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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새벽 3시. 가볍게 식사를 한 후 위 선생과 같이 모대학 쪽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빙상 경기장 근처였다. 차가운 공기와 도시의 적막을 뚫는 형형(炯炯)한 안광(眼光)이 있어 바라보니 김선생이었다. 역시, 언제나 손에는 두툼한 인문고전이......늘 수불석권(手不釋卷)이다. 이 시간인 건 방금 알바가 끝났고, 이렇게 걸어가는 건 차비가 없어서란다. 두시간을 이새벽에!! 차라리 생각하며 걷기에 좋은 거리(distance)요 밤이란다. 멋있는 가난이요 부러운 젊음이다. 일부러 가난도 해보고, 깊은 새벽에 멀리 멀리 걸어도 가보고… 술 한 잔 더 먹겠다고 헛소리에 구라를 풀며 걸어가는 내 추레한 행색과는 완연히 딴 판이다.ㅠㅠ;
■ 언제나 책을 옆에 낀 채 읽고 걷고 사색하는 멋진 김선생. 희망과 실천의 폭포수다. 대학생의 모습이란 저래야 하렷다!! 그가 권하는 책 또한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 양서(良書)다. 데이비드 흄에서 홍자성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정수(精髓)들로 우리를 압박한다. 그를 보면 바슐라르가 말하는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를 이해할 수 있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촛불의 정신분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는 분명히 지식에의 의지가 있다. …… 우리는, 우리를 우리의 아버지만큼, 아버지보다 더 또 우리의 스승만큼, 우리의 스승보다 더 많이 알도록 충동하는 모든 경향을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라는 이름 下에 놓기를 제안한다. ……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지적생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그것은 그가 높이를 지향하고 깊이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후설이 말하는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이념들Ⅰ』에서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정립에 의하면 실재하는 주위 세계Umwelt는 좌우간 파악되는 것으로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현실’daeiend `Wirklichkeit`로서 지속해서 의식된다. 물론 일반정립은 하나의 특정한 작용에서, 가령 현존에 대한 분절된 술어적인 하나의 판단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일반정립은 [자연적] 태도가 지속되는 내내, 즉 자연스럽게 깨어 있는 상태에서 그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내내, 지속해서 성립되는 그 무엇이다. 그때그때 지각되는 것, 명료하게 혹은 불명료하게 현전화된 것, 간단히 말해서 자연적 세계에서 모든 사유에 앞서서 경험적으로 의식되는 모든 것들은, 그 전체로 통일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그 모든 분절되어 드러남에 있어서, ‘저기에 da`, `앞에 있는 vorhanden`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즉 그것과 더불어 한갓되게 표현되는(술어적인) 현존판단이 본질적으로 그 위에 건립되는 성격을 갖는다.” 쉽게 말해, 후설은 우리가 이 일반정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여실지견(如實知見)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서범준 선생이 지닌 태도이기에, 남다른 문제제기와 신선한 관점을 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김 선생은 일찍이 한 대화에서, 일본과 관련하여 자신의 역사의식을 보여 준 바 있다. 특별히 우리나라에 악영향을 끼친/끼치고 있는 교육에 관해서 그러했다. 그의 비판과 질타는 실상 적확(的確)하다. 그리고 여전히 유효하다. 나 역시 크게 공감한다. 문제는 일본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의 비판이, 일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북받치는 감정이 냉정한 분석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예컨대 일본에 대해 친근한 발언을 조금이나마 피력해도 반민족적 매국친일파로 매도당하는 일들을 우리는 많이 지켜보았다. 그래서 오늘은 서범준 선생의 역사의식에 공감하면서도, 우리의 일본에 대한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벗어난, 루스 베네딕트의 뛰어난 일본론인 『국화와 칼』이란 서물(書物)을 맛보자는 것이다. 손무(孫武)가 『손자병법』「모공(謨攻)」편에서, “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즉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우더라도 위태롭지 않고, 적을 모르고 나만을 안다면 한 번은 이기되 한 번은 진다.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른다면 싸울 때마다 위태로워질 것이다.”(모로하시 데쓰지 편(編), 788~789)라고 말한 것이 참으로 귀한 진실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루스 베네딕트 또한 말한다. “일본인은 미국이 여태껏 전력을 기울여 싸운 적 중에서 가장 낯선 적이었다. 일찍이 대국(大國)을 적으로 하는 전쟁에서 이처럼 현격히 이질적인 행동과 사상의 습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 …… 적의 행동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들은 우선 적의 행동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7)
■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읽고나서 자꾸 서범준 선생이 떠올라서 그 이유를 음미하며 작성해보았다. 그것은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 벗어나기, 두툼한 인문고전 수불석권 등이었나 보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들을 쉽게 보거나 가볍게 보거나 얇게 보는 것은 싫어하면서, 쉬운 의견이나 가벼운 책이나 얇은 취미만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다들 이렇게 얘기한다. ˝전 쉬운 여자/남자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마땅히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얄팍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한 줌의 모래에서도 볼 수 있는 세상`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이 책이,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문화의 핵심을 잘 알게 해준, 두터운-쉽지 않은-묵직한-그래서 참 좋은 책이라는 점만 언급하고 싶다.
■ 추 신 ■ 젊디 젊은 김선생은 희망과 의미에의 의지로 충만하다. 실천과 행동을 중시하는 지식인이 되길 희원하는 모습도 분명하다.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닥 희망을 믿지 않고 행동을 믿지 않고 지식인을 믿지 않는다. (이에 대해 언제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그런 길로 가는 것이 내키지 않을 뿐(예컨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내 나름의 방식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희망이요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노장(老莊)의 허무(虛無), 키에르케고르의 불안, 니체의 비감(悲感), 버지니아 울프의 우울(憂鬱), 까뮈의 시지푸스, 베버의 냉소, 아날 학파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 전도서(傳道書) 기자의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즉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등등의, 고해(苦海)를 헤쳐 간 이 사상들이 어찌 희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희망할 수 없을 때 하는 희망과 희망할 수 있을 때 하는 희망은 다르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서 선생의 끓는 피를 옹호한다. 아니, 더 뜨겁고 세차게 끓었으면 좋겠다. 희망을 노래하고 실천을 도모하는 그 뜨거움과 열정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렸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 …… 3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