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만으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작가(감독)의 스타일만으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달콤한 인생>이 그렇다. 왜 강 사장이 선우를 죽이려 했는지, 그런 강 사장에게 선우는 왜 복수하려 하는지, 희수는 선우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강 사장은 선우를 죽이려 했고, 선우는 복수를 하려 했으며, 희수가 선우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둘은 그저 더이상 만날 수 없을 뿐이다.

   "왜 그렇지 되는지 관객들은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없다" 라는 식으로 타란티노가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는데, 하드보일드, 느와르 장르에서 종종 나타나는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의 비논리성, 감독의 불친절함 등은 (밑도 끝도 없이) 잔인한 화면과 (무뚝뚝한 해결사와 같은) 남성성을 조성하는 일종의 장치로 기능한다.

   <수>는 기존 하드보일드의 불친절함을 충실히 계승한 영화다. 동생을 왜 19년 간 만나지 못했는지, 동생이 왜 살해되었는지, 어떻게 수는 해결사가 되었는지 등 영화 속에는 그들의 역사가 깡그리 블랙박스 안에 담겨 있다. 그리고 개연성 없는 스토리, 극단적인 인물 설정 등으로 도무지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캐릭터들이 스크린을 뛰어다닌다. 이러한 것들이 한데 얽혀 스토리는 죽고 분위기만 남았다. 헌데, 이 분위기가 '스타일'이라기 보다 감독의 고집으로 읽혀지는 건 왜일까.

 p.s. 아무리 하드보일드라지만, 주인공을 좀비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굶주림 - 개정판
크누트 함순 지음, 우종길 옮김 / 창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노르웨이의 수도 크리스티아나, 주인공은 미친 듯이 먹을 것을 찾아 길거리를 헤맨다. 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 없고, 입을 만한 옷가지는 이미 전당포에 맡겨 버린지 오래다. 그라는 존재 전체를 비틀어 쥐어짜봤자 나오는 것은 어쩌면, 꼬르륵 하는 우스운 소리뿐일 지도 모른다. 빵집의 신선한 빵들을 곁눈질하며 그는 군침을 다신다. 만성적인 배고픔 때문인지 그에게는 이미 손가락을 우두둑 하고 꺾는 버릇까지 생겼다. 배가 고플 때면 그는 거리의 행인들에게, 또는 벤치의 늙은 노인에게, 길가의 꼬마에게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고 그들을 괴롭힌다.

  늘 배가 고픈 그는 '가끔' 돈을 구하기도 한다.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푸짐한 음식을 게걸스레 먹고 난 후, 그러나 그는 먹었던 모든 것을 게워낸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마치 굶주림이 운명인 양, 그는 먹은 것들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식욕이 왕성해질수록, 그가 굶주려 있을수록 더욱 심해진다. 그는 토해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걷는 동안 내내, 어두운 구석을 지나칠 때마다 입 속을 배워냈다. 다시금 나를 파고드는 구토감을 가라앉히려고 몸부림을 쳤다. 두 주먹을 꽉 쥐고서 몸을 긴장시켰다. 발로 길바닥을 차기도 하고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미친 듯이 도로 삼켜댔다...... 소용이 없었다!"

  남들 같으면 거리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구걸이라도 하련만, 한 줌도 안 되는 고결한 자존심은 그에게 구걸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큰 맘 먹고 구걸을 하려다 오히려 가지고 있던 이발권을 건네주기도 하고, 점원의 실수로 재수 좋게 얻은 잔돈은 길거리의 과자 파는 노파에게 줘버린다. 그리고는 오만함과 허세에 휩싸여 스스로를 대견스레 여기는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내 스스로의 양심 앞에 다시 일어선 것이다. 나처럼 하시오! 하고 나는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광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처럼만 하시오!"

  그가 밥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을 쓰는 것이다. 배고픔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글을 쓰는 것.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밥벌이할 글을 써내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다. 그의 원고는 빈번히 편집장에게 퇴짜 맞기 일쑤고, 그는 좌절에 너무도 익숙해졌다. 폴 오스터처럼, 마치 파이프를 입에 물고 안락의자에 기대앉은 것처럼 느긋하게,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빵 굽는 타자기> 中) 하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그에겐 없다. 눈앞의 배고픔에 급급하여, 빵 한 조각이라도 목구멍에 쑤셔넣을 요량으로 그는 글을 쓴다. 그러나 그의 글은 너무 늦게, 혹은 너무 빠르게 완성되기 마련이다.

  그에게도 사랑은 있다. 길거리에서 치근덕대던 여인이 제게 관심을 표하자 그는 좋아서 날아갈 지경이다. 그러나 그의 착란적인 정신상태가 술이 취해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배고픔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여인의 로맨스는 곧 그에 대한 공포와 동정으로 탈바꿈한다. 주인공은 묻는다. "제가 취했었더라면 더 좋았겠습니까?" "예... 아, 당신이 무서워요! 맙소사, 저를 놓아주시지 않겠..."

