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기적 유전자의 핵심 주장과 흥미로운 개념들 -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첫 시작은 쉽지마는 않았지만 속도가 붙은 이후루는 다행히 읽기가 생각만큼 난해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핵심은 크게 세 가지다.

 

)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라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홍영남 외 옭김, 을유문화사, 2013, 40. 이하 이 책의 출처는 쪽수만 표시한다.]

)자연선택의 단위는 유전자이다.[나는 개인적으로 유전자 선택설Theory of gene selection'이라 부르는 것을 더 선호한다.”(47)]

)유전자는 생존가능성만을 목표로 하기에 철저하게 이기주의에 입각해 행동한다.[비정한 이기주의라는 유전자의 보편적 법칙에만 기초를 둔 인간 사회는 매우 험악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개탄스러운 일이라 해도 그것이 사실임에는 변함없다. ()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다.”(41)]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 있었던 개념은 ESS(evolutionary stable strategy),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과 )(meme)이었다. 먼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ESS는 개체군에 있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일단 그 전략을 채택하면 다른 대체 전략이 그 전략을 능가할 수 없는 전략이다. () 바꿔 말하면, 어떤 개체에게 가장 좋은 전략은 개체군 대부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139) ESS 개념을 도킨스가 사용하는 이유는 그룹선택설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도킨스가 예를 드는 것은 매파와 비둘기파인데, 그룹선택설에 따르면 모든 개체가 비둘기파가 되는 것이 집단 전체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 적합하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각 개체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매파와 비둘기파의 비율은 언제나 변화한다는 것이다.

밈은 생물학적 진화와는 다른 문화적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도킨스가 만들어낸 개념이다. 이 밈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는 인간이 유일하다. 인간만의 특이성인 것이다. 문화 역시 유전자의 전달처럼 진화하며 속도는 오히려 유전자보다 빠르다. 밈은 모방을 통해 퍼진다. “밈의 예에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아치 건조법 등이 있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 정자나 난자를 운반자로 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이, 밈도 밈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323)

 

사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기 전에 나는 이 책을, 프로이트 스스로가 언명한 인간의 3대 추락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은 크게 3번의 추락을 경험하는 데, 첫 번째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천동설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붕괴된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믿음이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 몰락한 것이다. 세 번째는 프로이트 자신의 업적인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이성적 인간관을 해체시킨 것이다.[라캉의 다음의 글은 이 같은 프로이트의 견해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데카르트의 주체는 신기루(mirage)를 만들어 낸다. 그 신기루 속에서 현대인은 자기애(self-love)의 덫에 걸려 자신의 확실성을 확신할 수 없을 때조차도 주체의 확실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라는 말은 여러분을 당혹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을 필요로 한다. () 자유자재로 사고할 수 있는 곳에서 나는 항상 내가 아니며 의식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곳에서만 나는 나일 수 있다. () 주체가 자기 내부에 자기가 의식하고 규제하지 못하는 이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정신분석학적 통찰이 갖는 질서와 방법 모두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것이 프로이트Freud가 발견했던 진리요 인간의 근본 존재조건이기 때문이다.” 자크 라캉,욕망이론, 권택영 외 옮김, 문예출판사, 1998, 79-88. 강조는 인용자.] 그렇다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의 네 번째 추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인간이 무의식에 의해 지배받는다 해도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간의 존재이유 등에 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기 복제자는 덜거덕거리는 거대한 로봇 속에서 바깥 세상과 차단된 채 안전하게 집단으로 떼 지어 살면서, 복잡한 간접 경로로 바깥 세상과 의사소통하고 원격 조정기로 바깥 세상을 조종한다. 그들은 당신 안에도 내 안에도 있다. 그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자기 복제자는 기나긴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이제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65)

 

이 대목에서 상식을 가진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는 건 없다. 하물며 인간존재의 그럴듯함도 없다. 우리는 유전자의 생존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도킨스의 이러한 주장은 주체와 삶의 의미에 대해 불편함을 넘어 불쾌한 심정을 갖게 만든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발견과 발표에 대해 우리는 우선 객관적 인식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게 맞을 것이다.

