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전투를 학습한다. 아니, 그들은 전투하기 위해 태어난다. 그들은 전투 속에서의 죽음을 비참함이라 여기지 않고 영광된 것 내지는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한다. 예컨대, 거대한 페르시아 군대의 진영을 엿보던 300명의 병사 중 하나의 말이 꼭 그렇다. "지금껏 셀 수 없는 전투에 참가했지만 스파르타인이 말하는 '아름다운 죽음'을 맞게 해줄 전투는 해본 적이 없어. 지금은 그저, 내 목숨을 거두어 그 바람을 들어줄 제대로 된 전사가 단 한 명이라도 저 중에 있기만을 바랄 뿐."

  한 번의 칼 놀림, 창의 지르기에 그들은 자신의 전 존재를 올려놓는다.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에 그들의 목숨이 걸려있고, 따라서 털끝만큼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다. 마치 작두를 타는 무당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전투 속에서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찾는 그들은 적들 보다 더 무서운 눈빛을 하고 있다. 그들은 전투에 인생을, 한 가닥 영혼을 내걸고, 싸움에서 인생을, 그리고 영원을 찾으려 한다.

  페르시아 황제에게 창을 겨눈 레오니다스의 손이 떨리는 이유는 하나다. "그를 주저하게 한 건 두려움이 아닌 그를 산란시키는 고양된 감각들이었다." 새까맣게 몰려든 적들은 그들을 포위하고 있다. 적의 황제에게 창을 날릴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적의 황제를 죽일 기회가 왔다는 것, 그리고 그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느끼는 것이다. 자신이 불멸의 역사에 기록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서있던 것이리라.

  영화 속 페르시아 군대는 기괴함 그 자체이다. 엄청난 괴력의 거구, 양팔이 모두 날카로운 칼로 된 도부수, 가면을 쓴 특공대, 코끼리, 코뿔소 등, 아무리 만화에서 그 아이디어를 채용해 왔다지만, 마치 중세 고문서 삽화에나 등장할 법한 악마 같은 형상들이 페르시아 군에 가득하다. 또한 페르사아 왕은 거대한 가마 또는 수레에 올라타고 있는데, 그것을 수십 명이 운반하는 것은 동양의 전제주의적 통치체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것들을 배경으로 영화는 아름다운 스파르타 남성들의 몸을 세밀하게 보여둔다. 부피감 있는 이두근, 잘 단련된 복극과 쭉 뻗은 팔다리는 기형적인 페르시아 군대들과 대비된다.

  버림 받은 에피알테스에 주목하라. 스파르타인인 그는 외모 때문에 페르시아군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레오니다스는 이 친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말한다. "우리는 개개인이 하나의 꿰뚫을 수 없는 부대로서 싸운다. 그리고 단 한 군데의 허점이라도 진형을 무너뜨리기엔 충분하지." 바로 에피알테스는 '허점'이라는 말. 그러므로 에피알테스는 (전투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한다. 어쩌면 인간 전 존재를 건 치열한 싸움, 아름다운 죽음은 선택 받은 그들만의 것일 지도 모른다. 우리가 맛볼 수 없는 것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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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을 보러간 건 아니었다. <캐리비안의 해적3>이나 볼까 하고 갔다가 매진되어 표가 없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본 게 <밀양>이다. 영화표를 끊고 들어가며 아내가 말했다. "슬픈 영화는 싫은데."

  전도연의 연기를 좋아하진 않지만, 아들의 유괴 후 당황하여 길거리를 방황하는 그녀의 연기는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녀가 길 위에 토해놓는 신음 혹은 꺽꺽거림을 듣는 내내 괴로웠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송강호는 요즘 들어 언제나 최고다. 능청스러운 눈빛, 인간미 가득한 표정, 참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내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비교하자면, 전도연 보다 송강호가 더 좋았다. <밀양>에서는.

