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매혈기 - 글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킨 한 평론가의 농밀한 고백
김영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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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영진이 누구인지 몰랐다. 신간 소개를 보고서야 ‘영화 평론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평론가가 쓴 책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키지 않았다. 평론가들의 글이 워낙에 ‘그들만’의 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숱하게 경험한지라 그랬다. 그럼에도 이 책을 보게 된 건, 제목 때문이었다. ‘허삼관 매혈기’를 연상시키는 제목이 구체적으로 뭔가를 그려줬다. 속는 셈치고 보기로 했다. 결국 나는 속았다는 생각을 했던가. 아니다. 책을 읽는 동안 굉장히 유쾌했다. 거의 모르는 영화와 영화인 이야기가 도배돼있음에도 읽는 것이 즐거웠다. 영화라는 것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김영진이라는 사람의 마음을 엿보고 그 마음 위에서 그려지는 펜글씨를 구경하는 것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샘물이 퐁퐁 샘솟는 것과 같이 즐거웠다.

‘평론가 매혈기’는 크게 3부작으로 나눌 수 있다. 1부는 김영진이라는 사람의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이다. 무턱대고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꽤 재밌다. 일단은 평론가답지 않게 글을 짧으면서도 재밌게 써서 그렇다. 톡톡 튀는 그런 느낌을 준다. 영화에 대한 예찬을 울부짖는 것도 매력적이다. 무협영화에 대한 소리도 즐겁고 미성년자 고관람불가 같지도 않은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다닌 추억담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평론가로 사는 것을 본 것도 큰 수확이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던 고루한 평론가가 아닌, 열심히 살아가고, 오늘도 꿈을 꾸고 있는 평론가를 발견했으니 제법 묵직한 수확을 얻었다. 평론가로 살아가는 진지한 내용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고.

2부와 3부에는 그가 만난 영화감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아는 영화감독이나 본 영화는 거의 없었다. 어디서 귀동냥이나 한번 했던 그 정도였다. 그래도 읽는데 지장은 없었다. 지장? 오히려 김영진의 글을 보면서 의욕이 불탔다. 그 영화를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이 끊어 올랐다. 김영진이 원한 건 아니겠지만, 앞으로 봐야할 영화 목록을 얻기도 했다. 무엇 때문에 볼 것인지가 아주 분명한 그런 영화 목록들을 손에 꽉 쥔 지금, 그것도 큰 수확이라 해야겠다.

이런 평론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 기쁘다. 앞으로 영화 잡지나 신문에서 그의 이름이 보이면 열심히 읽을 것 같다. 이런 책을 읽어서 만족스럽다. 지금 당장 이 책에 담긴 노래들을 전부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라는 것에 다가서게 될 것 같다.

평론가의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니… 김영진이 알면 기뻐할까?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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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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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보여주지만 그 끝에서 희망의 빛을 보여주고 있다. 진정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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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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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기억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 책을 보기 전에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서경식의 책이라고 해서 봤는데, 읽을 때 내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 울컥거려 혼났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그런 느낌. 추방당한 자들, 디아스포라를 쫓는 서경식의 글에서 나는 이 세상의 그림자를 느꼈었다. 그때의 슬픔이란… 책을 보면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었다. 그런데 서경식의 또 다른 책,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에서 똑같은 경험을 하고 말았다.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나를 엄습해온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은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살아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서경식은 ‘맺음말’에서 한나 그렌트가 20세기를 ‘난민의 세기’로 규정했다고 말하고 있다. 맞는 말인가.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폭력의 세기’라고 말하고 싶다. 폭력의 세기.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인류가 싸움을 시작한 이래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한 사라져버렸다. 그 와중에 핵폭탄이 날아갔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두렵게 하는 것이 탄생했다. 유대인 학살은 어떤가? 유럽에서 유대인을 차별하는 것은 계속해서 존재했지만, 20세기처럼 노골적으로 잔인하게 횡횡한 적은 없었다.

아. 아프리카 난민은 어떤가. 온갖 테러는 어떤가. 동족끼리 총을 쏘게 만들었던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또 어떤가. 20세기는 피로 얼룩졌다. 폭력이 매순간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 폭력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제국주의’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제국주의의 야심, 그것은 참으로 잔인하게 세상을 지배해갔다. 그 앞에서 인간이라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20세기에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은 제국주의의 욕심 앞에서는 개껌딱지보다 못한 것으로 재규정되고 말았다. 지금도 강대국들에서 마소가 먹고, 먹다가 남겨서 버리는 음식물만 해도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다 먹일 수 있다. ‘난민’도 그렇다. 강대국이 손가락질 하나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지 않는다. 그럴 욕심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잔인한 시대, 폭력의 세기, 광기가 지배하던 시절, 그 안에서 인간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미를 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있다. 의미는 있다. 그 암울한 구렁텅이에서 서경식은 49인을 말함으로써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독재에 맞선 파블로 네루다, 혁명을 위해 나선 에른스트 톨러,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안네 프랑크, 칠레를 위했던 살바도르 아옌데, 글로서 나치의 추악함을 폭로했던 프리모 레비, 제국주의에 항거한 가네코 후미코, 혁명가 김산, 조선의 독립을 위했던 홍범도와 김구… 이들은 무의미했는가. 최후는 초라했을지언정 무의미하지 않는다. 온몸으로 ‘폭력’의 다른 이름인 ‘20세기’에 맞섰던 그들은,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이렇게 후대에 알려짐으로써 20세기라는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 그것으로도 그들의 생과 이상은 숭고하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의미 찾기다. 그 자신이 디아스포라이면서 또한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았던 서경식이기에 가능한 길 찾기가 아닌가 싶다. 그 길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은 놀라운 책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작지만, 밝은 ‘빛’을 보여주는 이 책은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자격이 있다.
 
