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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소설은 삼각 구도로 진행된다. 지나이다를 욕망하는 주인공, 아버지를 욕망하는 지나이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무관심하고 냉랭한 아버지. 주인공은 어느 날 집 근처에서 지나이다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백작, 의사, 시인, 경기병 등 그녀 주위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모여있고, 그들은 언제나 그녀를 숭앙하고 찬미할 준비가 되어 있다.
주인공은 미성숙했다는 이유로 '여왕의 시동'이라는 특권을 받게 된다. 이처럼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주인공은, 역으로 다른 의미에서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사랑하고 있는 주체이면서도 주변의 정세를 관찰할 수 있는 목격자로 작품 속에 자리잡는다. 어린애로 취급 받는 처지에 항변이라도 하듯, 주인공은 지나이다를 위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거나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용감하고 귀여운 소년이라는 그녀의 의례적인 칭찬밖에 없다.
한 여성에 대한 미칠 듯한 열정, 동경과 현실 속 번뇌는 그를 소년에서 남자로 차츰 변모시킨다. 한 소년이 사회화 되는 것은 이처럼, 사회 속 일정 지위를 갖고 있는 대상으로부터의 실패 또는 미끄러짐을 경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이다는 욕망의 주인이다. 그녀의 주위를 행성처럼, 지겹고도 영원히 맴돌 그녀의 추종자들은 욕망의 노예들이다. 그러나 지나이다는 욕망의 거짓 주인으로 읽힐 수 있는데, 그녀는 욕망의 주인인 채 행세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지배해줄 어떤 남성이 나타나지 않는 한에서만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한 남성은 곧 주인공의 아버지이다. 냉정하고, 지적이고, 말을 잘 타는 주인공의 아버지는 그녀를 순식간에 매혹하고 그녀를 발작과 신병의 상태로 이끈다. 그녀는 아버지를 욕망하고 기다림으로써, 또 그런 모습을 주인공에게 보임으로써 주인공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욕망하도록 중개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욕망의 거짓 주인 또는 중개자로 기능한다.
자신이 숭배하는 한 여성이 자신이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아버지를 욕망하라고 명령할 때 주인공은 말 그대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현상에 대한 인식을 중단하고 공포스러운 욕망의 실재에 무심한 척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인공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시간은 이상한 열병에 걸렸던 시기였다. 지극히 격렬한 모순된 감정과 상념, 의혹과 기쁨, 희망과 고통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친 혼돈의 시기였다. 만약 열여섯 살짜리 소년이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나는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 두려웠다."
작품 말미에서의 아버지와 지나이다의 죽음은 소년이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것, 더이상 세상은 그에게 욕망의 대상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하다. 이러한 점에서 작품 속 의사인 루신의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가는 세상 모든 소년들에게 던지는 정언명제처럼 다가온다.
"인간은 자기 두 발로 서야 한다오. 설령 파도가 치는 바위 위에 서 있다 할지라도 말이오...... 문제는 적당한 때에 단념하고 그물을 찢고 나오지 못했다는 데 있지. 그래도 자네는 잘 헤쳐 나왔지. 다시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