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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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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제 김훈은, 차라리 저주다. 문장의 날을 세워 무언가를 노려보려는 이들에게 김훈은 악몽일 것이다. 최고의 문장가는 자기 글에 비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단 한 순간, 단 하나의 숭고한 비문을 통해 말로 베어질 수 없는 것을 베기 위함이다. 이 책의 드러나는 주제는 이 한 줄과 그것을 감싼 문단에 모두 담겨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교서를 받았을 때 나는 김덕령의 죽음과 곽재우의 삶을 생각했다. 나는 김덕령처럼 죽을 수도 없었고 곽재우처럼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구판 1권78p.

가슴이 시리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이 한 문단을 읽어, 김훈을 찌를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저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글의 유효함을 짐작할 수 없다. 단지 이것이 내가 아는 한 처음 있는 일이며, 하지 않으면 안 될 짓이라는 건 알겠다. 또한, 나의 칼이 징징거리고 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이것은 나의 싸움이다.

충무공이 거대한 것을 볼 수 없고 벨 수 없는 것은, 그가 충무공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 제목이 칼의 노래, 차라리 칼의 독백이라고 한다면, 충무공 자신 또한 한 자루의 칼일 것이다. 칼은 적을 벤다. 몹쓸 칼은 주인도 벤다. 그러나 칼이 기어이 벨 수 없는 것은, 그 날을 붙들고 있는 자루, 그 동여진 새끼줄을 칼은 끝내 벨 수가 없다. 이것이 이 소설이 근거하는 부조리의 전부다. 날은 자루를 볼 수 없고, 벨 수 없다.

작품의 시야는, 초기에 언급된 저 문단을 지나서면, 끊임없이 인간 이순신의 武에 집중된다. 이 소설이 뿜어내는 문장의 괴력은 다름아닌 저 집중의 힘이다. 판옥선이 화력을 집중하여 일본의 함대를 깨부수듯, 그렇게 武앞에 작가의 필력은 집중된다. 그리고 그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 부러 부조리하게 남겨놓는다. 그의 시호를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를, 忠을, 그래, 그의 '밥벌이'를. 그리하여 결국 그의 자루를.

임금과 충무공이 과연 싸우고 있었던가? 충무공은 임금의 면사첩 앞에서 그의 살의를 느끼며 코피를 흘린다. 그러나 그 또한 알고 있듯이 그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다. 문제는, 존재하는 모든 죽음이 자연사라는 것이다. 임금이 이순신을 죽인다면, 그는 적의 칼에 쓰러지는 것도 임금의 칼에 쓰러지는 것도 아니라, 단지 자루를 쥔 임금의 손에 의해 부러지는 것일 뿐이다. 임금이 진정 또 하나의 적이었다면, 조정의 지원을 받지 않는 수군의 우두머리인 그가 두려울 것이 무엇일까. 그는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는' 사내인데.

김훈 자신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여 그는 임금이 보낸 쇠고기의 칼 씹힌 흔적 뒤에, '정부은은 한 번 칼질에 베어지지 않았다(179p).'며 임금과 충무공의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깨닫는다. 결국 그는 임금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존재라는 것, 그 목이 잘려 종묘사직에 쇠고기처럼 올라도 할 말이 없다는 것. 이 엄연한 진실을, 그는 이후 더 말하지 못한다. 글쓰기는 오히려 무의식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이것은 그의 싸움이다.

나는 이 책을 두번 읽었다. 지금보다 더 철 없던 시절, 이런 의문이 들던 시점에 슬며시 등장하는 '삼별초(하권 130p.)'운운은, 나를 분노하게 했다. 이렇게 비겁하다니. 칼의 노래를 부르는 자가 이렇게 눙치며 발 뺄 구석을 남기다니. 이제 겨우 알겠다. 혹하는 모습마저 담아내는 것이, 불혹을 넘긴 문장가의 일임을. 그 어떤 치사함과 비겁이라도 일단 드러내는 것이, 김훈 특유의 솔직함이라는 것. 그것이 없다면 이 작품은 오히려, 유치해진다. 소설은 원래 거짓말하는 것이다. 고작 두어 해 된 일이지만, 이제 그정도는 알고 넘어갈 정도로 나는 성장하였다.

