성립한다. 이때 첫째가는 것이란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됨 없이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첫째가는 것을 ‘유에 속하는 형상(종)’으로 본다. 즉, 정의는 어떤 ‘종’에 대한 정의이며 정의항은 유와 종차로 이루어진다.
이때 주의해할 점은 첫째가는 것으로서의 종이 ‘유가 종차에 의해 서술 받는 방식의 합성체’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차+유’의 합성은 ‘하얀+사람’의 합성과 같지 않다. ‘하얀 사람’과 같은 합성체의 경우 ‘하얀’이 ‘사람’을 수식하기 때문에(‘하얀’이 ‘사람’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되는 구조로 표현된다. 정의 역시 유+종차의 두 항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의에서 종차가 유와 관계 맺는 방식은 하얌이 사람과 관계 맺는 의존적인 방식과 다르다. 하얀+사람의 경우 결합이 이루어진 후에도 하얌과 사람이 사라지지 않고 하얌이 사람에 속하게 될(의존하게 될) 뿐인 반면, 종차(A:이성적)+유의 합성(B:동물)은 사태 상 A가 B밑으로 술어 되는 방식으로 결합하지 않고 A와 B가 합쳐져 ‘단 하나의 종’(C:사람)이 된다. 즉 종차+유의 합성의 경우 언어상에서는 두 개의 항으로 구성된 한 항이 다른 항을 수식하는 구조를 보일지지라도, 사태 상으로는 종차와 유가 합쳐져 하나의 ‘단일한 종’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종으로 나타나는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서술됨 없이 표현되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oint : “X는 Y이다”라는 명제에서, X의 정식인 Y가 X의 정의일 때라야만 우리는 X의 무엇임을 이야기할 수 있다. X가 정의를 가지려면 ①X는 첫째가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첫째가는 것이란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해 수식되지 않는 것을, 즉 실체를, 나타낸다. ②X와 Y는 치환 가능해서는 안 된다. X와 Y가 치환 가능한 경우 Y는 X에 대한 정의라고 말해질수 없다. ③Y항은 유에 속하는 종을 표현한다. 유와 종차는 합성되어 단일한 실체를 나타내며 이때 Y는 X와 같지 않은 ‘X의 무엇임’이다. (합성체의 경우 합성의 내용과 합성체가 같음 --- ex 하얀+사람=하얀 사람)
[문단5]
[문단4]에 따르면 정의는 종차와 유로 이루어진 정식을 가지는 종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정식을 가지는 것만이 무엇임을 갖는다. 즉, 무엇임은 종차와 유의 결합으로 하나의 종을 표현함으로써 드러나며, 이때 종은 실체와 속성으로 이루어진 합성체가 아니라 ‘이것’으로 지시되는 첫째가는 것으로서의 실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때 다양한 방식이란 ‘어떤 것은 무엇인가’가 한 편으로는 실체와 이것을 나타내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양, 질 등등과 같은 실체의 속성으로서의 술어들 각각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것은 사람이다’라고 대답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크다’ ‘이것은 하얗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다’는 실체뿐만 아니라 실체의 속성에도 사용된다. 그러나 실체와 실체의 속성에 ‘~이다’가 사용되는 방식은 같지 않다. 실체에 ‘~이다’가 사용될 경우 첫째가는 방식이고, 실체가 아닌 다른 것들에 ‘~이다’가 쓰일 경우 첫째가는 방식이 아니다. 즉, ‘어떤 것은 무엇인가’는 제한이 없이는 실체에, 제한적8)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 사용된다.
실체 아닌 것에도 첫째가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제한적인 방식으로 ‘~이다’가 사용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예는 우리가 ‘이지 않은 것’의 경우를 통해 더 명확해 진다. 우리는 ‘~이지 않은 것’을 주어로 취할 때조차 is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즉, is의 용례의 첫째가는 방식에서는 실체는 ‘~이다’고 나타내지는 반면, 제한적인 방식으로는 ‘비존재는 비존재이다’라는 문장과 같이, 비존재에 대해서조차도 그리고 비존재가 아닌 존재의 속성에 대해서도 is를 사용 가능하다.
Point : ‘~이다’라는 술어가 첫째로 그리고 제한 없이는 실체에만 사용되고, 제한된 방식으로는 실체 이외의 것들에도 사용될 수 있다. 정의 역시 첫째로 그리고 제한 없이는 실체들에 속하며,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다른 것들에 속할 수 있다.
[문단6]
is가 첫 번째로는 그리고 제한 없이 실체에 해당하고,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 해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임’역시 첫째로 그리고 제한 없이는 실체에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 해당한다. 제한적으로 표현되는 무엇임은 실체가 가지는 속성으로서 질이나 양에 대한 무엇임이다. 이때 질이나 양에 대한 무엇임은 실체에 대한 무엇임과 동음이의어의 관계에 있는 것도 동의어의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실체의 무엇임과 실체의 속성들의 무엇임은 ‘실체라는 한 가지 같은 것에 관계 맺는 방식’으로 있는 것이다.
