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아녜스는 아버지 역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가문에서 나와 결혼 생활을 통해 가문으로 되돌아갔다면, 아버지 역시 고독에서 나와 결혼 생활을 거쳐 고독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33)

그 사내를 증오한 것처럼? 아니다. 아녜스는 아버지가 누구를 증오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증오의 올가미는 우리를 너무나 긴밀하게 증오 대상에 옭아맨다. 전쟁의 외설스러움이 바로 그렇다. 함께 쏟는 피의 친밀함, 서로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상대의 몸을 꿰뚫는 두 병정의 외설적인 친밀함. 아녜스는 확신한다. 아버지는 바로 그런 친밀함이 싫었다는 것을. 배 위에서의 그 소동에 정나미가 떨어져 차라리 익사하는 편을 택했다는 것을 말이다. 서로 치고, 서로 짓밟고, 필사적으로 서로 몸을 부딪는 그 사람들과의 신체 접촉이 그에게는 물의 순수 속에서 고독하게 죽는 것보다 훨씬 끔찍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좀 전에 그녀를 사로잡은 증오로부터 그녀를 해방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이마를 치던 그 사내의 독기 어린 영상이 차츰 그녀의 뇌리에서 사라져 갔으며, 대신 이런 문장이 불쑥 떠올랐다. 나는 그들을 증오할 수 없다. 그들과 나를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어떤 공통점도 없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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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을 겁먹게 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죠?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모습을 연출해야만 되나요? 남자들의 자아를 지켜주기 위해서 내가 약한 척 연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요?" (46)

"(...) 어느 날 저녁, 너무 지치고 짜증이 나서 그에게 저를 좀 더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자 그는 제가 여성스럽지 못하고,
실크 속치마를 입지 않고, 화장을 충분하게 하지 않고, 수염이 난 것처럼 보이는 솜털을 염색하지 않았다며 싫은 소리를 했어요. 저는 이 사람이 제가 지출을 나누어서 하고 경제적인 면을 책임져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성적인 위치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이 사람은 제게 성적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도망쳐 나왔어요. 침대에서 함께 있을 남자를 갖기 위해서 제가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러니까 물질적인 압박은 더욱 커지고, 자유는 더욱 줄어든다면, 차라리 섹스 없이 사는 편이 더 낫죠." (76)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은 이상적인 사랑 속에서 정서적인 부족함을 채우고자 한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깊은 실망을 자주 겪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부부 생활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우여곡절에 대한 피난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족이 점점 더 쇠퇴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면 할수록, 남성과 여성은 위대한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한쪽으로 찢어지면 찢어질수록, 다른 한쪽으로는 구원자 같은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사랑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더 나아질 수 있는가를 경험하게 되며,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를 하게 된다. 각자 부부로의 삶을 통해 자신을 더 완성해가고 싶어 한다.
이렇게 사랑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현상은 넓은 면에서 보면 온전하게 밀착할 수 있는 대상이 없는 개인주의 사회에 직면하면서 보이는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거짓말과 파렴치함을 마주하면서 사랑 속에서만은 일정한 방식을 통해 진정함과 진실을 추구할 수 있다. 실망스러운 사회 속에서 사랑은 관계를 다시 만들어가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직업 세계의 변화는 결국 직업 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공동체의 범위를 파괴해버렸다. 조직에서 체스판의 졸과 같은 존재에 불과할 때, 점점 단단해지는 사회에서 이름없는 존재로 일할 때, 어디에서도 의미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 부부 관계 이외에 다른 사회적인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수 없게 될 때, 적어도 한 사람에게만은 유일한 대상이 되기를 기대한다. (96-97)

그런데 바로 이 개인주의가 부부 생활을 실패로 몰고 간다. 관계의 중심에 놓인 사랑은 단지 자아도취적인 사랑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그 혹은 그녀가 내게 보내주는 이미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이 우울증이나 실직 같은 역경에 처해 있다면 나 자신이 만족해할 이미지를 더 이상 보내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때 나는 나를 더 가치 있게 여길 수 있고, 과대평가하며 머물 수 있도록 해주는 이미지를 내게 보내줄 수 있는 다른 누군가를 찾으러 갈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때때로 자기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한쪽이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면 파트너의 자아를 만족하게 해주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감이 없다면 사랑이 그에게 자신에 대한 좋은 평가를 해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부부는 둘 다 불안정하고, 외부 생활에서만큼 둘만의 관계에서도 안정감을 거의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 고통을 경험하고 나면 서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를 쓴다.
오늘날에는 어떤 관계를 키우기 위해서라기보다 각각의 파트너들이 상대를 통해 개인적으로 활짝 피어나기 위해서 커플의 삶에 투자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저 지나가는 사랑의 관계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관계를 통해 의견 충돌이나 갈등을 권력이나 마음대로 조작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은 채, 즉각적이고 항구적인 만족만을 추구한다. 상대방의 실리, 가치, 지식 등을 가로채는 것 또한 문제다. 여기에 서서로 헤어질 때 불만들이 쏟아지게 된다. "넌 나를 이용해 먹었어, 날 이용했다고!" (97-98)