  배고픔은 한 개인 내부의 무지막지한 소동이다. 한 사람이 배고픔으로 고통 받고 신음하며 쓰러질 때, 그의 전존재가 갈구하는 빵 한 조각은 그 상황 속에 있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 전혀 무의미하다. 즉, 그의 고통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굶주림, 아름다운 글에의 열망에 대해 타인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응대한다. ('가위'를 보라)  따라서 주인공은 좀비처럼 새벽부터 새벽까지 거리를 거닐며 자신의 내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이때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은 사회로 전이되어, 작품 속에서는 감시의 형태를 띤다. 작품에는 수많은 경찰관, 순경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의 얼굴처럼 똑같은 존재들로서 주인공이 이상한 행동을 할 때마다 멀리를 그를 지켜보거나 사건에 개입하여 주인공을 저지하고 억누른다.

  배가 고프되 구토증 때문에 먹을 수 없고, 글을 쓰고 싶지만 영감에 떠오르질 않아 글을 쓸 수 없고, 비천해지고 싶지만 사우론의 눈처럼 거대한 자의식 때문에 그는 거지조차 될 수 없다. 굶주림에 제 살을 뜯어먹지만 그로 인해 더욱 배고파지는 어느 신화의 인물처럼 그는 그렇게 거리를 영원히 떠돌 수밖에 없는 시지프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형수 최후의 날
빅토르 위고 지음, 한택수 옮김 / 궁리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어두운 방 한가운데, 한 남자가 앉아 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면의 벽 때문에 빛은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사형수이다. 그의 죽음은 이미 누군가의 의해 결정되었고 그로서는 자신의 죽음을 늦출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저 멍하니 앉아 제 죄를 곱씹어 보고 사회에 분노하고 절망하며, 눈앞에서 그와는 관계없이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을 잠자코 보고 있다. 꾸준히 아무 말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그에게 어떠한 감성도 제공하지 않는다.

  공포와 두려움, 극심한 절망감으로 그의 가슴은 오그라든다. 세상의 어떤 말보도 단호한, '당신은 곧 죽게 되어있다'라는 말.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기 마련이라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그러한 폭력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분명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늙은 어머님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순네 살이시니 충격으로 돌아가실 것이고, 며칠을 더 사신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발 데우개에 따뜻한 재만 담겨 있으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 역시 신경 쓰지 않는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고 신경쇠양증에 걸려 있다. 그녀 역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아무 생각 없이 노래하며 놀고 있을 내 딸아이, 내 아기, 불쌍한 마리, 그 아이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위 대목은 사형이라는 제도가 한 개인의 죽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 가정의 공황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임을 암시한다.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어머니와 아내의 죽음을, 딸의 비참한 미래를 처연하게 예언하는 대목은 슬픔을 넘어선 분노를 느끼게 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들이 그의 목을 자를 때 그에게만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아버지, 그의 어머니, 그의 아이들은 그 칼질로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를 죽이면서 당신들은 온 가족의 목을 베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당신들은 무고한 사람들의 목을 자르는 것이다."

  위고는 사형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첫째, 공동체에 이미 해악을 끼쳤거나 향후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영원히 격리하는 것,  둘째, 죄인에 대한 사회의 복수와 벌, 셋째, 일벌백계 즉 범죄자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모방하고자 하는 이들을 교화하는 것. 이에 위고는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사형 대신 종신형으로 평생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면 될 것이고, 복수는 개인의 일, 벌은 신의 일이므로 사회가 관여해서는 안 되며, 일벌백계는 오히려 민중의 타락을 부추길 것이라고 경고한다.

  한 남자가 자신의 예정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몸부림칠 때, 그의 주위에는 타락한 간수, 무덤덤한 신부, 그의 죽음을 열망하며 교수형을 즐거이 기다리는 시민들이 있다. "이 모든 목소리들, 창과 문, 가게의 철책 그리고 가로등 기둥에 모여 있는 머리들, 탐욕스럽고 잔인한 구경꾼들, 그들은 모두 나를 알지만 나는 하나도 모르는 군중, 인간의 얼굴로 바닥을 깔고 벽을 친 도로...... 나는 취한 듯 감각을 잃고 멍청하게 있었다."

  당신 하나만 없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 사회의 실패와 모순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한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아집, 이 모든 건 환상이 아닐 수 없다. 사형은 엄연히 사회 전체의 살인이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부정하고 반대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힌 살인자와 하등 다를 바 없게 된다. 바로 마이너스 1이라는 사회의 한 일원으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삼각 구도로 진행된다. 지나이다를 욕망하는 주인공, 아버지를 욕망하는 지나이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무관심하고 냉랭한 아버지. 주인공은 어느 날 집 근처에서 지나이다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백작, 의사, 시인, 경기병 등 그녀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모여있고, 그들은 언제나 그녀를 숭앙하고 찬미할 준비가 되어 있다.