한편, 이기적이라는 개념 역시 우리의 직관에 위배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는 동기나 의지와 관계 없이 행동의 결과를 놓고 판단할 수 있다. 결국 이타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존재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을 말한다. 역설적이게 보이겠지만, 이기적인 유전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연 선택은 서로 같이 존재할 때 相利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 다시 말하자면 협력하는 유전자의 무리들을 반드시 선호한다.”(11)

 

대형 어종의 체표면에 붙어 있는 기생충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 동물은 작은 어종과 새우류를 포함해서 약 50종이 알려져 있다. 대형 어류는 대리 청소라는 분명한 이익을 얻고 있고, 청소어는 어느 정도의 먹이를 얻도록 되어 있다. 즉 이 관계는 상호 이익을 주고 받는 공생적 관계[相利共生]이다. 많은 경우에 대형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청소어가 입속에 들어가 이를 쪼아 청소한 후 아가미를 청소하면서 통과해 나오도록 하고 있다. 대형어는 깨끗해질 때까지 점잖게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청소어를 덥석 삼켜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청소어는 아무런 위험 없이 지나쳐 간다. 이것은 현상적인 이타주의의 굉장한 장면이다. 많은 예에서 청소어는 대형어의 일반 먹이와 비슷한 크기이기 때문이다. (중략) 청소꾼이란 직업은 산호초 생물 군락의 일상생활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청소어는 각각 자기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대형어들은 거기에 줄을 서서 마치 이발소의 손님처럼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여 준다. (중략) 대형어가 줄곧 새로운 청소어를 찾는 대신에 같은 이발소에 계속 다님으로써 얻는 이익이 이 청소어를 포식하고 싶은 욕구를 억제한 대가보다 클 것이다.(313~314)

 

- 도킨스의 주장 중 반론하고 싶은 대목 -

 

이 글을 쓰기 위해 이것저것 들춰보니 유전자 결정론 혹은 진화론에 대해 반박하는 글들이 많았다. 이들 중 특별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획득형질에 관한 논문이다. 도킨스는 ,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일생 동안 아무리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었을지라도, 유전적 수단으로는 그중 단 한 가지도 자식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새로운 세대는 에서 시작한다.”(72. 강조는 인용자)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과학자들 사이에선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의 유전에 대해서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된다고 한다.[조필규, 진화론 논쟁에서의 신라마르크주의, 한국과학사학회지 vol. 23, 2001, 144~156쪽 참조.] 조상의 선덕이 후손에게 복을 준다는 믿음을 가진 나로서는 라마르크의 논리가 전혀 근거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풍수에서도 동기감응이란 용어를 통해 나와 조상이 단순히 물리적 유전자만 관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유전자도 관계하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 정신적 유전자란 따지고 보면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명리의 대가 도계 박재완 선생은 幻魂動覺을 참조하면서 통변하셨다고 하는 데, 이 중 이 획득형질과 매우 가깝다. 도계 선생님의 말을 직접 빌면 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혼은 조상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전신은 아버지이고 그 앞의 전신은 할아버지입니다. 이렇게 쭈욱 이어지지요. 그래서 그 조상이 좋은 일을 했으면 그 자손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상이 고약한 일만 많이 했는데 그 후손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되겠지요.”[1990429일자 한국경제신문에 실렸던 도계선생님과 논설위원의 대담 중에서.]

 

-이기적 유전자를 읽기까지 : 종교에서 과학으로 -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서 일찌감치 구입도 해놓았지만 읽지는 않았다. 전문적인 과학책인 것 같기도 했고, 두께도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읽을 용기를 이제서야 내게 되었다. 사실 진화생물학을 비롯한 생물학 담론에는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그 관심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어렵고 두터웠어도 반드시 읽었어야 될 책이었다. 왜 읽지 않았는지를,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았다. 다시 말해서 지난 날, 나의 지적 관심사 중 본 에세이와 관련된 주제가 어떤 식으로 향해 왔는지를 음미하면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탐독했다. 다행히 이 과정에서 유의미한 접속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명확히 표현할 순 없지만 여기서 유의미한 접속이란, 명리학을 평생 연구할 내가, ‘지금 여기에서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략이나마 알았다는 것이리라.

