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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영광 사이에서 - 토마스 만과 동성애
장성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5월
평점 :
품절
토마스 만은 동성애적 취향을 가진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생전의 토마스 만은 국민작가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사회의 평판을 의식하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동성애를 철저히 감추고 살았다. 그는 남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고립감을 맛보았고, 이는 그의 작중 인물에 투영되었다. 이 책은 그런 토마스 만의 작품들, 일기를 뒤적이며, 그의 작품을 동성애적 시각에서 이해해 줄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요컨대 토니오 크뢰커 같은 인물이 사회에 대해 갖는 소외감은 (잘 알려진 것처럼) 예술과 사회의 갈등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동성애적 취향이 빚어낸 자기연민적 고립감이라는 얘기다.
"'예술과 삶의 대립'이 피상적 주제일 뿐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토마스 만 자신의 경우에 별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토마스 만은 '예술가로서' 뮌헨의 최상류 집안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여 시민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히고 노벨상을 받았으며, 그의 80회 생일 축하 행사들은 토마스 만 자신의 말대로 "거의 또는 결코 아무도 아직 그렇게까지 축하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가 고독하고 삶에서 제외당한 것처럼 느꼈다면, 그것은 자신의 동성애적 욕망이 사회적으로 적합한 방식으로 충족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음이 틀림없다."
토마스 만의 동성애는 (성적) 욕구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쾌락에 중심을 두고 있다. 본문에서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예로 들며 설명하는 바, "타치오와 아셴바흐의 관계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시각적 만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타치오를 사랑하게 됨에 따라 아셴바흐는 "주시하는 자," "바라보는 자 "가 되며, 아셴바흐와 타치오의 무언의 감정 교류는 시선 교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아셴바흐는 해변에서 매일 타치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타치오가 지나가면 때로는 눈을 들어 쳐다본다."
그러므로 그가 한평생 남성과 성교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저자의 추측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 어쩌면 시선은 행위보다 은밀하고, 자극적이며, 열정적일 수 있으므로.
토마스 만이 보기에 동성애는 자유, 어두움, 죽음, 타락 등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고, (즉 디오니소스적이고) 이성애는 구속, 삶, 밝음, 건강함, 즉 아폴로적인 영역에 있다. 이 극심한 대립, 빛과 어둠이라는 모순되고 상반된 현실이 그로 하여금 예술가적 기질을 발휘하게 만들었으리라. 그는 밝음의 영역에서 어둠을 동경한다. 행복해 보이는 그는 기실, 행복하지 않다. 따라서 그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글로 풀어내 안식을 얻는다.
변신의 귀재 프로테우스처럼 그는 제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바꾼다. 늙은 작가, 고독한 작곡가, 병에 걸린 환자, 중년의 부인까지 그는 자유자재로 변신하며 뭇 남성들을 유혹하거나 욕망한다. "<펠릭스 크룰>에서 토마스 만은 자신의 동성애적 욕구를 소설 속에서나마 충족된 것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여자 - 즉 우플레 부인 - 로 변화시켜야 했다." 변신한 그는 이야기를 이끌며, 그가 실제로 사랑했던 클라우스, 파울, 빌리, 아르민, 프란츠 등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은 작품 속에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들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가면을 쓴다. 예컨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는 아셴바흐가 타치오에 대해 갖는 감정은 명백하게 동성애적이라는 사실은 작품 표면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자신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감각성과 도덕성의 균형을 추구'했다고 밝힘으로써, 가면 뒤에 숨어 좀체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평생 동성애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그는,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일기를 공개해 줄 것을 유언한다. 과연 토마스 만은 얼굴에 달라붙어 갑갑했던 가면을 던져버리고 일기를 통해 자신의 취향을 고백함으로써 죽어서나마 안식을 얻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