그는 이후 '밥벌이'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끼니를 거르며 썼다. 다가올 모든 글 앞에 이 글도 무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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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 (반양장) - 제국의 공적 제1호 폴라리스 랩소디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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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유와 복수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다시 읽는 독자는, 일곱 하이마스터의 자유/복수 게임이 복수로 결정이 났음에도 오스발이 선언하는 바가 자유에 가깝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분명히 오스발은 억지를 부리고 있다. 다른 하이마스터들이 복수를 선택했다면 그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이 세상의 인과응보를 철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트랩이다. 제목의 '실패'는 이것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오스발의 억지는 이렇게 해석된다. 실은 오스발도 자유에 한 표를 던져서 사실상 7인의 게임이 아니라 8인의 게임이고, 인간인 키 드레이번이 이제 그 불가해한 세상과 싸우기 위해(우리의 삶에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새벽의 안개를 찢으며 드디어 오스발을 죽이러 간다고. 오스발이 다른 하이마스터들에 비해 월등히 강한 것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세상을 복수보다는 자유가 더 구현되는 곳으로 인식함을 의미한다. 중력의 원리와 같은 수많은 복수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그래서 이영도의 자유/복수 게임은 타당하다. 인간은 9번째 결정자, 자유와 복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자이니까. 자유호를 타고 복수검을 휘두르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접어두더라도, 이 소설은 구성상 더 큰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다들 어느 정도 감 잡을 수 있다시피, 거대한 전쟁 로망으로서의 폴랩과 자유/복수에 관한 거대한 우화로서의 폴랩은, 샴쌍둥이처럼 일체이면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 이질감의 연원을 캐보면, 판타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작품은 훌륭한 판타지 소설이면서, 판타지에 대한 연구 소재로서 훌륭한 실패작이다. 이 말은 결코 욕이 아니다. 오답도 되지 못하는 싸구려 무늬만 판타지가 즐비한 세상이니까.

전쟁 로망으로서의 폴랩은 치밀하고 완벽하다. 서 소팔라가 그랜드마더와 그랜드파더의 포격 속에서 이게 왠 개수작이냐고 하고 절규할 때 전율을 느끼지 못한 독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 세계는 완벽하게 작동하고, 독자들은 그 속에서 노닌다. 이것이 바로 실효성을 지니는 판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문제는, 작가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하는 자유/복수 게임이 이 잘 짜여진 판타지 세계의 사람들에게마저도 판타스틱하다는 점에 있다. 이중 판타지는 자살이다. 한국인 독자가 보르헤스를 읽는 것이 그렇듯이.

풀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이영도가 창조한 세계의 인간 중에 자유/복수 게임을 리얼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한마디로, 이영도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영도가 만들어놓은 세계에서마저 물 위의 기름처럼 떠다닌다는 뜻이다. 설령 누군가 한 두 사람이 자유/복수의 개념을 이해했더라도, 그것은 <세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일망정 <세계의> 사건은 아니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만들어놓은 스테이지에 올라온 배우들의 대사를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테이지 자체마저 통괄하여 보는 것이다.

대체 바스톨 엔도 장군에게, 라오코네스가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 '엄청난 아군이 생겼군' 외에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른다는 것도 어색하다. 모른다기 보다는 감을 잡지 못한다는 것이. 이영도의 주제의식을 철저하게 드러내자면 휘리 노이에스를 중심에 둔 전쟁 로망을 자유와 복수의 이중주가 완전히 소화해내야 하는데, 오히려 후자가 전자에 포위되어 있다. 얼핏 보면 느끼지 못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는 드래곤 라자가 더 낫다. 적어도 D/R에서는 주제의식을 논하려는 등장인물들이 독자들이 가장 즐겁게 읽은 등장인물들을 장기말 보듯 하며 판타지 위의 판타지, 옥상옥을 쌓지는 않으니 말이다.