  '용서'는 <밀양>의 가장 큰 테마인 것 같다. 아들을 살해한 자에 대한 신애의 용서는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매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즉, 신애는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이지, '하나님'이 살인자를 용서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때문에 신애는 "하나님이 저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라는 살인자의 증언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신애는 살인자를 용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살인자는 그녀가 용서하기 전 '하나님'에게 이미 용서를 받았으므로. 그녀는 '하나님'에게 불평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유혹하여 그들을 타락시키고, 그러함으로써 '하나님'과 경쟁한다. 특히, 교회 장로와 교외에서 정사를 갖는 모습은 기독교도들의 위선과 타락상이 아닌, '하나님'을 질시하고 그와 경쟁하려는 한 여자의 내면을 보여준다. 성교 중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잘 보이나요?" 신애는 '하나님'에게 "절대 안 진다"고 다짐하며 교회 모임을 방해하거나 주변인물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애의 행동에 응답하지 않아서일까, 그녀는 결국 칼을 들고 자해함으로써 제 병든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과연 신애에게 살인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었을까? 죽은 아들이 그럴 권리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누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개에 물려죽은 아이의 일화를 통해 이반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그런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면 개한테 아이를 물어뜯게 한 폭군을 그 아이의 어머니가 포옹하기를 나는 바라지 않아! 아이의 어머니라 해서 그 폭군을 용서할 권리는 없는 거야! 굳이 용서하기를 바란다면 자기 몫만은 용서해 주어도 좋아. 아이의 어머니로서 한없이 괴로워한데 대해서만 용서해 주란 말이야. 그러나 갈가리 찢겨진 그 아이의 고통을 용서해 줄 권리는 어머니에겐 없어. 설혹 아이 자신이 용서해 주겠다고 해도 어머니는 감히 그 폭군을 용서해 줄 수 없는 거야! 만약에 그렇다면, 만약에 아무도 감히 용서해 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조화가 이루어진단 말인가? 도대체 이 세상에 원수를 용서해 줄 수 있고 또 용서해 줄 권리를 가진 자가 있을까?"

  2시간 20분이 훌쩍 지나가고, 영화관을 나오며 마치 좋은 소설 한 편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신애는 결국 살인자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살인자의 딸을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영화의 시작과 끝의 따스한 볕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그놈 목소리>랑 <밀양>이랑 어떤 게 더 좋아?"  "<밀양>."  "나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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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일만으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작가(감독)의 스타일만으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달콤한 인생>이 그렇다. 왜 강 사장이 선우를 죽이려 했는지, 그런 강 사장에게 선우는 왜 복수하려 하는지, 희수는 선우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강 사장은 선우를 죽이려 했고, 선우는 복수를 하려 했으며, 희수가 선우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둘은 그저 더이상 만날 수 없을 뿐이다.

   "왜 그렇지 되는지 관객들은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없다" 라는 식으로 타란티노가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는데, 하드보일드, 느와르 장르에서 종종 나타나는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의 비논리성, 감독의 불친절함 등은 (밑도 끝도 없이) 잔인한 화면과 (무뚝뚝한 해결사와 같은) 남성성을 조성하는 일종의 장치로 기능한다.

   <수>는 기존 하드보일드의 불친절함을 충실히 계승한 영화다. 동생을 왜 19년 간 만나지 못했는지, 동생이 왜 살해되었는지, 어떻게 수는 해결사가 되었는지 등 영화 속에는 그들의 역사가 깡그리 블랙박스 안에 담겨 있다. 그리고 개연성 없는 스토리, 극단적인 인물 설정 등으로 도무지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캐릭터들이 스크린을 뛰어다닌다. 이러한 것들이 한데 얽혀 스토리는 죽고 분위기만 남았다. 헌데, 이 분위기가 '스타일'이라기 보다 감독의 고집으로 읽혀지는 건 왜일까.

 p.s. 아무리 하드보일드라지만, 주인공을 좀비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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