 

10대 시절, 나는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당연히 창조론을 믿고 있었다. 물론 그 믿음은, 열정적이진 않았지만, 맹신에 가까웠다. 이러한 믿음이 흔들린 건, “그렇다면 하느님을 낳거나 만드신 분은 누구인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 때문이었다. 목사님이나 선생님들은 그런 질문은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며, 질문의 불필요성을 강조하셨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서 궁금증은 더욱 커져갔고 결국 십대 후반부터는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이런 내게 진화론은 매우 흥미 있는 이론이었다. 무엇보다 증거를 가지고 주장하는 게 맘에 들었다. 찰스 다윈의 생애를 다룬 평전이나 그가 쓴 책들을 쉽게 설명해주는 2차 문헌들을 위주로 읽어 나갔다. 독해력이 증장하면서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와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야 나는 같은 생물학자들끼리도 생물학적 혹은 유전자 결정론에 대해 견해 차이가 크게 있음을 알게 되었다. 먼저 두툼한 굴드의 이 책은 쉽게 말해, 차별을 정당화시켰던 비과학적 실험과 통계의 허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굴드는 서문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이 되풀이되는 현상은 사회·정치적인 원인에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서열화를 통해 불평등한 제도를 옹호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서 과학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또 인종간, 성간, 계급간 차이는 신체의 일부분이나 유전자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문화에 의한 것임을 굴드는 책 전반에서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굴드는 사회정치적으로 생물학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생물학적 결정론이 지닌 학문적 왜곡을 고발하고 있다.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이 책의 주제는 길고 복잡하게 뒤얽힌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추상적이고 학문적인 논쟁의 와중에서 자칫 길을 잃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주장에 의해 위축된 생명으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엉뚱한 사회적 목적으로 오용된 과학의 오류를 드러내야 한다는 결의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스티븐 제이 굴드, 인간에 대한 오해, 김동광 옮김, 사회평론, 2003, 59.]

 

에드워드 윌슨은 굴드와는 완전히 다르다. 철저하게 종교와 윤리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사회 행동은 결국 생물학적 현상에 불과하며 집단 생물학과 진화학적 방법론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윌슨은 리처드 도킨스와 유사하게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개체에 불과하다.'라는 말로 자신의 사상을 축약한다. 그러면서 굴드와 같은 사회사상가적 생물학자들을 비웃고 있다.

 

수많은 '인문주의적인' 과학자들이 과학적 유물론 바깥으로 걸어나가, 때로는 전문적인 관찰자로서 때로는 열정적인 작가로서 문화에 참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은 두 담론 세계 사이의 틈새를 전혀 메우지 못하고 있다. 그들도 거의 예외 없이 길들여진 과학자들이다. 그들을 초청한 주인들이 볼 때 그들은 글을 통해 여전히 폄하되고 있는, 야만적인 문화임에 틀림없는 그 무엇의 명목상의 사자들이다. 그들은 대중 과학자라는 말로 격하되며, 너무나 쉽게 그 꼬리표를 받아들인다. 정신의 더 심층에 도달하려 애쓰고 그곳에 도달한 극소수의 위대한 작가들조차도 현실 과학을 과학이 요청하는 대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이 도전의 본성을 알기나 하는지.[에드워드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1, 245.]

