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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 개정판
크누트 함순 지음, 우종길 옮김 / 창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노르웨이의 수도 크리스티아나, 주인공은 미친 듯이 먹을 것을 찾아 길거리를 헤맨다. 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 없고, 입을 만한 옷가지는 이미 전당포에 맡겨 버린지 오래다. 그라는 존재 전체를 비틀어 쥐어짜봤자 나오는 것은 어쩌면, 꼬르륵 하는 우스운 소리뿐일 지도 모른다. 빵집의 신선한 빵들을 곁눈질하며 그는 군침을 다신다. 만성적인 배고픔 때문인지 그에게는 이미 손가락을 우두둑 하고 꺾는 버릇까지 생겼다. 배가 고플 때면 그는 거리의 행인들에게, 또는 벤치의 늙은 노인에게, 길가의 꼬마에게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고 그들을 괴롭힌다.
늘 배가 고픈 그는 '가끔' 돈을 구하기도 한다.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푸짐한 음식을 게걸스레 먹고 난 후, 그러나 그는 먹었던 모든 것을 게워낸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마치 굶주림이 운명인 양, 그는 먹은 것들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식욕이 왕성해질수록, 그가 굶주려 있을수록 더욱 심해진다. 그는 토해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걷는 동안 내내, 어두운 구석을 지나칠 때마다 입 속을 배워냈다. 다시금 나를 파고드는 구토감을 가라앉히려고 몸부림을 쳤다. 두 주먹을 꽉 쥐고서 몸을 긴장시켰다. 발로 길바닥을 차기도 하고 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미친 듯이 도로 삼켜댔다...... 소용이 없었다!"
남들 같으면 거리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구걸이라도 하련만, 한 줌도 안 되는 고결한 자존심은 그에게 구걸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큰 맘 먹고 구걸을 하려다 오히려 가지고 있던 이발권을 건네주기도 하고, 점원의 실수로 재수 좋게 얻은 잔돈은 길거리의 과자 파는 노파에게 줘버린다. 그리고는 오만함과 허세에 휩싸여 스스로를 대견스레 여기는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내 스스로의 양심 앞에 다시 일어선 것이다. 나처럼 하시오! 하고 나는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광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처럼만 하시오!"
그가 밥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을 쓰는 것이다. 배고픔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글을 쓰는 것.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밥벌이할 글을 써내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다. 그의 원고는 빈번히 편집장에게 퇴짜 맞기 일쑤고, 그는 좌절에 너무도 익숙해졌다. 폴 오스터처럼, 마치 파이프를 입에 물고 안락의자에 기대앉은 것처럼 느긋하게, "돈을 벌기 위해 책을 쓴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헐값에 팔아 치운다는 건 그런 것이다" (<빵 굽는 타자기> 中) 하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그에겐 없다. 눈앞의 배고픔에 급급하여, 빵 한 조각이라도 목구멍에 쑤셔넣을 요량으로 그는 글을 쓴다. 그러나 그의 글은 너무 늦게, 혹은 너무 빠르게 완성되기 마련이다.
그에게도 사랑은 있다. 길거리에서 치근덕대던 여인이 제게 관심을 표하자 그는 좋아서 날아갈 지경이다. 그러나 그의 착란적인 정신상태가 술이 취해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배고픔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여인의 로맨스는 곧 그에 대한 공포와 동정으로 탈바꿈한다. 주인공은 묻는다. "제가 취했었더라면 더 좋았겠습니까?" "예... 아, 당신이 무서워요! 맙소사, 저를 놓아주시지 않겠..."
배고픔은 한 개인 내부의 무지막지한 소동이다. 한 사람이 배고픔으로 고통 받고 신음하며 쓰러질 때, 그의 전존재가 갈구하는 빵 한 조각은 그 상황 속에 있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 전혀 무의미하다. 즉, 그의 고통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굶주림, 아름다운 글에의 열망에 대해 타인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응대한다. ('가위'를 보라) 따라서 주인공은 좀비처럼 새벽부터 새벽까지 거리를 거닐며 자신의 내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이때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은 사회로 전이되어, 작품 속에서는 감시의 형태를 띤다. 작품에는 수많은 경찰관, 순경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의 얼굴처럼 똑같은 존재들로서 주인공이 이상한 행동을 할 때마다 멀리를 그를 지켜보거나 사건에 개입하여 주인공을 저지하고 억누른다.
배가 고프되 구토증 때문에 먹을 수 없고, 글을 쓰고 싶지만 영감에 떠오르질 않아 글을 쓸 수 없고, 비천해지고 싶지만 사우론의 눈처럼 거대한 자의식 때문에 그는 거지조차 될 수 없다. 굶주림에 제 살을 뜯어먹지만 그로 인해 더욱 배고파지는 어느 신화의 인물처럼 그는 그렇게 거리를 영원히 떠돌 수밖에 없는 시지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