  주인공은 미성숙했다는 이유로 '여왕의 시동'이라는 특권을 받게 된다. 이처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주인공은, 역으로 다른 의미에서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사랑하고 있는 주체이면서도 주변의 정세를 관찰할 수 있는 목격자로 작품 속에 자리잡는다. 어린애로 취급 받는 처지에 항변이라도 하듯, 주인공은 지나이다를 위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거나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용감하고 귀여운 소년이라는 그녀의 의례적인 칭찬밖에 없다.

  한 여성에 대한 미칠 듯한 열정, 동경과 현실 속 번뇌는 그를 소년에서 남자로 차츰 변모시킨다. 한 소년이 사회화 되는 것은 이처럼, 사회 속 일정 지위를 갖고 있는 대상으로부터의 실패 또는 미끄러짐을 경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이다는 욕망의 주인이다. 그녀의 주위를 행성처럼, 지겹고도 영원히 맴돌 그녀의 추종자들은 욕망의 노예들이다. 그러나 지나이다는 욕망의 거짓 주인으로 읽힐 수 있는데, 그녀는 욕망의 주인인 채 행세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지배해줄 어떤 남성이 나타나지 않는 한에서만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한 남성은 곧 주인공의 아버지이다. 냉정하고, 지적이고, 말을 잘 타는 주인공의 아버지는 그녀를 순식간에 매혹하고 그녀를 발작과 신병의 상태로 이끈다. 그녀는 아버지를 욕망하고 기다림으로써, 또 그런 모습을 주인공에게 보임으로써 주인공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욕망하도록 중개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욕망의 거짓 주인 또는 중개자로 기능한다.

  자신이 숭배하는 한 여성이 자신이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아버지를 욕망하라고 명령할 때 주인공은 말 그대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현상에 대한 인식을 중단하고 공포스러운 욕망의 실재에 무심한 척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인공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시간은 이상한 열병에 걸렸던 시기였다. 지극히 격렬한 모순된 감정과 상념, 의혹과 기쁨, 희망과 고통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친 혼돈의 시기였다. 만약 열여섯 살짜리 소년이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나는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 두려웠다."

  작품 말미에서의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죽음은 소년이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것, 더이상 세상은 그에게 욕망의 대상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하다. 이러한 점에서 작품 속 의사인 루신의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가는 세상 모든 소년들에게 던지는 정언명제처럼 다가온다.

  "인간은 자기 두 발로 서야 한다오. 설령 파도가 치는 바위 위에 서 있다 할지라도 말이오...... 문제는 적당한 때에 단념하고 그물을 찢고 나오지 못했다는 데 있지. 그래도 자네는 잘 헤쳐 나왔지. 다시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럼 이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책세상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은 아들을 흐느끼며 부른다. 파벨, 파벨, 파벨. 주술사가 되어 저승의 아들을 소환하는 그의 목소리는 낮은 목소리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약간 갈라진 쉰 목소리? 또는 가늘고 긴 목소리였을까?

  죽은 아들과 만나기 위해 하숙집 주인 여자와 섹스하고, 죽은 아들과 만나기 위해 네차예프와 설전을 벌이며, 죽은 아들과 만나기 위해 모험에 뛰어든다. 또, 죽은 아들을 통해 페트라셰프스키를 추억하고, 죽은 아들을 통해 아버지-아들 간 근원적인 갈등이 바로 혁명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죽은 아들로 인해 그는 젊음을 다시 얻고 글을 쓰게 된다.

  작품 도처에 널린, 넋두리 섞인 죽은 아들에 대한 갈구의 목소리 - 파벨, 파벨, 파벨. 이쯤 되면 거의 공포에 가깝다. 한 장(章)에 파벨이라는 단어가 도대체 몇 번이나 나오는지 세어보고 싶을 정도. '쿳시 개인의' 도스토예프스키도 좋겠지만, '기록된' 도스토예프스키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사실 러시아 지식인들을 괴롭혀온 병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며, 상황은 벨린스키나 크라예프스키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복음의 전도사 루카가 말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한테도 그와 똑같은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악령들이 러시아인의 몸에서 빠져나와 돼지 떼의 몸 속으로, 즉 네차예프들과 세르노-솔로비예비치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익사했거나 분명히 익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몸 속에서 악령들이 빠져나간 후, 완치된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러시아는 자신을 중독시켰던 더러운 것을 토해냈고, 물론 이 더러운 구토물에는 러시아적인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중략)...... 말하자면 이게 바로 내 소설의 주제입니다. 그 소설 제목은 <악령>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이코프에게 보내는 편지 中, <도스토예프스키>, 콘스탄틴 모출스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