 

나는, 같은 생물학자들끼리도 진화를 바라보는 태도가 이처럼 확연히 다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관심사는 크게 두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하나는 기원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진화론의 활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기까지 : 과학에서 종교로 -

 

기원에 관한 관심은 이렇다.[기원에 관한 일반적 논의는 서동욱의 철학 연습(반비, 2011) 3자크 데리다: 순결한 기원이라는 신화는 왜 기만적인가를 참조할 것]어떻게 해서 우주는 생겼는가? 도대체 생물의 목적이, 생물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바 번식과 존속이라면 왜 무기물은 유기물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의 고뇌가 내게 준 선물은 풍요로웠다. 이 질문을 중심으로 탐구를 해나가던 나는 훌륭한 사상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별히 두 명의 저자만큼은 언급하고 싶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 2. 15~1947. 12. 30)와 테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1881. 5. 1~1955. 4. 10)이 그들이다.

 

화이트헤드는 원래 수학과 물리학분야의 대학자였다. 퇴임 후 하버드 대학의 철학과 초청으로 그는 본격적인 철학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과정과 실재, 관념의 모험, 이성의 기능등이 있다. 이 독후감과 관련해서 나는 관념의 모험이성의 기능만을 참조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두 책이 진화론과 관련된 나의 의문에 합당하다고 할 만한 그럴듯한 논리와 안목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다소 길지만, 진화론의 주장에서 만족할 수 없었던 나로서는 아래의 긴 글이 너무나 큰 기쁨을 주었기에, 이 글의 주인공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임에도, 염치불구하고 인용해보고자 한다.

 

이성의 기능은 삶의 기술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이 정의를 해설하는데 있어서 나는 즉각적으로, 소위 '적자생존'이라는 구문에 의해 암시되고 있는 진화론자들의 오류와 의견을 같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 오류는 결코 생존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최적자가 덜 적합한 부적자를 제거한다고 하는 것을 믿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며, 그 사실은 우리의 일상체험에서도 명백하게 예견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그러한 주장의 진짜 오류됨은 바로, 적자생존이 곧 삶의 기술의 최상의 예증이라고 믿는, 그 믿음에 있는 것이다.

실상 생명 그 자체는 생존가치에 있어서는 비교적 결함이 많다. 그냥 지속하기만 하는 좋은 기술은 죽어있는 것이다. 무기물들만이 방대한 시간을 지속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바위 하나는 8억년을 존속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체 중에 오래 산다고 하는 나무도 1천년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나 코끼리는 50, 기껏해야 100년 정도다. 개는 12, 곤충은 1년 정도 산다. 진화의 이론으로 야기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어떻게 이렇게 결함이 많은 생존력을 가진 복잡한 유기체가 진화되었느냐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기체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보다 생존게임에서 더 적합했기 때문에 진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아마도 비슷한 유기물 사이에서는 생존경쟁설에 의하여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생존경쟁이, 왜 그토록 미약한 생존력밖에 지니지 못한 복잡한 유기체의 일반 형태가 출현했는지에 관하여 별다른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

