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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평점 :
“순수한 관계의 출현이 과연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것인지 아니면 통합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앤소니 기든스,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배은경 외 옮김, 새물결, 2001, 236쪽.)
1
몇 달 전 자신의 여친이 바람을 피웠다며 분노에 가득 찬 내담자가 찾아왔다. 절망만큼이나 살의(殺意)도 깊었다.
여자의 사주를 보니 원국에 없는 상관(傷官)이 올해 들어왔다. 친한 사람 혹은 주변 사람을 배신하거나 떠나보내는 운이다.
남자의 운을 주역타로로 점쳐보니 산수몽이 나왔다. “소귀유전 비력공망”, 즉 작은 귀신이 돈을 훔치니 힘써서 노력해도 주머니가 비었다가 나왔다. 역술에서 돈[財]은 여자이다. 그래서 처재(妻財)라고 한다. 당신의 여친을 다른 놈에게 뺏길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희망이 있다면 그 놈이 小鬼, 즉 작은 귀신에 지나지 않으므로 완전히 뺏아가진 못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불륜의 로맨스에 빠져 있을 그 두 사람의 운을 보기 위해 괘를 뽑아 보았다. 수뢰둔이 나왔다. “난사무서 전삼도사”, 즉 어지러운 줄이 실마리가 없으니 얽히고 설켜 있다. 그 두 년놈도 잘 될 것 같진 않다고 말해 주었다.
2
<인생의 베일>에서 키티는 큰 생각 없이 서둘러 세균학자 월터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홍콩. 그곳에서 찰스와 불륜을 저지른다. 하지만 월터는 우연히 집에 들렀다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다. 키티에게 큰 사랑을 주었던 월터가 어떤 상처를 입었을지 굳이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월터는 키티를 데리고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의 한 도시로 자원하여 발령을 받는다. 마지못해 따라갔던 키티는 그곳에서 새로운 차원의 의식의 성숙을 경험한다. 자연과 수녀원을 통해.
수녀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키티는 월터의 죽음으로 홍콩으로 돌아와 영국으로 떠난다. 이게 이 책의 큰 줄기이다.
3
문제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리뷰와 역자 후기이다. 키티가 대자연의 숭고함 앞에서 인간사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용서라는 해독제를 찾아내어 상처를 치료한 반면, 월터는 자신을 배신한 아내와 그런 아내를 사랑한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334]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해석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역자는 그리고 많은 독자들은 오도된 해석을 하고 말았다.
첫째는 그녀가 “광대한 자연 앞에서 […] 애증의 관계에서 해방”[332]되었다는 해석.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의 모습에서 사물의 무상함과 애수가 밀려왔다. 모든 것이 흘러갔지만 그것들이 지나간 흔적은 어디에 남아 있단 말인가? […] 그렇게 계속 흘러흘러. 바다로 가는구나. 모든 것이 덧없고 아무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 사소한 문제에 터무니없이 집착하고 그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인간이 너무나 딱했다.”[205]
분명 키티는 자연의 장엄함 앞에서 숙연해졌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깨달음이 애증의 관계에서 해방된 것이고 용서라는 해독제를 찾아낸 것일까?
키티의 사이비 깨달음은 월터의 상처를 전혀 읽지 못할 때 빛을 발한다.
“그의 어리석음에 일순간 화가 치밀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의 허영심에 난 상처가 분명했다. […] 남자가 아내의 정조를 아무리 중요하게 여긴다 해도 이건 도에 지나쳤다.”[226]
어이가 없지 않은가! 불륜을 저지른 당사자인 자기는 대자연을 통해 뭔가를 깨쳤는데 이놈의 남자는 아직도 과거의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니! 심지어 그를 “살짝 어리석다”[246]까지 생각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
“그날 그녀가 언뜻 엿본 숭고한 아름다움에 비하면 그들의 문제는 하찮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이토록 명백하게 다가왔는데, 그는 어째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어리석은 여자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해서 무엇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182]
사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영화 <밀양>이 떠오른다.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살인범을 이제 용서하기로 마음 먹고 찾아간 교도소 면회실에서 전도연은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된다. “저는 이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성 아우구스티누가 말했듯이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에게 용서를구해야 하고 신에게 지은 죄만 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것을 오늘날 많은 도착적 ‘신자’들이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월터의 마지막 말이다. “죽은 건 개였어.”[259]
보통은 월터의 이 유언을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못한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어느날 그 개가 남자를 물자 사람들이 미친 개에 물린 남자가 죽을 거라고 법석을 떨지만, 남자는 상처가 낫고 정작 개가 죽었다는 내용”[269]의 「골드스미스 애가」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미친 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은 건 사람이 아니라 ‘미친 개’다. 월터가 죽은 게 아니라 월터를 문 憎惡라는 미친 개가 죽은 것이다.
칭송이 자자할 정도로 죽어가는 이들을 돌봐주고 콜레라퇴치를 위해 헌신하는 월터가 전염병이 창궐하는 죽음의 막사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까? 그래서 나는 월터가 증오가 자신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 결국 자신이 증오를 이겨냈다는 고백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4
키티는 홍콩으로 돌아와 찰스와 또 한번의 불륜에 빠진다. 그것도 자신을 뜨겁게 환대해주고 보호해준 찰스부인을 배신하면서까지. 그런데, 나는 여기서 키티가 비로소 사이비 깨달음을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용서할 때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저주할 때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다.
“난 인간 같지 않아요. 짐승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 그건 사악한 악령처럼 어둡고 두려움에 찬 내 안의 짐승이었어요.”
그래서 선가에서는 한 소식했다면 토굴 밖으로 뛰어나오는 승들에게 榜했던 것이다. 하물며 키티란!
5
피눈물로 상처를 받은 내담자는 다시 찾아왔다. 많이 안정된 모습이었다. 그 두 년놈들도 사이가 그닥 좋지 않다는 ‘굿뉴스’를 전해주었다. 내담자는 내게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디까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저 깊은 상처의 심연에서 우러난 질문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6
집에 와서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을 펼쳐보았다.
“한 관계가 끝났을 때에는, 심지어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라 ‘차버린’ 사람에게 조차도, 상대방의 이미지, 그 사람과 관련된 습관들 그리고 화해의 기대가 떠올라 몇 년이고 지속될 수 있다. […] 실연 쇼크는 ‘심리학적 여행시간’을 갖는데, 그것이 끝나려면 몇 달이나 걸릴 수 있도 있다. […] 실연에 체념에 하는 것, 즉 ‘작별인사를 던지는 것’은, 보통 슬픔과 비난의 세월이 실제로 다 지나간 다음에 오는 철수(withdrawal)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달성된다.”[166]
결국 내담자는 시간이 흘러야 지금 자기가 겪은 아픔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없을 수도 있고.
기든스는 ‘친밀성의 구조변동’이란 부제로 현대인들의 사랑이 과거와 바뀌어버린 이상 내담자의 사례처럼 불륜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낙관적 근거를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과연 그러할까? 아내가 결혼을 해도 받아들일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나는 회의하지만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