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이인웅 옮김, 외젠 들라크루아 외 그림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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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륭선생님의 <죽음의 한 연구>를 처음 접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좌절했던가!

일곱 번의 시도 끝에, 몇년의 공부 끝에 드디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신화와 연금술 또는 종교적지식의 획득으로 인한 한 이해가 아니었다.

어둡게 죽어가는 내 삶의 공포동굴을 거치면서야 조금씩 이해가 싹텄던 것이다.

여하튼 파우스트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파우스트적 관능욕과 파괴, 창설과 죄지음의 모험행로를 조금이나마 헤쳐나가 본 경험이 부족하다면 끄트머리를 공감하는 것조차 불가하리라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지적 배경의 부족이 이해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조할만한 견해이고 그 또한 한 이해이지만 인간경험의 보편성과 고차원인식의 보편성을 고려한다면 그깟 신화와 고대철학은 내 마음과 욕망의 결들을 어루만지면서 독서한다면 얼마든지 괴테의 득도를 조금은 눈치챌 행운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신화가 인간 욕망의 다양성을 의인화한 것이라면 그 인간이 바로 나라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지나치게 외부에서 끌어와 파우스트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학자들의 흉내를 내는 반실존적 트렌드에 편승하는 꼴이다.

신화를 알면 더 잘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래야한다고 주장한다면 중앙집권적 해석의 독점권을 내세우는 못난 메피스토의 몰골만 드러낼 뿐이다.

신화 이전에 그것의 모티브나 근간이 되는 민담이나 전설도 있을 것이고 더 깊게는 고태적 사유나 원시적 정신 또한 있을 것이다.

독자인 내가 책을 방법은 학론연적 평론 태도가 아니라 내 삶의 주제와 맞물린 실존적 수용태도라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사실 이번 독서에서도 파우스트는 쉽게 옷을 벗지 않았다.

나 역시 체게융과 하이데거의 사유를 동원했고 악 혹은 악마에 대한 샌포드의 견해와 승계호교수의 스피노자적 독법에 많은 도움을 받은 게 사실이다.

역술가이기에 자연스럽게 음양오행을 중심으로 한 동양주술적 사고로 읽어도 보았고 도덕의리학의 동양철학적 담론 또한 참조하였다.

하지만 고해의 바다를 부유하는 내 삶의 경험이 가장 큰 나침반이 되어주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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