오늘 나는 지옥을 떠올렸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지금은, 희망을 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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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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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는 신자유주의였다. 그에 따라 시장은 개방해야 한다고 믿어졌다. 공기업은 문제가 많으니 싼값에라도 넘기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겨졌다. 국내자본이 어찌되든 간에 일단 외국자본을 끌어와야 한다는 말도 ‘진리’처럼 말해지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흥선 대원군이 이끌던 조선처럼 망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신자유주의 아니면 패망이라는 말이 횡횡했다. 그런 말이 너무 많다보니 나도 신자유주의가 대세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진리하고 믿었다. 그것이 이 나라, 내 가정을 살찌우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던 터에 장하준을 만났다. 그리고 혼났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장하준은 나를 거세게 몰아쳤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 알고 있다고, 신자유주의자들의 속셈에 넘어가 모든 것을 넘겨주게 됐다고 혼나고 말았다. 큰 질책을 받아서 그런가. 책장을 넘기는데 머리가 다 아찔해졌다. 그럼에도 책장 넘기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알기 때문이다. 이 책이야 말로 진정으로 나를 살찌우게 해준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말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미국이나 영국 등 이른바 선진국의 거대 자본 세력이다. 그들은 자유롭게 무역하자고 한다. 보호무역은 하지 말자고 주장하면서 따르지 않는 개발도상국을 압박하고 있다. 보호무역은 공평하지 않다는 논리 때문이다. 그런데 ‘나쁜 사마라아인들’은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기만’인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미국이나 영국 등의 보호무역의 역사를 생생하게 까발리고 한다. 아! 뻔뻔하다. 아! 치사하다. 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닐 것 같다.

공기영이 비효율적이라는 주장도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무참히 깨져나간다. 공기업이 훌륭한 사례를 보고 민영기업이 더 부정부패에 노출돼 있다는 말을 읽을 때마다, 교과서에서 배웠고 언론에서 들었던 ‘공기업부패론’과 같은 편견들은 파편화되어 사라져갔다. 그 파편을 바라보면서 어리석었다는 걸 알았다. 왜 무조건 그 말을 믿었을까? 신자유주의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공기영하면 멍청한 공룡으로 판단한 것은 왜 그런 것인가. 내가 어리석다. 아! 어리석은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진짜 어리석은 건, 신자유주의가 좋다고 믿었던 것이다. 어른과 아이가 그대로 축구 경기를 하면 반칙이다. 경기장을 조금 기울게 하는 방법 등으로 핸디캡을 조정해줘야 한다. 그런데 나는 무조건 그대로 게임하자는 논리를 줄기차게 믿었던 것이다. 어리석다. 그 어리석음에 하늘을 바라보기도 창피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쁜 사마리아인들’ 덕분에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았고, 그로 인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는 것에서 조금이나마 고개를 들어보려고 한다. 처음부터 너무 신랄해서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이 책이 내 손을 잡아주는 꼴이다. 고맙다. 이 책에 고맙고 장하준에게 고맙다.

주가 변동을 보는 시간보다 이 책을 보는 시간이 최소한 다섯 배는 유익하다고 말하고 싶다. 경제신문에 비하면 그 값어치는 몇 배나 더하다. 그러니 이 책은 꼭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하는 말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제대로’ 생각하고 싶다면 이 책은 ‘필독서’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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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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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발표 소식이 들렸을 때, 시큰둥했다. 누가 받든 무슨 상관일까 했다. 그러나 역시 폭풍이 몰아닥쳤다. 여기저기서 도리스 레싱의 소설을 두고 말이 오갔다. 나는 무관심하려고 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읽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섯째 아이’에 손이 갔다. 사람들의 리뷰를 보니 그 소설은 노벨문학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내용 자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분량, 어떤 소설일까 싶어서 표지를 들춰봤는데 빨아들이는 힘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것을 느낀 시간부터, 100m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단걸음에 읽어나갔다.

남녀는 평범했다. 세상의 말대로 하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해서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남자는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두고 싶었고 여자는 아이들을 많이 낳아 기르는 다정한 엄마요 헌신적인 아내가 되고 싶었다.

마침내 그들은 결혼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을 낳았다. 아이들을 키우기에 경제형편이 어렵기는 했지만 그들은 ‘이상적인 가정’을 위해 자연의 순리를 막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덩치도 컸고 사나웠다. 남편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은 여자를 암묵적으로 비난한다. 아이의 형과 누나들은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한다. 괴물 같은 아이가 등장하자마자 모든 것이 파괴돼 버리고 말았다.

오싹했다. ‘다섯째 아이’를 보는 동안 소름이 돋았다. 이상적인 가정이라는 것은 얼마나 허울 좋은 말이었던가. 겨우 아이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깡그리 무너지고 마는데! 그들의 행태를 보라. 아이를 ‘어떤 곳’으로 보낸다. 아이가 사라지자 집 안은 다시 유쾌해진다. 아이들은 행복해하고, 남편은 웃음을 되찾는다. 하지만 엄마는? 그녀는 독단적으로 다시 아이를 되찾아온다. 그것으로 다시 집안에는 암울한 구름이 덮쳐오는데…

무서운 소설이다. 튼튼해 보이는 일상도 이렇게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이 무섭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혈육을 그렇게 내치는 모습도 무섭다. 그보다 정말 무서웠던 것은, 이 내용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때문이다. 나도, 내 친구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 좋은 소설이다.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 특히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누리고 싶다거나 누리고 있다고 자부하며 사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그렇구나, ‘다섯째 아이’는 말이 많이 나올 만한 소설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누가 받든 관심 없고 그게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지만 이번만큼은 노벨문학상에 고맙다. 덕분에 좋은 소설 읽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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