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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판타지 단편집 ㅣ 황금판타지문고 1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자기 스타일의 완성이냐, 아니면 성공한 방식의 답습이냐의 차이를 묻는 것은 문학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예술 장르에서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물음이다. 사실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 중 평생 새로운 스타일을 찾아 자신의 영토를 확장해 온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창작자들은 뭔가 일정한 자신만의 창작 틀을 하나씩 짜게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작가의 개성 혹은 성격 등을 연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작가가, 첫 작품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차기작들은 데뷔작보다 대중적으로는 호응을 받지 못했으며, 그 후에 나온 작품에서 초기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면 독자는 그 결과물을 놓고 혹시나 작가가 '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나타내게 된다. 물론 작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므로 비난이라기보다는 비판이다.이제 이 서평을 읽으시는 분은, 위 두 문단에서 생략된 의미 주어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나는 이영도의 소설 쓰는 방식이 고착화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까지 놓을 수 없었다.
이영도의 소설에는 언어에 남달리 출중한 인물이 거의 반드시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전달하거나 아니면 작가 스스로의 '말빨' 아니면 상상하기도 힘든 언어유희로 독자를 즐겁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드래곤 라자의 후치, 카알, 퓨쳐워커의 파, 폴라리스 랩소디의 율리아나 공주 등이 그 주역이었다. 그것은 분명 이영도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고 이영도의 소설이 아니면 보기 힘든 고난이도의 언어유희를 구사하기 위해서 더 없이 좋은 설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단편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버 더 호라이즌과 오버 더 네뷸러의 서술자인 티르는, 제국의 검술 사범이었다기보다는 수사학 사범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이영도식 화법'에 충실하다. 사실 그게 없으면 소설이 재미없어지는건 사실이지만 인물의 리얼리티는 극히 떨어지게 된다. 소설의 재미를 위해 한 캐릭터의 성격을 죽여야 한다면 그것은 약점 치고는 너무 큰 약점이다. 이런 결함이 실험적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읽었던 단편집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했던 것이 사실이다.
위에서 '이영도식 화법'이라고 서술했지만, 이것은 자기 개성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우선 작가의 재기발랄한 언어 활용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되고, 결정적으로 그런 서술방식은 소설로서의 구성력을 많이 떨어뜨려 궁극적으로는 판타지라는 장르가 떳떳한 소설의 한 분야로 인정받는 것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대중적 지지는 확보한 한국 판타지 문학은, 흔히 말하는 '비평가'들의 지지를 얻어야 비로소 문학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영도식 화법'은 상당한 짐이 된다.
분명 아직 한국 판타지는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탄생에도 이영도가 있었고, 그 진행 과정의 최첨단에도 이영도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영도를 '대가'라고 칭하는 것은 무리이다. 한국 판타지에는 대가를 낳을 만한 넓이와 깊이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넓이와 깊이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 이영도라는 마산 토박이 청년이 그 최 선봉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도 왕성한 필력으로 작품을 꾸준히 생산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그는 세월이 흐른 후 명실상부한 한국 판타지의 개척자이자 대가로 우뚝 설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다만, 나의 짧은 식견으로 볼 때, 그러기 위해서 그는 언젠가 한번은 '후치의 벽'을 넘어야 한다. 말빨 좋은 등장인물이 토해내는 어지러운 단어의 소나기가 없어도 이영도는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 믿는다. 퓨쳐 워커에서 그것은 상당히 시도되었지만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서 이영도는 그 이상의 실험을 감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는 그의 소설을 사랑해주는 이 많은 독자들에 대한 의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