우리는 서로 관찰하고, 평가한다. 둘 중에 누가 먼저 칼을 뽑을까? 이 시대에 ‘널 사랑해" 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만 널 사랑해"라는 의미다. 사랑한다는 단언은 더 이상 둘의 관계가 확고하고 서로에게 중요한 관계로 자리매김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내가 너랑 같이 있는 게 좋게 느껴지니까, 이게 아마 사랑일 거야. 하지만 네가 내 신뢰를 깨고, 내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내 감정도 사라질 거야." 우리는 커플 생활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기를 바랄 뿐, 잃는 장사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아주 사소한 결점이라도 있으면,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며, 관계가 파괴될 위험이 있다. (100)

언제 엄습할지 모를 공허감과 불안이 두려워 우리는 잠시도 쉬지않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타인을 향해 열심히 달려간다. 우리는 여기서 1688년에 이미 다음과 같은 글을 썼던 장 드 라브뤼예르(Jean deLa Bruyere, 1645~1696)를 기억해야 한다. "모든 불행은 도박, 사치, 낭비, 술, 무지, 비방, 욕망, 자신과 신의 존재를 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혼자 있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자신의 고유 모습과 대면하기 두려워서 타인과 교류하고 주위에 늘 사람들을 두려고 한다. 만남과 소비, 활동, 새로운 욕구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존재의 무의미를 잊을 수 있다. 하지만 사방에서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자극하는 이 시대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더 뒷걸음질 치게 되고 여전히 더욱 커진 허무감과 직면하게 된다. (177)

고독은 타인의 존재를 제외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자신과 평화롭게 지내면 그만큼 타인에게도 열려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독은 타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잠식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타인에게 열려 있기 위해서는 그전에 자기 자신을 깨우고 자기 자신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287)

많은 사람이 사랑을 하면 고독의 상황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사랑을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타인이 당신을 바로잡아줄 거라는 생각을 버리게 될 때, 그리고 타인이 당신의 근심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될 때, 새로운 관계가 당신의 삶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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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 같은 내용을 예상했지만 많이 다르다.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는 홀로 존재하는 시간에 대해 매거진 에디터가 ‘잡지스럽게‘ 쓴 에세이 같다면, 〈고독의 위로〉는 정신의학계의 큰 손이 고독, 그리고 ‘단일한 개인‘에 대해 학문적으로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책이다. 한국판은 ‘고독의 위로‘라는 감성적 제목을 갖고 있지만, 사실 원제는 명료하고도 무거운 단어다. ‘Solitude‘. 책의 원제만 알았어도 잘못된 준비 자세로 책을 읽기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독자 낚시를 성공한 것에는 국내 출판사의 공이 크다. 제목뿐만 아니라 챕터별 이름도 국내 편집자가 다시 지었으리라 추측한다. 국내판 챕터 제목들은 다소 낯부끄러울 정도로 트렌디하다. ‘사는 게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비밀‘, ‘절실하게 그립지만 절박하게 두려운‘, ‘지금 우리가 고독해야 하는 이유‘. 본문은 프로이트와 융을 지나 사회학에도 손을 담그며 ‘개인‘이 탄생한 역사까지 읊고 있는데 말이다. (그 내용의 챕터 제목은 ‘절실하게 그립지만 절박하게 두려운‘이었다. 추가 예, ‘사는 게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비밀‘이라는 챕터에선 공상과 이성의 관계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해 반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꼭 챕터 제목이 내용을 건조하게 요약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건 뭐 비유도 아니고 다분히 낚시지 않나.

2. 앤서니 스토가 가장 굵직하게 하고 싶어하는 말은 정신의학계에서 ‘인간관계‘에 비해 ‘고독‘의 중요성과 순기능을 조명하는 담론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삶에서 유일무이하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 ‘인간관계‘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행복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 속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탐구하고 즐기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각종 심리학적 이론과 역사적 사례들로 그 명제를 옹호하고 뒷받침한다. 산발적으로 나열될 수 있는 이론과 사례들이 단정하게 정리되고 취합되고 연결되어 있다.

