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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돌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지음, 김경태 옮김 / 삶과꿈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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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한 가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혹은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 <무어의 마지막 한숨> . 어둡고 침침한 그들의 역사를 들춰볼 때마다 안에서 아주 오래된 우울과 권태, 익숙해진 슬픔을 발견하곤 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문은 대개 한때의 영화를 누리다 (천천히) 몰락해버리는 것이 보통인데, 서술자는 집안의 과거를 두려워 하면서도 동경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반 부닌의 <수호돌> 몰락한 가문의 하녀를 통해 내력을 전해 듣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는 바위 따위로 이해될 법한 '수호돌' 러시아어로 '마른 골짜기'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한때 주인을 사랑했던 꽃다운 나이의 하녀 나딸리아는 쭈글쭈글하고 가무잡잡한 얼굴의 노파가 되어 주인공인 화자에게 가문의 지난 날들을 조용히 들려준다.

  '몸집은 보기 흉할 정도로 거대했지만 하인들 중에서 제일 눈에 띄었고 영리'한 게르바시까는 수호돌의 주인들에게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힘과 명민함이 주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까닭으로 그는 자신에게 명령하는 주인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게르바시까는 화자의 아버지 (아르까지 삐뜨로비치)를 괴롭히기도 하고, 새 주인인 뾰뜨르 삐드로비치에게 노골적으로 반항하기도 했다. 결국 게르바시까는 정신이 좀 이상한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도주했다. 화자인 나딸리아는 제대한 뾰뜨르 삐드로비치를 연모하여 그의 거울을 훔치다가 뾰뜨르에게 발각되어 다른 지방으로 보내지는 벌을 받았다. 이러한 '수호돌'에서의 주인과 하인 사이의 갈등과 번민은 하녀인 나딸리아의 입을 통해 전승된다.

  "우리는 성자 메르꾸리이가 따따르에게 함락된 스몰렌스끄 지방을 구하라는 성녀 아지기뜨리야-뿌지바지쨀리니짜 이콘의 부르심을 받은 존귀한 사람으로, 한 여인의 남편이었다고 들었다. 성자 메르꾸리이가 따따르들을 쳐부수고 잠이 들었는데, 적들이 그만 그가 잠든 사이에 머리를 뎅강 잘라버렸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잘린 머리를 두 손에 받쳐들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아뢰기 위해 성문 앞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한 손에는 투구를 쓴 채 죽어서 새파란 머리를, 다른 한 손에는 뿌지바지쨀리니짜의 이콘을 들고 있는 이 그림은" 물론, 많은 것들을 상징하고 있겠지만,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던 러시아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잘린 머리를 귀족(지주)들이라 가정하면, 그 머리를 들고 걸어가는 메르꾸리이의 몸은 농노(하인)라 보는 식으로 말이다.

  한 번 언급된 이야기가 여러 번 다시 묘사된다. 앞서 언급되었던 정보는 후반부로 가면서 순서와 상황에 맞게 정렬된다. 마치 변주곡처럼 (또는 재즈처럼)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여러 번 서술하는 기법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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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영광 사이에서 - 토마스 만과 동성애
장성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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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만은 동성애적 취향을 가진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생전의 토마스 만은 국민작가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사회의 평판을 의식하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동성애를 철저히 감추고 살았다. 그는 남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고립감을 맛보았고, 이는 그의 작중 인물에 투영되었다. 이 책은 그런 토마스 만의 작품들, 일기를 뒤적이며, 그의 작품을 동성애적 시각에서 이해해 줄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요컨대 토니오 크뢰커 같은 인물이 사회에 대해 갖는 소외감은 (잘 알려진 것처럼) 예술과 사회의 갈등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동성애적 취향이 빚어낸 자기연민적 고립감이라는 얘기다.

"'예술과 삶의 대립'이 피상적 주제일 뿐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토마스 만 자신의 경우에 별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토마스 만은 '예술가로서' 뮌헨의 최상류 집안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여 시민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히고 노벨상을 받았으며, 그의 80회 생일 축하 행사들은 토마스 만 자신의 말대로 "거의 또는 결코 아무도 아직 그렇게까지 축하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가 고독하고 삶에서 제외당한 것처럼 느꼈다면, 그것은 자신의 동성애적 욕망이 사회적으로 적합한 방식으로 충족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음이 틀림없다."

