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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최후의 날
빅토르 위고 지음, 한택수 옮김 / 궁리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어두운 방 한가운데, 한 남자가 앉아 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면의 벽 때문에 빛은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사형수이다. 그의 죽음은 이미 누군가의 의해 결정되었고 그로서는 자신의 죽음을 늦출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저 멍하니 앉아 제 죄를 곱씹어 보고 사회에 분노하고 절망하며, 눈앞에서 그와는 관계없이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을 잠자코 보고 있다. 꾸준히 아무 말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그에게 어떠한 감성도 제공하지 않는다.
공포와 두려움, 극심한 절망감으로 그의 가슴은 오그라든다. 세상의 어떤 말보도 단호한, '당신은 곧 죽게 되어있다'라는 말.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기 마련이라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그러한 폭력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분명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늙은 어머님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순네 살이시니 충격으로 돌아가실 것이고, 며칠을 더 사신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발 데우개에 따뜻한 재만 담겨 있으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 역시 신경 쓰지 않는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고 신경쇠양증에 걸려 있다. 그녀 역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아무 생각 없이 노래하며 놀고 있을 내 딸아이, 내 아기, 불쌍한 마리, 그 아이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위 대목은 사형이라는 제도가 한 개인의 죽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 가정의 공황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임을 암시한다.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어머니와 아내의 죽음을, 딸의 비참한 미래를 처연하게 예언하는 대목은 슬픔을 넘어선 분노를 느끼게 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들이 그의 목을 자를 때 그에게만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아버지, 그의 어머니, 그의 아이들은 그 칼질로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를 죽이면서 당신들은 온 가족의 목을 베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당신들은 무고한 사람들의 목을 자르는 것이다."
위고는 사형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첫째, 공동체에 이미 해악을 끼쳤거나 향후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영원히 격리하는 것, 둘째, 죄인에 대한 사회의 복수와 벌, 셋째, 일벌백계 즉 범죄자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모방하고자 하는 이들을 교화하는 것. 이에 위고는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사형 대신 종신형으로 평생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면 될 것이고, 복수는 개인의 일, 벌은 신의 일이므로 사회가 관여해서는 안 되며, 일벌백계는 오히려 민중의 타락을 부추길 것이라고 경고한다.
한 남자가 자신의 예정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몸부림칠 때, 그의 주위에는 타락한 간수, 무덤덤한 신부, 그의 죽음을 열망하며 교수형을 즐거이 기다리는 시민들이 있다. "이 모든 목소리들, 창과 문, 가게의 철책 그리고 가로등 기둥에 모여 있는 머리들, 탐욕스럽고 잔인한 구경꾼들, 그들은 모두 나를 알지만 나는 하나도 모르는 군중, 인간의 얼굴로 바닥을 깔고 벽을 친 도로...... 나는 취한 듯 감각을 잃고 멍청하게 있었다."
당신 하나만 없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 사회의 실패와 모순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한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아집, 이 모든 건 환상이 아닐 수 없다. 사형은 엄연히 사회 전체의 살인이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부정하고 반대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힌 살인자와 하등 다를 바 없게 된다. 바로 마이너스 1이라는 사회의 한 일원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