그러나 진화의 문제를 생각할 때 최소한 적자생존의 이론에 의하여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진화의 또 하나의 요소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진화의 방향은 상향적이어야만 했던가? 유기체의 종들이 물질의 무기화학적 분배로부터 발전되어 나왔다는 사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더 고등한 타입의 유기체의 종들이 진화하였다는 사실은 최소한 생존경쟁이나 환경에로의 적응의 어떠한 이론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사실상 상향적 경향에 수반된 것은 환경과 유기체 사이의 역의 관계의 성장이다. 동물들은 환경을 자기자신에게 적응시키는 과업을 점진적으로 수행하여 온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보금자리를 따로 지었으며, 매우 복잡한 사회적 거주환경을 조성하였다; 비버들도 그들의 강인한 이빨로 나무를 잘라서 가에 댐을 쌓았으며; 곤충들도 그들의 환경에 대한 다양한 반응체계로써 고도의 군집생활을 정교롭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더 친숙한 동물들의 사소한 행동조차 잘 살펴보면 그것은 그들의 환경을 개조한 행위이다. 가장 단순한 생명체들도 그들의 먹이가 그들에게로 헤엄쳐 들어오게 만든다. 고등한 동물들은 그들의 먹이를 추적하며, 포획하고, 또 저작한다.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환경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변형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떤 동물들은 그들의 먹이를 구하기 위해 땅을 파기도 하며, 어떤 놈들은 그들의 포획의 대상을 어슬렁어슬렁 추적한다. 물론 이러한 모든 생존작전들이 바로 환경에의 적응이라는 하는 흔한 이론이 의미하는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은 환경적응이라는 그런 말로 매우 부정확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말의 배면으로 진짜 중요한 사실들은 다 빠져나가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고등한 형태들은 그들의 환경을 개변하는데 능동적으로 종사하고 있다고 하는 그 능동적 사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인류라는 종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바로 환경에로의 능동적 공격이라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생존의 가장 돌출한 사실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제 나는 인간의 환경에 대한 능동적 공격을 설명하는데 다음의 3중의 충동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는 테제를 제의한다. 1) 산다, 2) 잘 산다, 3)더 잘 산다. 실상 삶의 기술이란, 첫째, 생존하는 것이며, 둘째,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생존하는 것이며, 셋째, 만족의 증가를 획득하는 것이다. 우리의 논의의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성의 기능이라고 하는 주제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성의 기능이란 바로 삶의 기술의 증진이다. 이성의 원초적 기능은 바로 그 공격을 환경에로 방향 지우는 것이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이성의 기능, 김용옥 옮김, 통나무, 1998, 34~49.]

 

요컨대, 인간 특유의 이성 기능을 고려해볼 때 진화론자들의 핵심 주장들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화이트헤드는, 과학이 확실성을 얻고자, 古來(고래)부터 추구해온 철학과 종교를 버릴 때 인간성마저 폐기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며 아래와 같이 경고하는데, 과학과 종교 사이에 있는 명리학을 考究하는 나로서는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 아닐 수 없다.

 

2천 년 동안 철학과 종교는 서구인들 앞에 인간으로서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내걸고 그것에다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왔다. 이런 강력한 경향성 밑에서 제수이트 수사들은 파타고니아까지 나아갔으며 존 울먼은 노예제를 비난하였고, 토마스 페인은 사회적 억압과 원죄의 교리에 항거하였다. 이들 제수이트 수사와 퀘이커교도들 및 자유사상가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이상)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정서는, 철학과 종교가 끼친 공동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감정의 일반화에 힘입고 있었던 것이다.

제러미 벤담과 오귀스트 콩트는 이 일반화된 정서를 궁극적인 도덕적 직관으로서, 즉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고 또 그 정서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관한 궁극적 이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명백한 사실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들은 형이상학을 버렸다. () 그들은 확실성을 얻고자 플라톤과 종교를 포기하였으나 거기서 얻은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관념의 모험, 오영환 옮김, 한길사, 1996, 95~96.]

 

인간 현상의 저자 테야르 드 샤르댕에 이르러서도 나는 내가 찾던 보물을 또한 발견하였다. 인간 현상은 정신과 물질, 종교와 과학, 창조와 진화를 총체적으로 용해시킨 책이다. 유물론에 기초한 다윈주의적 과학의 진화이론과 목적론에 근거한 정통 기독교신학의 창조론 사이의 대립구도를 깨뜨리고, 이 둘을 모두 수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실재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를 정신(뜻과 얼)에서 찾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도입하고, 존재의 사실성만이 아니라 의미를 동시에 포착하려는 종합적 직관을 과학에 주문함으로써 만들어낸 사상이다. 그러나 인간 현상은 우주의 운동에 대한 설명을 특정한 존재론에서 유추하는 방식에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따라 출현하고 있는 것들의 어떤 경험법칙을 찾는 방식으로 독자의 동의를 구한다.

