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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와 넓이 4막 16장 - 해리 포터에서 피버노바(FeverNova)까지
김용석 지음 / 휴머니스트 / 2002년 2월
평점 :
대학생들이 매일 놀고 먹고 향락적인 소비 문화를 즐기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취향이 원래 그래서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향락을 즐길 경제적 여유가 마땅치 않은 탓이다. 지금 이건 당연히 내 이야기인데, 그 향락이 술 옷 등이라면 모르겠지만 책도 제대로 사 보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건 정말 슬프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사람 책을 사 봐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수 없을 때, 그 슬픔은 일종의 미안함과 고마움의 이중주로 돌변한다. 한국 학계가 받아주지 않아 출판 인세로 먹고 사는 이의 책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보며(물론 내가 신청해서 들여놓긴 했지만) 미안함을 느끼는게 감정 과잉일까. 그러면서도 나는 이 철학자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목처럼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갖추고 있으면서도, 참 몸에 살갑게 와닿는다. 외국에 그렇게 오래 나가 살았다는 사람이 어떻게 '무중력의 가벼움은 자기 내부에 중력을 모으고 있어야 얻어진다'같은 문장을 터뜨릴 수 있는지, 개나리 진달래 꽃망울 열리는 것 같아 새삼 봄 분위기를 느낀다. 이런 사람이 내 초라한 조국에도 있다. 물론 그의 사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특히 3막에서 그는 과학사회구성론 입장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데, 나는 과학이 '중립적이지는'않지만 그 내부에 '중립적 경향'을 지니고 끝없이 그것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논자들과 다르게 그는 권위적이지 않은 어조로, 다양한 논거를 적절히 들어가며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가 행하는 이른바 '실명비판'은, 나를 학문의 광장으로, 그가 말하는 탈시간적 유크로니아로 이끈다. 퇴계와 고봉 사이의 사단칠정 논쟁을 읽으며 느꼈던 바로 그런 공간, 서음증(書淫症) 환자의 천국이다.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일방적인 '텍스트 마녀사냥'을 벌이는 논자들에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매아리 되어 돌아올지는 미지수이지만,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진전이다. 내 지갑을 열지 못해도 남의 지갑을 열게 하려는 생각에 이런 짓을 하고 있다면, 너무 궁색한 행동일까. 하지만, 세련된 양장본이며 가독성 높게 잘 만져진 편집은 나에게 이 도서관 책을 훔치게 하고픈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게 할 정도이니, 주저없이 선택하시라. 이 사람, 로마에서는 교수였지만 지금은 영락없이 '서민'이고, 현재 '서민적 사유'를 이어나가고 있는 진흙 속의 보석이니까. 그와 그의 책을 꺼내어 닦아 장식하는 것이 우리 책꾼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