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름에 대한 집착은 비극을 부를지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름에 대한 집착은 비극을 부를지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옌 중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5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환상적 세계

 모옌의 이 저서는 제목대로 모옌 스타일이 잘 살아 있는 중단편 작품들을 모은 선집이다. 모옌 스타일이란 평이하게 흘러갈만한 플롯에 마술적인 요소를 차용하여 자신의 소설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가르킨다. 여기서 마술적인 요소란 단순히 작가의 순수한 상상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중국의 설화, 미신들을 윤색한 것들을 말한다. 그래서 이러한 요소들이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동시에 시대성과 지역성을 보여주는 효과를 가져온다.


2. 이야기의 쫄깃함

 앞서 밝힌 모옌 소설들의 특징은 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트레이드 마크이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를 하나의 파라노마로 능히 엮어내는 기초는 그의 뛰어난 언변에 있다. 인물의 감정이나 사건의 환경을 모조리 이끌면서도 어색한 부분 없이 잘 표현했다. 특히 그의 이야기는 일반 독자가 예상하기 어려운 변칙적인 부분이 많아 항상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비교적 분량이 짧은 중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에서 더 잘 드러난다.


3. 현대인의 안식처로서 소설 문학

 철없는 어릴 때에는 막연히 분량이 짧고 술술 읽히는 중단편 소설을 제멋대로 폄하하는 일이 잦았다. 웹툰 볼 수 있는 5분의 자투리 시간조차 내기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위의 망상은 공허한 것이다. 대중교통에서 문학 책 읽기를 즐기는 독자에게 호흡이 짧고 순간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중단편 소설은 두 팔 벌려 환영할만한 책이다. 게다가 모옌처럼 탁월한 이야기꾼이 내놓은 책이라면 두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필자 역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도중 읽어서인지 '창안대로 위의 나귀 타는 미인'을 가장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있다. 딱히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분들에게도 추천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철학의 정원 19
박찬국 지음 / 그린비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 가운데에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공간)에 대하여 생각하던 철학자이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시간을 사유하는 철학자이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와 같은 유명한 격언을 남긴 것도 바로 그이다. 엘레아학파에 의해서 두 철학자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여겨졌다. 이것을 해소하고자 시도했던 두 인물이 있으니 바로 헤겔과 하이데거이다. 이 중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논해보자. 하이데거는 자신의 전기 철학의 대표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바로 이러한 시도를 한다. 존재와 시간은 비록 미완성작(후에 다른 저서에서 부족한 부분을 이래저래 보충하긴 한다)이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가장 심도있게 고민한 저서로 꼽힌다.


2.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는 한국 학계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철학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발간된 번역서나 연구서의 수만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쇼펜하우어만 보더라도 그의 대표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상당히 최근에 번역되었음을 볼 때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물론 단순히 인기 하나로만 이런 현상의 원인을 환원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박찬국을 비롯한 뛰어난 하이데거 연구자들의 노고에서 비롯되는 부분을 축소 해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의 생각이든 그렇지 않겠냐만은 이런 좋은 현상에도 불구하고 흔히 하이데거의 철학은 매우 어렵다고 간주된다. 번역어 자체가 한자로 만들어진 용어가 많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고민하지 않은 두 주제인 존재와 시간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박찬국의 이 강독이 없었더라면 하이데거에 대해서 영영 거리를 두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3. 존재

 하이데거는 가장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인간 A은 자신의 존재 혹은 다른 사물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곤 한다. 특히 인간에게 이따금씩 찾아오는 불안감(sorge)은 이런 물음을 가지도록 종용한다. 데카르트만 보더라도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지 않았나? 하이데거는 존재를 나타내는 존재자는 세계-안에 있는-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존재를 나타내는 존재자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자 즉, 앞의 인간 A가 된다.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는 오직 인간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구분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어진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인 동시에 세계를 구현하는 존재자이다.


4. 시간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이런 존재 물음을 가지지 못한 채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망각하며 살아간다. 이들에게 시간은 지금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를 자신이 나타내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에게 죽음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다. 때때로 우리는 외부적인 원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데 이것이 흔히 일컫는 자명하다고 믿었던 존재를 잃어버렸다(=실존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병마를 비롯한 각종 인생의 무상을 경험하게 만드는 시련을 가리킨다. 박찬국은 하이데거가 해석하는 이런 현상에 대해 잘 서술한 소설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존재를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가? 그런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자기 자신이 밝히고 있기 때문에 생과 죽음을 포함한 삶의 모든 것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즉,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마저 이미 선행한 것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현실에 대해 온 몸을 던지며 살아간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시간 이해는 얼핏 현대 물리학에서의 시간 설명과 흡사해보인다. 물론 하이데거의 시간 이해에서 과거와 미래는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을 말하는 전적으로 인간적인(Personal) 시간 이해이다.


5. 죽어감, 태어남, 살아냄

 하이데거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만큼 충분히 늙었다고 언급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필립 로스가 말하는 노년은 대학살이라는 절망적인 한탄을 완전히 머릿 속에서 지워버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죽어감은 분명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이데거 역시 이를 부정하기 위해 앞의 말을 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죽어감은 태어남은 하나이다. 생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으로 서로 함께한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를 모두 품고 담담히 살아내는 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oonjungil94 2019-03-24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하여 고민하던 중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뤼미에르 2019-03-24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셨다니 저도 뿌듯하네요.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랍니다.

