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 (반양장) - 제국의 공적 제1호 폴라리스 랩소디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0년 12월
평점 :
품절


자유와 복수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다시 읽는 독자는, 일곱 하이마스터의 자유/복수 게임이 복수로 결정이 났음에도 오스발이 선언하는 바가 자유에 가깝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분명히 오스발은 억지를 부리고 있다. 다른 하이마스터들이 복수를 선택했다면 그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이 세상의 인과응보를 철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트랩이다. 제목의 '실패'는 이것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오스발의 억지는 이렇게 해석된다. 실은 오스발도 자유에 한 표를 던져서 사실상 7인의 게임이 아니라 8인의 게임이고, 인간인 키 드레이번이 이제 그 불가해한 세상과 싸우기 위해(우리의 삶에서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새벽의 안개를 찢으며 드디어 오스발을 죽이러 간다고. 오스발이 다른 하이마스터들에 비해 월등히 강한 것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세상을 복수보다는 자유가 더 구현되는 곳으로 인식함을 의미한다. 중력의 원리와 같은 수많은 복수를 인식하지 못하므로. 그래서 이영도의 자유/복수 게임은 타당하다. 인간은 9번째 결정자, 자유와 복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자이니까. 자유호를 타고 복수검을 휘두르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접어두더라도, 이 소설은 구성상 더 큰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다들 어느 정도 감 잡을 수 있다시피, 거대한 전쟁 로망으로서의 폴랩과 자유/복수에 관한 거대한 우화로서의 폴랩은, 샴쌍둥이처럼 일체이면서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 이질감의 연원을 캐보면, 판타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작품은 훌륭한 판타지 소설이면서, 판타지에 대한 연구 소재로서 훌륭한 실패작이다. 이 말은 결코 욕이 아니다. 오답도 되지 못하는 싸구려 무늬만 판타지가 즐비한 세상이니까.

전쟁 로망으로서의 폴랩은 치밀하고 완벽하다. 서 소팔라가 그랜드마더와 그랜드파더의 포격 속에서 이게 왠 개수작이냐고 하고 절규할 때 전율을 느끼지 못한 독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 세계는 완벽하게 작동하고, 독자들은 그 속에서 노닌다. 이것이 바로 실효성을 지니는 판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문제는, 작가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하는 자유/복수 게임이 이 잘 짜여진 판타지 세계의 사람들에게마저도 판타스틱하다는 점에 있다. 이중 판타지는 자살이다. 한국인 독자가 보르헤스를 읽는 것이 그렇듯이.

풀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이영도가 창조한 세계의 인간 중에 자유/복수 게임을 리얼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한마디로, 이영도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영도가 만들어놓은 세계에서마저 물 위의 기름처럼 떠다닌다는 뜻이다. 설령 누군가 한 두 사람이 자유/복수의 개념을 이해했더라도, 그것은 <세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일망정 <세계의> 사건은 아니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만들어놓은 스테이지에 올라온 배우들의 대사를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테이지 자체마저 통괄하여 보는 것이다.

대체 바스톨 엔도 장군에게, 라오코네스가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 '엄청난 아군이 생겼군' 외에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른다는 것도 어색하다. 모른다기 보다는 감을 잡지 못한다는 것이. 이영도의 주제의식을 철저하게 드러내자면 휘리 노이에스를 중심에 둔 전쟁 로망을 자유와 복수의 이중주가 완전히 소화해내야 하는데, 오히려 후자가 전자에 포위되어 있다. 얼핏 보면 느끼지 못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는 드래곤 라자가 더 낫다. 적어도 D/R에서는 주제의식을 논하려는 등장인물들이 독자들이 가장 즐겁게 읽은 등장인물들을 장기말 보듯 하며 판타지 위의 판타지, 옥상옥을 쌓지는 않으니 말이다.

못 읽어낸 혹은 다루지 못한 코드들이 수두룩하지만(예컨데 새벽의 사수), 그래도 이정도면 이영도의 폴라리스 랩소디를 이해함에 있어서 전과 같이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도 폴랩과 마찬가지로 값어치 있는, 즐겁고 유쾌한 실패로 남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바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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