이때 한 가지 같은 것에 관계 맺는다고 함은 환자와 수술 그리고 수술도구가 ‘의술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 환자 수술 그리고 수술도구는 모두 의술적이라 불리지만, ‘의술적’과 동음이의어이기 때문도 아니고 동의어이기 때문도 아니며 ‘의술적’이라는 단어와의 관련되어 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의 무엇임과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은 실체의 무엇임에 관련하여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이 관계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정리하면 무엇임은 첫째로 그리고 무제한적으로 실체에 속하며, 제한적인 방식으로, 즉, 실체의 무엇임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실체 아닌 것에도 속한다.
Point : [문단5]의 point와 마찬가지로, 무엇임 역시 첫째로는 실체에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 속한다. 우리는 [문단6]을 통해서 ‘제한적으로’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은 실체의 무엇임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인 것은 실체의 무엇임이며, 실체의 무엇임에 관련하여 제한적으로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이 이야기 될 수 있다.
[ 마무리 : logical remarks ]
무엇임은 첫째로는 그리고 무제한적으로는 실체에 대하여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 대하여 말해진다. 이 중,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목한 것은 실체의 무엇임이다.
[문단2]에서 실체인 X의 무엇임은 X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말해지는 Y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4장 전체에 걸쳐서 자신이 의도한 ‘자체적으로 말해짐’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제한해간다.9)그는 먼저 예술적임과 나임의 비교를 통해 자체적이지 않은 무엇임과 자체적인 무엇임을 구분한다. 자체적인 무엇임은 언제나 나에게 속하는 우연적이지 않은 무엇임 이다. 다음으로 자체적으로 하양인 표면의 예시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 ‘자체적으로 말해짐’의 의미를 축소시킨다. X의 무엇임인 Y가 X자체적으로 말해지는 무엇이라 할지라도, X와 Y가 서로 치환 가능할 경우 Y는 X의 무엇임이 될 수 없다.
다음으로 [문단3]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임의 첫 번째 그리고 무제한적(without qualification) 대상인 X는 반드시 ‘이것’으로 지시되는 실체여야만 함을 이야기한다. [윗 문단과 연관하여] 실체는 합성체의 경우와 다르게 추가나 생략에 의해 서술되지 않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즉, 실체만이 무엇임을 갖는다.
그렇다면 X의 무엇임은 어떻게 이야기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문단4]에서 X의 무엇임은 X의 정식인Y가 정의일 때만 X의 무엇임을 이야기가능하다고 한다. 이때 정의는 유에 속하는 종으로 표현되며 유와 종차의 합성은 합성체의 합성과 상이하다. 실체인 종의 무엇임은 유와 종차로 이루어진 정의를 통해 나타나며 유와 종차가 합성되어 하나의 단일한 실체를 표현한다.
이상에서 [문단2-4]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마치면서 알 수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위의 문단들은 실체인 어떤 것의 무엇임이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이라는 논리적인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즉,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이기 위해 충족되어야할 기준과 배제되어야할 기준을 제시한다.
덧붙여 [문단5‧6]을 통하여서는 실체 아닌 것들의 무엇임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진다. 무엇임은 첫째로는 그리고 무제한적으로는 실체에 속하지만, 제한적으로는 실체 아닌 것에도 속할 수 있다. 이때 실체의 무엇임과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의 관계는 실체의 무엇임에 관련하는 방식으로만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이 이야기되는 관계이다. 즉, 실체에 대한 무엇임이 첫째이고 이것을 토대로 제한적으로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이 이야기되는 것이다.
이때, ‘실체의 무엇임은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이다’라는 관점은 실체의 무엇임이 첫째이고 무제한적임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실체의 무엇임은 그것이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수식이나 참조 없이 첫째이고 무제한적이다. 반면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은 자체적으로 말해진 바로 그 무엇임에 기대어서만 이야기 된다. 따라서 실체 아닌 것의 무엇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4장 전체는 ‘실체의 무엇임은 자체적으로 말해진 것’이라는 명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좀 더 명확히 말하면 무엇임에 관하여 X is said to be in its own right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무엇임의 의미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4장이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1)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가 말해지는 네 가지 방식에 대해 말하는 까닭은, 실체의 지시체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실체를 실체라고 부르는 말의 의미(혹은 조건)을 찾기 위함이다.
2) 열이 주전자에 가해질 때, 뜨거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3) 차가운 냄비를 뜨겁게 할 수 있는 능력
4) ~에 관한 능력, attribute의 능력이든 products의 능력이든 상관없음.
5) 표면이 무엇이냐? 하얀 것이다.
6) 하얀 것이 무엇이냐? 표면이다.
7) X를 표현하되 X를 그 정식 안에 포함하지 않는 정식이 X의 무엇임의 정식이 될 수 있다.
8) ‘제한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문단6]을 통해 명확해 질 것이다.
9) 이것이 [문단1]에서 이야기한 logical remark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