못 읽어낸 혹은 다루지 못한 코드들이 수두룩하지만(예컨데 새벽의 사수), 그래도 이정도면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를 이해함에 있어서 전과 같이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도 폴랩과 마찬가지로 값어치 있는, 즐겁고 유쾌한 실패로 남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바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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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와 넓이 4막 16장 - 해리 포터에서 피버노바(FeverNova)까지
김용석 지음 / 휴머니스트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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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이 매일 놀고 먹고 향락적인 소비 문화를 즐기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취향이 원래 그래서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향락을 즐길 경제적 여유가 마땅치 않은 탓이다. 지금 이건 당연히 내 이야기인데, 그 향락이 술 옷 등이라면 모르겠지만 책도 제대로 사 보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건 정말 슬프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사람 책을 사 봐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수 없을 때, 그 슬픔은 일종의 미안함과 고마움의 이중주로 돌변한다. 한국 학계가 받아주지 않아 출판 인세로 먹고 사는 이의 책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보며(물론 내가 신청해서 들여놓긴 했지만) 미안함을 느끼는게 감정 과잉일까. 그러면서도 나는 이 철학자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목처럼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갖추고 있으면서도, 참 몸에 살갑게 와닿는다. 외국에 그렇게 오래 나가 살았다는 사람이 어떻게 '무중력의 가벼움은 자기 내부에 중력을 모으고 있어야 얻어진다'같은 문장을 터뜨릴 수 있는지, 개나리 진달래 꽃망울 열리는 것 같아 새삼 봄 분위기를 느낀다. 이런 사람이 내 초라한 조국에도 있다. 물론 그의 사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특히 3막에서 그는 과학사회구성론 입장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데, 나는 과학이 '중립적이지는'않지만 그 내부에 '중립적 경향'을 지니고 끝없이 그것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논자들과 다르게 그는 권위적이지 않은 어조로, 다양한 논거를 적절히 들어가며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가 행하는 이른바 '실명비판'은, 나를 학문의 광장으로, 그가 말하는 탈시간적 유크로니아로 이끈다. 퇴계와 고봉 사이의 사단칠정 논쟁을 읽으며 느꼈던 바로 그런 공간, 서음증(書淫症) 환자의 천국이다.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일방적인 '텍스트 마녀사냥'을 벌이는 논자들에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매아리 되어 돌아올지는 미지수이지만,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진전이다. 내 지갑을 열지 못해도 남의 지갑을 열게 하려는 생각에 이런 짓을 하고 있다면, 너무 궁색한 행동일까. 하지만, 세련된 양장본이며 가독성 높게 잘 만져진 편집은 나에게 이 도서관 책을 훔치게 하고픈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게 할 정도이니, 주저없이 선택하시라. 이 사람, 로마에서는 교수였지만 지금은 영락없이 '서민'이고, 현재 '서민적 사유'를 이어나가고 있는 진흙 속의 보석이니까. 그와 그의 책을 꺼내어 닦아 장식하는 것이 우리 책꾼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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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문학입문
윤오영 지음 / 태학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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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은 서로 통한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진리를 관통하면 그 내용은 같다는 선조들의 말씀은 정말 사실인것같다. 바로 이런 생각을, 수필문학입문을 읽으며, 언젠가 읽었던 손자병법을 떠올리며 하게 된다.

손자병법하면 제일 처음 떠오르는 말은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말일 것이다. 헛된 만용 부리지 말고 자신의 실력을 냉정하게 파악한 후 행동해야 패배하지 않는다는, 객기와 만용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경구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치옹도 '삶이 곧 수필'이라고 역설하며,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선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한다. 자신의 개성이 드러나게 마련인 수필에서, 아무리 대상에 대한 묘사가 훌륭하다 해도 글은 자기 삶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까닭이다.

요즘 한겨레21에서 연재되고 있는 바와 같이, 손무는 전쟁 이전에 국력의 신장을 도모하라고 누차에 걸쳐서 가르쳤다. 되지도 않을 상대와 싸움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손무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치옹도 마찬가지다. '흔히 보는 바와 같이 말초적인 감각에서 오는 재치나, 풍세적인 고십에 가까운 촌평류의 글을 쓰기 시작하면 대성은 이미 기대할 수 없다.'며 철저한 학습을 강조한다. 짧은 글보다 긴 글부터, 그리고 풍경 묘사부터 시작하라는 치옹의 가르침은 되새겨볼수록 값지다.

국력의 낭비만큼 손자가 싫어하는 것이 또 있으니 그것은 바로 병사들의 목숨을 낭비하는 것이다. 전시에는 병사일지 몰라도 전쟁이 끝나면 국력의 뒷받침이 될 장정들의 목숨을 헛되이 낭비해서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기에 그는 심지어 적병의 목숨마저 아낄 수 있는대로 아끼라고 한다. 그리고 치옹은 언어를 아끼라고 한다. 쓸데없은 군살들이 더덕더덕 붙어있는 글을 읽을때 느껴지는 그 짜증스러움을 치옹은 가감없이 표출한다. 그럴 공간에 알찬 내용을 하나라도 더 넣어야 독자의 서정을 환기시킬 수 있는 것이다. 흔히들 '만연체'니 어쩌니 하는 염상섭의 글도 실은 허투루 언어를 사용한 적은 없다는 사실은 새로운 충격이다.