   토마스 만의 동성애는 (성적) 욕구의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쾌락에 중심을 두고 있다. 본문에서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예로 들며 설명하는 바, "타치오와 아셴바흐의 관계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시각적 만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타치오를 사랑하게 됨에 따라 아셴바흐는 "주시하는 자," "바라보는 자 "가 되며, 아셴바흐와 타치오의 무언의 감정 교류는 시선 교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아셴바흐는 해변에서 매일 타치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타치오가 지나가면 때로는 눈을 들어 쳐다본다."

  그러므로 그가 한평생 남성과 성교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저자의 추측은 어느 정도 정당하다. 어쩌면 시선은 행위보다 은밀하고, 자극적이며, 열정적일 수 있으므로.

  토마스 만이 보기에 동성애는 자유, 어두움, 죽음, 타락 등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고, (즉 디오니소스적이고) 이성애는 구속, 삶, 밝음, 건강함, 즉 아폴로적인 영역에 있다. 이 극심한 대립, 빛과 어둠이라는 모순되고 상반된 현실이 그로 하여금 예술가적 기질을 발휘하게 만들었으리라. 그는 밝음의 영역에서 어둠을 동경한다. 행복해 보이는 그는 기실, 행복하지 않다. 따라서 그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글로 풀어내 안식을 얻는다. 

  변신의 귀재 프로테우스처럼 그는 제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바꾼다. 늙은 작가, 고독한 작곡가, 병에 걸린 환자, 중년의 부인까지 그는 자유자재로 변신하며 뭇 남성들을 유혹하거나 욕망한다. "<펠릭스 크룰>에서 토마스 만은 자신의 동성애적 욕구를 소설 속에서나마 충족된 것으로 묘사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여자 - 즉 우플레 부인 - 로 변화시켜야 했다." 변신한 그는 이야기를 이끌며, 그가 실제로 사랑했던 클라우스, 파울, 빌리, 아르민, 프란츠 등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은 작품 속에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들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가면을 쓴다. 예컨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는 아셴바흐가 타치오에 대해 갖는 감정은 명백하게 동성애적이라는 사실은 작품 표면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자신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감각성과 도덕성의 균형을 추구'했다고 밝힘으로써, 가면 뒤에 숨어 좀체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평생 동성애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그는,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일기를 공개해 줄 것을 유언한다. 과연 토마스 만은 얼굴에 달라붙어 갑갑했던 가면을 던져버리고 일기를 통해 자신의 취향을 고백함으로써 죽어서나마 안식을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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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좀 들어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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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말 좀 들어봐>에는 딱히 서술자라 할 사람이 없다. 한 여자와 두 남자가 정신없이 제 생각을 떠들어내며 이야기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형국이다. 따라서 어떤 중립적인 서술이라는 건 이 소설에서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세 사람은 제각기 자신이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며, 제 말에 동조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바싹 마른 진흙 덩어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한 줌의 거짓말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독자는 가끔씩 엇갈리고, 간섭하고, 충돌하는 세 사람, 또는 주변인물의 '말'들을 통해 대충의 스토리를 '눈치' 채고 사건이 돌아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한 명의 서술자가 비교적 중립적인 위치에서 사건을 진술하는 것보다 훨씬 다각적이고 사실적인 효과를 준다.

