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에 살기 동문선 현대신서 43
자크 르 고프 외 지음, 최애리 옮김 / 동문선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역자는 후기에서 ‘서양 중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가 생동감 넘치는 내용을 잘 살려주는 제목일 테지만, 시중에 나온 다른 책들의 제목을 그대로 본뜰 수 없어 애매한 대로 이와 같은 제목을 취한다고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배경지식의 차이였을까. 『어떻게 살았을까』 시리즈가 평이하게 다가왔던 반면 이 책은 ‘상식’보다는 조금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충분히 재미있지만. 본문은 ‘사랑과 가족’부터 ‘신앙과 성직자’, ‘돈’, ‘폭력’, ‘여가’, ‘도락’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삶을 잘 보여주는 여섯 개의 주제로 크게 나누어져 있었다.

 ‘사랑과 가족’에서는 수정체 역시도 하나의 생명으로 간주하고 피임이나 낙태를 금하는, 잘 알려진 가톨릭의 이미지와는 다른 ‘사랑’의 얘기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쾌락으로, 혹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관계를 가지고 아이를 낳은 여자들이 저지른 영아살해나 유기는 일견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낳은 사람도 죽임 당하거나 버려진 아이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까지 깊숙이 개입했던 교회의 그림자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생활 - 흔히 ‘배꼽 아래 일’이라고 표현하는 것 - 에 국가가 개입하는 일을 꺼려하지만, 당시에는 참으로 지켜야 할 일도 많았던 듯. 연간 전례들과 여성의 월경이 금기로 적용했으며, 남성 상위만이 합법적이고, 혼외정사나 간통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그리고 억압이 많은 사회가 그렇듯 이 같은 금기는 ‘우화시’에서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중세의 독특한 장르인 이 ‘우화시’를 좀 더 연구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법한데.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신앙과 성직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제목 뒤의 그림이었다. 단순한 선이지만 그래서 더욱 효과적으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었다. 죽음 뒤의 세계는 과연 있을까? 나야 피식 웃으면서 넘어갈 뿐이지만 성경이 하나의 절대적인 텍스트였던 -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텍스트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 중세에는 최후의 심판과 그에 따라 가게 될 곳이 삶의 중요한 화두였다. 때문에 이 시기에 등장한 ‘연옥’, 즉 ‘형벌은 불가피하지만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 곳에 대한 관념이 발달하게 되었고. 그렇지만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착하다는 기준이 지금과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당대 지옥을 묘사한 많은 그림들이 실제로 행해진 고문의 모습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사람이 사람한테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는 생각을 했으니까. 사실 그건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아서 더 씁쓸할 뿐. 그리고 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유령을 들먹이는 거야 새삼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니.

 ‘돈’에서는 자본주의의 선구자라 불리는 경영인 쉬제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프랑스 왕들이 죽어서 묻히는 생 드니를 그렇게 만든 이가 바로 그이니 말이다. 그리고 ‘과거의 복원’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라는, 역사에서는 다소 파격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자크 르 고프와의 인터뷰. 중세 고리대금업자라면 돈만 아는 구두쇠 유대인이라는 이미지가 박혀있던 내게 - 그렇지만 이건 대부분의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릴 적에 읽은 <베니스의 상인>이 꽤 오래 영향을 미치고 있구나. - 고리대금업을 일정정도 허용하는 대신 ‘누가 누구에게, 왜, 어떤 조건으로’에 관한 논의를 발전시킨 중세의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이야기는 꽤 재밌는 것이었다.

 그리고 ‘폭력’에서는 공공연한 구경거리였던 사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치욕에 중심을 둔 예식’이었다고. 문득 비디오에서 봤던 내용이 생각났다. 사방이 트여있는, 그래서 모든 이들이 자신을 볼 수 있는 마차를 타고 단두대로 향하던 마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이들을 한 번 더 보지도 못하고, 그냥 마차를 타고 가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도 이루지 못한 채 말이다. 아무리 ‘과시적 처형’이 제한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 책에서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만 신명재판이나 마녀사냥 등은 ‘과시적 처형’이 아닐까. 과연 이런 것들이 적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 여러 군데에서 실제 행해졌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당대에야 사형이 오락의 기능도 겸했다지만, 지금 사형이 존속하는 것은 왜일까. 형벌이 교화에 그 목적이 있다면야 변화 가능성을 아예 없애버리는 사형은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일벌백계’는 잠시 억압의 기능은 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그때뿐이지 않나. 별로 교육적이지도 못하고.

 ‘여가’‘도락’의 경우, 내게는 두 개의 카테고리가 큰 분류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여가시간에 즐기는 걸 보통 ‘도락’이라고 하지 않던가. 특히 ‘여가’에 있는 수렵이나 다른 스포츠들이 별로 흥미를 끌지 못하는 주제이기도 했고. 대신 의복을 다루는 부분에서 이때부터 ‘유니섹스’가 유행했구나, 줄무늬 옷은 나쁘다는 것의 상징이구나 하는 건 굉장히 흥미 있게 봤다. 하지만 역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먹을 것에 대한 이야기. 먹는 것과 보고 즐기는 것을 조화시킨 ‘프장 연회’의 모습은 한 번 쯤 나도 저런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특히 ‘고귀한 본성’ 때문에 땅에서 나는 것은 먹지 않고 하늘과 이웃한 과일들이나 새의 고기를 주로 먹은 귀족들의 얘기는 그저 실소를 자아낼 뿐.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즐기는 사이에 성 밖에서는 겨우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걸 익히 알고 있으니 마냥 곱게만은 볼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중세의 이모저모를 잘 보여주는 책을 읽으며, 흔히들 알고 있듯이 ‘암흑의 시대’로 중세를 규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앙시앙 레짐을 설명할 때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구체제’는 ‘신체제’를 주장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모든 모순을 뒤집어쓰고 어두운 면이 더 부각된다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일 듯. 중세의 ‘암흑’ 이미지, 특히 ‘중간 세기’라는 어정쩡한 이름은 바로 뒤를 이은 르네상스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책에서 접한 중세는 모든 역사가 그렇듯 한 마디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다층적인 면을 가지고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는 시간들이었다. 이처럼 ‘현대적 편견’을 깨는 책들을,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계속 만나기를 기대할 뿐. (사실 능력이 된다면 직접 써보고도 싶은데 얼마만한 내공이 필요할지는 감히 상상도 못하겠다. 박상익의 『번역은 반역인가』에서 번역이 거인의 어깨를 딛고 조금 더 멀리 내다보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지금은 그저 다른 이들의 저서를 읽고 조금이라도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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