비록 이 글이 수필문학입문이라는 제목을 달고있기는 하지만, 그 가르침은 수필문학 뿐 아니라 우리 국문학 전체에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쉽게 쓴 소설과 시가 판치고, 특히 서점 비소설 코너에 가면 신변잡기류의 잡문이 악취를 풍기는 현 세태에, 나 말고 다른 독자 여러분들도 이 책 한번 읽어보시고 참다운 문장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수필에 있어서 백전불패의 길이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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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판타지 단편집 황금판타지문고 1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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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기 스타일의 완성이냐, 아니면 성공한 방식의 답습이냐의 차이를 묻는 것은 문학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예술 장르에서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물음이다. 사실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 중 평생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온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창작자들은 뭔가 일정한 자신만의 창작 틀을 하나씩 짜게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작가의 개성 혹은 성격 등을 연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작가가, 첫 작품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차기작들은 데뷔작보다 대중적으로는 호응을 받지 못했으며, 그 후에 나온 작품에서 초기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면 독자는 그 결과물을 놓고 혹시나 작가가 '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나타내게 된다. 물론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므로 비난이라기보다는 비판이다.이제 이 서평을 읽으시는 분은, 위 두 문단에서 생략된 의미 주어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나는 이영도의 소설 쓰는 방식이 고착화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까지 놓을 수 없었다.

이영도의 소설에는 언어에 남달리 출중한 인물이 거의 반드시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전달하거나 아니면 작가 스스로의 '말빨' 아니면 상상하기도 힘든 언어유희로 독자를 즐겁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드래곤 라자의 후치, 카알, 퓨쳐워커의 파, 폴라리스 랩소디의 율리아나 공주 등이 그 주역이었다. 그것은 분명 이영도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고 이영도의 소설이 아니면 보기 힘든 고난이도의 언어유희를 구사하기 위해서 더 없이 좋은 설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단편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버 더 호라이즌과 오버 더 네뷸러의 서술자인 티르는, 제국의 검술 사범이었다기보다는 수사학 사범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이영도식 화법'에 충실하다. 사실 그게 없으면 소설이 재미없어지는건 사실이지만 인물의 리얼리티는 극히 떨어지게 된다. 소설의 재미를 위해 한 캐릭터의 성격을 죽여야 한다면 그것은 약점 치고는 너무 큰 약점이다. 이런 결함이 실험적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읽었던 단편집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했던 것이 사실이다.

위에서 '이영도식 화법'이라고 서술했지만, 이것은 자기 개성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우선 작가의 재기발랄한 언어 활용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되고, 결정적으로 그런 서술방식은 소설로서의 구성력을 많이 떨어뜨려 궁극적으로는 판타지라는 장르가 떳떳한 소설의 한 분야로 인정받는 것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대중적 지지는 확보한 한국 판타지 문학은, 흔히 말하는 '비평가'들의 지지를 얻어야 비로소 문학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영도식 화법'은 상당한 짐이 된다.

분명 아직 한국 판타지는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탄생에도 이영도가 있었고, 그 진행 과정의 최첨단에도 이영도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영도를 '대가'라고 칭하는 것은 무리이다. 한국 판타지에는 대가를 낳을 만한 넓이와 깊이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넓이와 깊이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 이영도라는 마산 토박이 청년이 그 최 선봉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왕성한 필력으로 작품을 꾸준히 생산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그는 세월이 흐른 후 명실상부한 한국 판타지의 개척자이자 대가로 우뚝 설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다만, 나의 짧은 식견으로 볼 때, 그러기 위해서 그는 언젠가 한번은 '후치의 벽'을 넘어야 한다. 말빨 좋은 등장인물이 토해내는 어지러운 단어의 소나기가 없어도 이영도는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 믿는다. 퓨쳐 워커에서 그것은 상당히 시도되었지만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서 이영도는 그 이상의 실험을 감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는 그의 소설을 사랑해주는 이 많은 독자들에 대한 의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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