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이 쉽게 읽는 유럽역사 이야기
자크 르 고프 지음, 샤를레 카즈 그림, 주명철 옮김 / 새물결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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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종일 연구실에 있던 날, 동기 녀석이 심심해 죽겠다며 읽을 책 있냐고 하기에 손에 잡히는 대로 준 것이 바로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는 유럽 역사 이야기』. 글씨도 크고 그림도 많으며 무엇보다 얇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권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돌려주며 “누나, 다 못 읽겠어요. 읽기는 편한데 눈에는 잘 안 들어와요.”라고 했었지. 무슨 얘기인지 책을 받아들고 잠깐을 고민했다. 읽기 편하다는 건 내가 얘기했던 장점들- 글씨가 크다, 그림이 많다, 얇다 같은 걸 말할 텐데, 눈에 잘 안 들어온다는 건? 녀석은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나는 쉽고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왜 녀석은 이런 반응을 보였던 걸까. 아마 챕터 제목을 건너뛰는 내 버릇과 같은 습관을 가졌을 수도 있고 - 안 좋은 버릇이긴 한데, 무의식중에 잘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제목이 많은 것을 얘기해주고 있기 때문에 신경을 써서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지만. - 어쩌면 너무 요약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역사책은 단순히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고만 생각한다면 이처럼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보게 하는 책에는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관 부분에서 책은 ‘유럽과 아시아의 이웃들은 서로 치고받으면서 문화를 주고받습니다’라고 얘기한다. 바다를 뺀 지구 땅 넓이의 7%에 불과하다는 유럽. 특히 세계 전도에서는 아시아 쪽 러시아보다도 작은 유럽대륙의 넓이가 드러난다. 그런데 실제 느끼기에도 그런가? 내가 배웠던 세계사 교과서는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유럽이 반 가까이 되는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아프리카나 다른 지역의 역사는 들어가서 괜히 복잡해졌다는 느낌을 줄 뿐. 머릿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 일주라는 걸 그려보았을 때에도 그 대부분은 유럽에서 보내는 시간이었지 다른 곳은 애초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면적으로는 ‘6대주’의 7% 밖에 되지 않는 유럽을 이렇듯 절대적인 영역으로 기억하게 된 걸까? 근대 이후 유럽의 식민주의와 연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일단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아시아에서 신과 함께 온 공주’에서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아름다운 여성, 으로서의 유럽 이미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분명히 신화 속의 에우로파는 공주였단 말이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양은 동양을 타자화시키며 신비스런 이미지의 정적인 국가들, 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을 유포시킨다. 그 속에는 남성적 서양/여성적 동양의 이분법이 들어가 있고. 탈근대 논의가 진행되면서 이 같은 시선을 없애려고 노력하지만 쉽지는 않다. 세상을 보는 프레임이라는 게 그렇게 잘 바뀌는 건 아니니까. 다만, 이처럼 쉽게, 그리고 역지사지의 자세로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들이 널리 읽혔으면 하고 생각할 뿐.

 ‘서로 뒤섞이는 인구’는 민족적 순수성이라는 키워드를 쉽게 풀어내고 있었다. 사실 오래된 역사를 자랑할수록 단일민족일 가능성은 없다. 아니, 애초에 단일민족이 있는지도 문제. 우리나라에서는 ‘단군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단일민족임을 열심히 강조해왔지만, 환웅과 웅녀의 결합은 북방계 이주민과 토착민의 결합인 만큼 거기서부터 혼혈이 시작되는 걸.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문제를 삼는 건지. 나치 독일이 먼 얘기만은 아닌 것 같아서 계속 씁쓸했다.

 ‘눈물 나는 사순절, 웃음 나는 사육제’는 중세의 풍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바흐친의 카니발 설명은 왠지 낯익어서 반가웠다고나 할까. 지배질서에 대한 전복을 해학으로 포장할 수 있다는 게 궁핍한 생활이지만 그만큼의 정신적인 여유는 가지고 있었다는 걸로 보이고. 수용미학과 구성주의를 지나 대화이론을 배우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리고 유난히도 눈을 뗄 수 없었던 소제목, ‘프랑스 혁명은 유럽을 폭발하게 만들었습니다. 혁명에 찬성합니까, 반대합니까?’ 혁명은 과연 이상의 실현일까? 물론 혁명을 이끌고, 역사에 이름이 남은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격변기의 세상에 삶이 완전히 휩쓸려버린다면?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이상이 있었으며, 모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이상의 실현에 동의했을까. 뒤숭숭한 요즈음의 정세와 맞물려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용 부분에서 또 하나 눈여겨 봐야할 것은 샤를레 카즈의 삽화였다. ‘유럽 가족’에서 스페인 여사, 프랑스 여사, 이탈리아 여사 등 유럽의 나라 이름 대부분이 여성형이란 점을 이용하여 하이힐을 신은 대륙 삽화를 함께 배치한 것은 상당히 이채로웠다. 특히 ‘야만인, 은 유럽에 수많은 나라를 세웠습니다’에서 양면을 가득 채운 지도- 시체로 가득한 유럽은 당시 상황을 어떤 설명보다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유럽은 막상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모른 채 식민지로 만듭니다’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시대가 개인에게는, 특히 약자에게는 어떻게 다가갔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설명이랄까. ‘도시, 상인, 학교’에서는 <월리를 찾아서> 같은 분위기로 사육제의 흥성스러움이 잘 드러나 있었지만, ‘샤를마뉴의 손자들은 제국을 나누어 갖는다’에서는 세 사람이 영토를 당기는 것으로 표현하는 게 좀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지. 어쨌든 전반적으로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삽화들이었다. 우리 교과서가 이렇게 바뀌어도 재밌을 텐데. 유물의 사진을 싣는 경우야 좀 다르겠지만 지도나 다른 삽화의 경우는 ‘이것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의지가 있다면 천편일률적이고 재미없는 그림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영상에 익숙한 세대가 보는 것이니만큼 말이다.

 대체적으로 ‘그때 거기’의 먼 역사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근·현대사에 비중을 더 둠으로써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역사 교과서의 문제와도 곧바로 직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는 해석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근·현대사는 소략하게 다루고 있으며, 한국 근·현대사 과목이 독립된 이후, 국민공통기본교육과정에서는 교과서에 소략하게 다루어진 근·현대사를 실제 수업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모르고서야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던가? 그리고 ‘지금 여기’를 보는 눈이 키워지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일을,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겠나? 그런 점에서도 우리 교과서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본다. 특히 이 책이 분열과 통합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그려내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말이다.

덧. 판형은 일반적인 책보다 조금 큰 편이라 보기 시원했는데, 날개는 좀 불편했다. 별로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바깥의 종이 표지와 책 자체 양쪽에 다 날개가 있었기 때문에 부담스러웠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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