 "모든 상황이 특수하고, 또한 모든 사건이 평범합니다" 또는 "드러나길 기다리며 밑에 숨어 있는 '진짜' 그림 같은 건 없어요"와 같은 구절들은, 이 소설이 전통적인 플롯이나 주제의식을 거부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 보인다. 이 소설은 여러 방식으로 읽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프로이트에 근거하여 (바람난 아버지를 둔 질리언의 정신세계를 해석해 보라), 또는 경제학에 근거하여 (사랑을 화폐로 저울질하는 올리버와 스튜어트를 보라), 그렇지 않다면 등장인물 간 욕망에 근거하여 (질리언은 스튜어트와 올리버 간의 사랑을 매개하고 있다!)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읽고 난 후 안개 속을 헤매다 나온 양 뚜렷한 느낌이 남지 않는 건, "드러나길 기다리며 밑에 숨어 있는 '진짜' 그림 같은 건 없"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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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 개정판
크누트 함순 지음, 우종길 옮김 / 창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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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노르웨이의 수도 크리스티아나, 주인공은 미친 듯이 먹을 것을 찾아 길거리를 헤맨다. 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 없고, 입을 만한 옷가지는 이미 전당포에 맡겨 버린지 오래다. 그라는 존재 전체를 비틀어 쥐어짜봤자 나오는 것은 어쩌면, 꼬르륵 하는 우스운 소리뿐일 지도 모른다. 빵집의 신선한 빵들을 곁눈질하며 그는 군침을 다신다. 만성적인 배고픔 때문인지 그에게는 이미 손가락을 우두둑 하고 꺾는 버릇까지 생겼다. 배가 고플 때면 그는 거리의 행인들에게, 또는 벤치의 늙은 노인에게, 길가의 꼬마에게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고 그들을 괴롭힌다.

  늘 배가 고픈 그는 '가끔' 돈을 구하기도 한다.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푸짐한 음식을 게걸스레 먹고 난 후, 그러나 그는 먹었던 모든 것을 게워낸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마치 굶주림이 운명인 양, 그는 먹은 것들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식욕이 왕성해질수록, 그가 굶주려 있을수록 더욱 심해진다. 그는 토해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걷는 동안 내내, 어두운 구석을 지나칠 때마다 입 속을 배워냈다. 다시금 나를 파고드는 구토감을 가라앉히려고 몸부림을 쳤다. 두 주먹을 꽉 쥐고서 몸을 긴장시켰다. 발로 길바닥을 차기도 하고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미친 듯이 도로 삼켜댔다...... 소용이 없었다!"

  남들 같으면 거리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구걸이라도 하련만, 한 줌도 안 되는 고결한 자존심은 그에게 구걸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큰 맘 먹고 구걸을 하려다 오히려 가지고 있던 이발권을 건네주기도 하고, 점원의 실수로 재수 좋게 얻은 잔돈은 길거리의 과자 파는 노파에게 줘버린다. 그리고는 오만함과 허세에 휩싸여 스스로를 대견스레 여기는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내 스스로의 양심 앞에 다시 일어선 것이다. 나처럼 하시오! 하고 나는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광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처럼만 하시오!"

  그가 밥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을 쓰는 것이다. 배고픔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글을 쓰는 것.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밥벌이할 글을 써내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다. 그의 원고는 빈번히 편집장에게 퇴짜 맞기 일쑤고, 그는 좌절에 너무도 익숙해졌다. 폴 오스터처럼, 마치 파이프를 입에 물고 안락의자에 기대앉은 것처럼 느긋하게,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빵 굽는 타자기> 中) 하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그에겐 없다. 눈앞의 배고픔에 급급하여, 빵 한 조각이라도 목구멍에 쑤셔넣을 요량으로 그는 글을 쓴다. 그러나 그의 글은 너무 늦게, 혹은 너무 빠르게 완성되기 마련이다.

  그에게도 사랑은 있다. 길거리에서 치근덕대던 여인이 제게 관심을 표하자 그는 좋아서 날아갈 지경이다. 그러나 그의 착란적인 정신상태가 술이 취해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배고픔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여인의 로맨스는 곧 그에 대한 공포와 동정으로 탈바꿈한다. 주인공은 묻는다. "제가 취했었더라면 더 좋았겠습니까?" "예... 아, 당신이 무서워요! 맙소사, 저를 놓아주시지 않겠..."

