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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2014년 12월 23일 평화도서관 발표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 가운데』를 읽고
“진리 찾기는 비자발적인 것의 고유한 모험이다.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사유에 폭력을 행사하는 어떤 것이 없다면 사유란 아무것도 아니다.”(G.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5, 143쪽.)
이 책 『삶의 한 가운데』(박찬일 옮김, 2005, 민음사)의 저자인 루이저 린저는 과연 가브리엘 마르셀의 평처럼 “현대의 가장 뛰어난 작가 중의 하나”임을 의심할 수 없었다. 또한, 과연 헤르만 헤세의 극찬처럼 이 책은 “순수하고 기품 있는 독일어”의 정수를 보여준다.
실제로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단단한 문장력이 압권이다. 낭만적 멜로가 남발하는 공허한 명언들이 아닌 성숙한 안목을 배태한 잠언적 문장들로 충만하다. 뭐랄까, 죽음을 이겨낸 사람의 초인적 모습이랄까. 아니면 죽음을 겪어 본 사람의 담담한 인간적인 모습이랄까, 그런 뿌리 깊은 인격의 문향이 물씬 배어 있다. 그렇기에 문장과 이야기의 고샅 곳곳에는 인생과 사랑에 대한 탁월한 지혜가 부끄러운 듯 숨어 있는 보석처럼 함장돼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슈타인이 여성 같고 오히려 니나가 남성 같다는 점, 니나가 사랑(슈타인)과 이념(퍼시) 중에 결국 이념이 맞는 사람을 선택했다는 점. 그러나 불륜과 강간으로 점철된 불행한 결혼. 그 불행한 결혼의 끝에 결국 퍼시를 향해 “[…]나는 당신이 나의 복잡함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당신의 단순함을 싫어해요.”(330)라며 환멸로 종언을 선언하는 장면 등등이 눈에 띄었지만, 책을 다 덮고 난 다음에는 ‘니나의 언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느새 내 상념을 점령하고 있었다.
니나의 언니가, 슈타인과 니나의 도저한 사랑과 자유를 향한 열망의 대서사를 우리들 일반 독자들의 눈을 대표해서 읽고 있다고 느낀 것일까? 그러니까 나는, 니나의 언니는 니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느낀 것일까?
슈타인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리고 니나와의 대화에서 니나의 언니는, 우리들 일반독자처럼,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숨겨진 소망을 말하기도 하고, 이들을 통해 점차 깨어나는 자신의 은닉된 본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니나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사실은 이 여러 자아 가운데 하나의 자아만을, 미리 정해져 있는 특정한 하나의 자아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지만.”(78)라고 말하자, 언니는 “그래. […] 가끔 우리는 선택이 아주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때가 있지. 혼자 있을 때,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것이, 자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거야. 우리는 그것을 보지.”(78, 강조는 인용자)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언니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까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78) 대화/책읽기를 하면서 하게 된 것이다. 아마 이런 게 대화나 책읽기의 의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까 대화나 책읽기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억압해 왔던 저 깊은 심연에 매장된 본래적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슈타인의 글과 니나의 말에 점점 빠지게 되면서 언니는 “처음으로 나는 슬픔도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233)고 고백한다. 모험과 좌절, 도전과 슬픔 등이 결여된, 철저하게 안락한 世人의 삶과 생활만을 추구해온 자신을 반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언니는 “지독한 슬픔이 나를 엄습해 왔다. 위로를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예전처럼 산다는 것이 갑자기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268)되어 두렵다. 결국 “왜 내가 계속 마음 한 구석이 무너진 상태로 있어야 하는가. 나는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며칠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잊어버려야 하리라. 나는 이렇게 많은 결단, 체념, 죽음과 같은 느낌들을 참아낼 수 없다. 나는 니나가 아닌 것이다. 나에게는 나의 인생이 있다.”(269, 강조는 인용자)라며 다시 안락이 보장된 世人으로 복귀하고 만다.
그렇다, 나는 니체가 아닌 것이다. 나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닌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가 아닌 것이다. 나는 왕충이 아니고 나는 이탁오가 아닌 것이다. 나는 안중근이 아니고 나는 전태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나는, 나는 아닌 것, 아닌 것, 그들이 아닌 것이다!
“내가 우는 것이 슈타인의 지난 고통과 니나의 엄청난 이별 때문만이 아니라, 나 때문에 그리고 축축하고 촘촘한 회색빛 그물에 얽혀 있는 인간들 때문에 우는 것이라는 것을. 대체 누가 그 그물을 찢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370)
언니의 이러한 슬픔과 회의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모르겠다. 정말 나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슈타인과 니나의 ‘위대한’ 혹은 ‘뜨거운’ 삶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찢어버릴 수 없다”고 말하는 언니의 말이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책읽기/대화의 변증법이 여기서 폐제(廢除)된 게 아닌가 하는 혐의가 든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내 삶의 양태에 의문을 촉발시키고 환기시키는 데 문학 혹은 책읽기의 존재이유가 있다면, 다시 말해서 헤라클레이토스가 “보리음료도 젓지 않으면 분리된다”(『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005, 248쪽.)고 한 것처럼 지속적인 초월적 강타에 소통의 존재이유가 있다면, 언니의 저 말은 내게 루이제 린저의 절망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