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공포감이 버드를 사로잡았다."(273)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했던 건, 이 작품이 허구가 아니라 실화, 그것도 작가의 실제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실제로 뇌헤르니아 장애를 가진 장남 히카리를 낳은지 얼마 안 돼서 쓴.

누구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게 쉽지 않다는 걸 경험한다.

왜 작가는 그 고통스런 상황을 이토록 냉정하고 치밀하게 다시 응시해야 했을까? 그러다보면 분명 아이를 향해 느꼈던 그 때의 분노와 살의, 커다란 절망을, 끔찍할 정도로 비인간적이었던 자신의 방황을 대면해야 했을텐데.(실제로 작가로 현실에서는 자살을 시도했고 퇴폐로 절망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 책 <해설> 291쪽 참조)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버드는 "집으로 돌아가면 먼저 거울을 보아야지" 라고 혼잣말을 한다. 이 대목을 나는 아무리 괴롭더라다도 현실과 나를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결의와 반성으로 읽었다. 실제로 작가는 "그 후 줄곧 장애를 짊어진 아들과 살아왔고 연달아 닥쳐오는 새로운 어려움을 만났지만 그때처럼 온몸으로 절망한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한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278-279)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체험>이라는 그때의 자기자신과의 정면 대결의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근본적인 정화작용"을 했다고 인정한다.


<히로시마 노트>에는 겐자부로가 개인적인 불행을 극복하게 된 깨달음의 과정이 나온다. 원폭피해자들을 보면서 그는 비참함 속에서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며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본 것이다. 이들에게서 본 삶을 그는 "정통적인 삶"이라고 명명한다.

"히로시마의 현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지나친 절망도, 지나친 희망도 갖지 않는 그러한 실제적인 인간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듯하다. 나는 이러한 이미지의 사람이야말로 정통적인 인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작가의 이러한 깨달음은 <개인적인 체험>에 잘 나와 있다. 장인이 "자넨 이번 불행과 정면에서 맞서 잘 싸웠군 그래"하고 버드에게 말하자 버드는, "아뇨. 저는 여러 번 도망치려 했었어요. 거의 도망쳐 버릴 뻔했었었죠. ... 하지만 이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정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 샌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 식으로요."(274)라고 말한다.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정통적인 삶을 살라고 호명하고 강요한다. 현실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기만의 늪에 빠질 수 없는 것이다. 희망도 필요하지만 인내도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절망을 인내하면서 희망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작가는 이유도 알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이 갑작스럽게 내게 일어나는 폭력과 그로 인해 망가지기도 하는 이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파괴되지 않으며, 파괴하지 않고, 일단 망가진 것은 고치는" 일(293)이라고 말한다. 특히 망가진 것을 고치는 회복 노력을 강조한다. 이 생존과 회복의 철학을 노년의 지금까지 일관되게 실천한 작가에게 우리의 그리고 세계의 존경심은 마땅한 것이다.

"...머지않아 일찍이 없었던 무게의 곤경이 찾아오리라는 것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인간에 대해 '회복'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는 신념을 지니고 어떻게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299)

<법화경> 중 <방편품>을 보념 오탁악세란 표현이 나온다. 다섯가지로 탁하고 악한 세상을 뜻한다. 오탁이란 겁탁(怯濁),견탁(見濁),번뇌탁(煩惱濁) 중생탁(衆生濁,),명탁(命濁)을 말한다.

오탁을 작가나 소설 속 상황으로 풀어보면, 첫째 겁탁은 질병이나 천재지변, 환경파괴 등의 재앙이 발생하는 시대다. 두번째 견탁은 그릇된 가치관과 견해로 작품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관료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대표적이다. 세번째 번뇌탁은 아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악덕이 횡행하는 시대다. 모두들 '개인적인 체험'만을 안고 있지 다른 이의 고통엔 무관심하다. 이해와 공유가 불가하다. '나', 오로지 '나'일 뿐이다. 네번째 중생탁은 정신적인 금치산자인 앞부분의 버드와 같은 무책임한 사람이 많아지는 시대다. 아내는 버드에게 묻는다. 당신은 책임지는 사람이냐고. 그러면서 책임진다는 건 특히 상대방이 약할 때라고 강조한다. (배우 장혁이 언젠가 방송에서 아내와 결혼하기 전 이야기를 했다. 힘들었고 그 기간이 길어 여친에게 떠나도 좋다고 말하자 여친 왈 "사람 힘들 때 버리는 거 아니야") 다섯번째 명탁이란 불의의 사고나 재해, 살상과 자살 등으로 자기 수명을 다하지 못하는 시대로 원폭피해자나 버드의 아이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오늘날의 시대만이 어디 오탁악세였을까. 그래서 작가가 말하는 '정통적 삶'을 궁구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지나친 절망도, 지나친 희망도 갖지 않으면서, 파괴되지도 파괴하지도 않으면서, 망가진 것을 고치면서 회복을 시도하는 끝없는 영원회귀의 반복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회복하는 인간>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