  배고픔은 한 개인 내부의 무지막지한 소동이다. 한 사람이 배고픔으로 고통 받고 신음하며 쓰러질 때, 그의 전존재가 갈구하는 빵 한 조각은 그 상황 속에 있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 전혀 무의미하다. 즉, 그의 고통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굶주림, 아름다운 글에의 열망에 대해 타인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응대한다. ('가위'를 보라)  따라서 주인공은 좀비처럼 새벽부터 새벽까지 거리를 거닐며 자신의 내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이때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은 사회로 전이되어, 작품 속에서는 감시의 형태를 띤다. 작품에는 수많은 경찰관, 순경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의 얼굴처럼 똑같은 존재들로서 주인공이 이상한 행동을 할 때마다 멀리를 그를 지켜보거나 사건에 개입하여 주인공을 저지하고 억누른다.

  배가 고프되 구토증 때문에 먹을 수 없고, 글을 쓰고 싶지만 영감에 떠오르질 않아 글을 쓸 수 없고, 비천해지고 싶지만 사우론의 눈처럼 거대한 자의식 때문에 그는 거지조차 될 수 없다. 굶주림에 제 살을 뜯어먹지만 그로 인해 더욱 배고파지는 어느 신화의 인물처럼 그는 그렇게 거리를 영원히 떠돌 수밖에 없는 시지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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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최후의 날
빅토르 위고 지음, 한택수 옮김 / 궁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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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두운 방 한가운데, 한 남자가 앉아 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면의 벽 때문에 빛은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사형수이다. 그의 죽음은 이미 누군가의 의해 결정되었고 그로서는 자신의 죽음을 늦출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저 멍하니 앉아 제 죄를 곱씹어 보고 사회에 분노하고 절망하며, 눈앞에서 그와는 관계없이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을 잠자코 보고 있다. 꾸준히 아무 말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그에게 어떠한 감성도 제공하지 않는다.

  공포와 두려움, 극심한 절망감으로 그의 가슴은 오그라든다. 세상의 어떤 말보도 단호한, '당신은 곧 죽게 되어있다'라는 말.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기 마련이라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그러한 폭력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분명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늙은 어머님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순네 살이시니 충격으로 돌아가실 것이고, 며칠을 더 사신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발 데우개에 따뜻한 재만 담겨 있으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 역시 신경 쓰지 않는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고 신경쇠양증에 걸려 있다. 그녀 역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아무 생각 없이 노래하며 놀고 있을 내 딸아이, 내 아기, 불쌍한 마리, 그 아이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위 대목은 사형이라는 제도가 한 개인의 죽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 가정의 공황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임을 암시한다.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어머니와 아내의 죽음을, 딸의 비참한 미래를 처연하게 예언하는 대목은 슬픔을 넘어선 분노를 느끼게 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들이 그의 목을 자를 때 그에게만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아버지, 그의 어머니, 그의 아이들은 그 칼질로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를 죽이면서 당신들은 온 가족의 목을 베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당신들은 무고한 사람들의 목을 자르는 것이다."

  위고는 사형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첫째, 공동체에 이미 해악을 끼쳤거나 향후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영원히 격리하는 것,  둘째, 죄인에 대한 사회의 복수와 벌, 셋째, 일벌백계 즉 범죄자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모방하고자 하는 이들을 교화하는 것. 이에 위고는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사형 대신 종신형으로 평생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면 될 것이고, 복수는 개인의 일, 벌은 신의 일이므로 사회가 관여해서는 안 되며, 일벌백계는 오히려 민중의 타락을 부추길 것이라고 경고한다.

  한 남자가 자신의 예정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몸부림칠 때, 그의 주위에는 타락한 간수, 무덤덤한 신부, 그의 죽음을 열망하며 교수형을 즐거이 기다리는 시민들이 있다. "이 모든 목소리들, 창과 문, 가게의 철책 그리고 가로등 기둥에 모여 있는 머리들, 탐욕스럽고 잔인한 구경꾼들, 그들은 모두 나를 알지만 나는 하나도 모르는 군중, 인간의 얼굴로 바닥을 깔고 벽을 친 도로...... 나는 취한 듯 감각을 잃고 멍청하게 있었다."

  당신 하나만 없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 사회의 실패와 모순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한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아집, 이 모든 건 환상이 아닐 수 없다. 사형은 엄연히 사회 전체의 살인이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부정하고 반대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손에 피를 묻힌 살인자와 하등 다를 바 없게 된다. 바로 마이너스 1이라는 사회의 한 일원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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