 

테야르는 진화를 생명에 국한시키지 않고, 물질 자체에 생명을 향한 목적을 지닌 기초적인 정신이 있다고 봤다. 지구를 구성한 무기물의 운동에 이미 진화의 시작이 있었고, 이 진화는 새로운 형질의 우연한 출현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적이 있는 정향진화(正向進化)”로서 일정한 방향을 지닌다는 주장이다. 어디서 어디로 가는가? 무기물(“이른 생명”)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반성적 의식인 생각으로, 생각에서 보다 큰 다음 생명인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서 우주사건은 펼쳐진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화이트헤드의 논리와 유사하다 아니할 수 없다.

 

오메가 포인트라는 용어는 사실 널리 알려져 있다. 테야르는 책의 마지막에서 우주의 진화가 이제 진화 자체가 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함으로써, 인류로 하여금 다음 생명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진화로 인해 등장한 반성적인 생각과 그것의 집단현실인 얼누리(noosphere),” 이 현재 우주의 본바탕에 이미 활동하고 있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한 사랑과 생명의 열정으로 큰 사람이 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우주 안에서 () 시간과 공간 운동을 보는 동안은 순전히 과학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눈을 위로 돌려 전체미래를 보면 우리는 종교에 들어가게 된다. 종교와 과학. 앎의 두 모습이다. 이 둘이 결합될 때 완벽한 앎을 이루고 진화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끌어안으며, 그것을 생각하고 가늠하고 마무리 지을 수 있다.[테야르 드 샤르댕, 인간현상, 양명수 옮김, 한길사, 1997, 262.]

 

- 결론 : 명리학을 통한 종교와 과학의 조우 -

 

테야르 드 샤르댕의 사상을 소개하다보니 진화론의 활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두 번째 관심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다. 앞으로 내가 명리학을 일생 공부하면서 해야 할 일중의 하나가 바로 끊임없이 진화론을 참고하는 것이다. 진화론의 최신 성과를 명리학에 응용하고 활용하여 명리학을 더욱 합리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이트헤드와 테야르 드 샤르댕이 진화론의 맹점을 적확하게 논파하면서도 진화론의 特長을 잘 수용했듯이, 나 역시 진화론의 빛과 어둠을 잘 활용하여 명리학의 현대화에 기여하고 싶다. 곰곰 생각해보면, 명리학과 진화론 혹은 유전자 결정론은 닮은 구석이 많다. 자유의지에 대한 부정이 그것인데, 사실 둘 다 전면적인 부정이 아님에도 수많은 오해와 공포를 낳고 있다. 이런 면에서 딜런 에번스의 지적은 명확하다. “진화심리학을 비판한 사람들이 진화심리학을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틀린 것이지만,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딜런 에번스, 진화심리학, 이충호 옮김, 김영사, 2001, 170.] 이 두려움이 무엇인지 스티븐 핑커가 빈 서판에서 잘 정리했다. 불평등, 불완전함, 결정론 그리고 허무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 태도가 오히려 저러한 두려움을 더 강화시키고 있음을 핑커는 훌륭하게 논증하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여하튼 나는 훌륭한 과학적 주장이 나올 때마다 이를 명리학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핑커도 나와 유사한 견해를 보여준다. “문제는 인간 본성이 갈수록 마음의 과학, , 유전자, 진화 등에 의해 설명될 것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 지식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 평등, 진보, 책임, 개인의 가치라는 우리의 이상에는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가? 인간 본성에 반대하는 좌·우익 분파들은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옳다. 그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 문제를 대할 때에는 두려운 방어적 태도가 아니라 합리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스티븐 핑커, 빈 서판, 김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4, 246. 강조는 인용자.]

 

명리학은 과학과 종교 사이에 있기에 학문적으로는 오히려 이 둘을 수용할 수 있는 地理的(지리적) 이점이 있다. 그런데 역으로, 만약 이 둘을 적절하게 융합하지 않는다면 명리학은 오히려 치명적인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최악의 장소가 될 수도 것이다. 칸트의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공허하다라는 말을 바꾸어서 다음과 같이 말해볼 수 있겠다. 종교 없는 역학은 공허하고 과학 없는 명리는 맹목이다. 이것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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