뤼미에르 2019-03-24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박찬국 교수님의 강의가 궁금하시다면 네이버 열린 연단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삶의 중요한 문제에 관해 깊이 사유한다는 것은 다시 그 문제에 대해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그가 그런 사유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켰는지에 있다. 그 변화가 없다면 그가 늘어놓은 말은 그냥 말에 그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치유의 행위로 보았다. 철학자는 영혼의 의사이고, 박사를 의미하는 약어 Ph. D.의 원래 의미도 철학 의사(doctor of philosophy)이다.


 우리 시대에도 철학자와 박사는 넘쳐난다. 그러나 자신의 병도 치유하지 못하는 그들이 남의 병은 어떻게 고치고 세상의병은 또 어떻게 고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는 직업인, 전문인일 뿐이다. 시대는 더욱 궁핍해가고 사람의 마음은 중병으로 고사 직전인데 그에 비례해 그럴싸한 말은 더욱 세련된 형태로 범람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시대의 이러한 왜곡에 절망했다. 철학이 치유는커녕 오히려 병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병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들어보자.


 

 한 시대의 병은 사람의 삶의 양식이 변화함으로써 치료된다. 그리고 철학의 문제라는 병에 대한 치료는 한 개인이 발명한 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유와 삶의 양식이 변화함으로써만 가능했다.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여기서 한 개인이 발명한 약은 학자들이 만들어낸 이론으로 새길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추구한 것은 그러한 약의 발명이 아니라 사유와 삶의 양식의 변화였다. 그리고 사유와 삶의 양식의 변화는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유가 삶의 양식의 변화를 일으키고 삶의 양식이 사유의 변화를 일으킨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신념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하고 실험했다. 백만장자의 아들이었지만 상속받은 재산을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익명으로 모두 나눠주고 시골학교의 교사, 정원사, 건축가, 잡역부로 일했으며 노르웨이의 피오르 계곡 벼랑에 스스로 오두막을 짓고 칩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재벌 2세의 무한 도전쯤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 변화와 구원에 진정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탈장으로 징집이 면제된 상태였지만 1차 대전에 자원해 최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곳을 전전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쟁터의 엄습하는 죽음 앞에서 그는 '논리-철학논고'라는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논리-철학논고'는 직관적 사유의 산물이다. 분석철학의 성경으로 꼽히고 있지만 정작 어떠한 분석철학적 논증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범람하는 말들의 질서와 한계를 확정하고 이를 통해 보이지는 세계를 아주 명징하고도 함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책의 말미에는 이 책의 말들도 무의미하며 사다리일 뿐이므로 사다리를 오른 사람은 이를 차버리라고 권고한다. 어떻게 무의미한 말이 사다리의 용도로 기능할 수 있는가?


 의미 있는 말들은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돈 버는 노하우를 알려주기도 하며 이를 매뉴얼 삼아 쓸모 있는 무언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철학은 혹은 인문학은 그런 말들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각성과 비약을 위한 가혹한 통과 의례, 성인식, 피를 부르는 희생제 같은 것이다. 자신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혼란과 파국을 체험하고 거기서 이를 극복할 자신만의 길을 새로 열어 가면서 사람은 철이 드는 것이다. 철학은 얼을 버리는 담금질이요 혼이 거듭나는 굿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불안정한 성격으로 괴로워하는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삶을 살아간 선구자이다. 그 치열성의 정체는 그의 내면에서 솟구쳐 나오는 삶에 대한 부단한 탐구 정신과 강렬한 도덕의식이다. 그의 도덕의식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윤동주의 도덕 의식과 닮아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삶과 작품은 윤동주의 '참회록'을 닮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문화와 가치). 그는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그 무게를 벗어 던지려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청년 시절, 그의 일기와 편지를 뒤덮고 있는 자살이라는 화두에 거기에 배어 있는 번뇌의 무게는 그의 반성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가슴 시리게 증언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작품들은 현대 철학의 텍스트이기 전에 그 자신에 대한 '참회록'으로 읽힌다.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철학의 특징은 청빈주의로 요약될 수 있다. '논리-철학논고' 한 권으로 일찍이 세계적 철학자로 발돋움했지만, 그는 그것이 가져올 모든 세속의 며예와 권력을 거절했다. 그는 철학자들이 빠져들기 쉬운 난삽한 용어 사용과 사변의 유희를 거부했다. 대표작 '철학적 탐구'에 어떤 현란한 형이상학이나 이렇다 할 세련된 테제가 없다는 사실도 그가 지켜온 청빈주의 정신에서 연유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제도권의 글쓰기인 학술적 저서나 논문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평생을 써 내려간 일기와 노트에서 편집된 것이다. 그것은 자신과의 투쟁의 기록이다. 마지막 일기는 암으로 임종을 맞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가 놀라운 정신력으로 견고한 사색과 탐구를 실천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