3. 챕터 제목 경악 버전 투. 독방에 감금되어 타의에 의해 고독을 강요받는 상황이 인간에게 끼치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챕터 제목이… ‘나와의 대화‘다. 제목만 보면 템플 스테이하면서 작업한 수필 같은 게 써있을 것 같지 않나.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 문구는 자의로 택한 고독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 뉘앙스지 독방에 감금된 상황, 강요된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어울리는 문구냐, 나는 전혀 모르겠다.

4. 국내 출판사에서 챕터 구성과 이름을 억지스럽게 바꾸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바로 찾아보았다. 역시나. 원판의 챕터 제목들은 간결하고 직관적이다. ‘나와의 대화‘라는 챕터의 원제는 ‘Enforced Solitude‘인데다가, 본래 네 번째인 챕터가 한국판에선 아홉 번째 자리로 옮겨와 있다. 책 구성까지 뒤죽박죽으로 만들다니 자의적 챕터 작명부터 과하다 느꼈지만 여기까지 오면 이건 분명 편집자의 월권이다. 이러니 흐름이 부자연스럽고 생뚱맞지. 한국판 챕터 8과 10이 본래 연달아 이어져야하는데, 중간에 뜬금없는 챕터를 끼워넣은 셈. 내가 왜 이 책을 봐야한다고 생각했더라. 누가 추천한 걸 기억하고 있었나, 서점을 누비다 제목에 낚여 책을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하고 깐깐하게 되짚어보게 되는 순간이다.

5. 물론 이건 책 자체보다 국내 출판사 때문이다. 오히려 책은 두텁고 신중한 목소리를 갖고 있어 좋다. 나에 대해 위로받는 느낌도 든다. 다만 출판사가 책을 좀 망쳐놓았을 뿐이다.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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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습성이다. 사랑-그것이 정말 사랑이라면-은 끝없는 역동성과 첫 만남의 충실성이 어우러진 형태이다. 사랑은 역동성(끊임없는 재-발명)과 충실성(숙명적이면서도 예기치 못했던, 세계 균열이라는 사건에 대한 충실함) 사이의 긴장 상태, 혹은 일종의 변증법이다. 혁명도 이와 마찬가지다. 혁명이 인간적, 사회적 관계의 재발명뿐만 아니라 혁명 자체의 이론적 전제들의 재발명을 멈추는 순간이면 대개 반동(re-action)과 퇴보로 이어지고 만다. / 진정한 혁명적 순간은 사랑과도 같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 범상한 일상,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생겨날 수 없게끔 사방에 켜켜이 쌓인 먼지의 단층에 하나의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다. (12)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교도, 유대인,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 띠를 만드는 행위는 아름다운 연대의 사례라고 할 수는 있지만, 사랑에까지 이르려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 의식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은 때에도 사랑을 행하는 것이다. 극히 이례적인 세계 균열의 경험에서(만) 촉발된 것이 아닌 사랑, 지루해 보이는 일상의 활동들, 반복들 또는 재발명 속에서 드러나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16)

빛나던 길에 먼지가 쌓이고, 열정이 최악의 절망으로 (또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좌파 멜랑콜리’로) 변하며, 혁명적 순간을 향한 마지막 해방의 잠재력들까지 반혁명에 의해 삼켜지고 마는 시절은 기어이 찾아온다. 그러나 가장 큰 패배는 무자비한 현실에 꺾여버린 또 한 번의 패배가 아니라 유토피아적 욕망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맞는 패배다. (17)

위험은 ‘사랑에 빠지는 것‘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일체의 위험을 기피하려는 세계적인 조류가 형성되고 있다. 서구의 퇴폐적인 자유방임적 사회로부터 이슬람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일치단결해 욕망에 대적하고 있는 중이다. 서구에서 새롭게 창안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소셜 데이팅 애플리케이션 그라인더, 틴더 등)처럼 욕망을 찬양하든, 아니면 ISIS(이슬람국가)나 이란의 근본주의가들처럼 욕망을 금기시하든, 그들의 공통된 목표는 우리가 진정으로 무언가에 빠져버리고, 좌표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렇지만 실제로는 어느 때보다 더 우리가 나아갈 길을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순간, 그 기회를 근결시키는 데 있다. (19)

성애적 관계에 치중하는 이 새로운 애플리케이션들 중 대다수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의 핵심 요소들을 결여하고 있다. 텅 빈 해변에서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어떤 신비도, 진실한 만남도 없었다. 다른 숨겨진 의도라고는 전혀 없이, 노골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성적 욕구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애니 홀>의 표면적 대화는 생략된 채 속 생각을 나타내는 자막만 남겨진 상황과 같다. 그라인더나 틴더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솔한 대화를 이끌어가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실제로는 훨씬 더 표면적인 대화("섹스하자")에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44)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L‘Anti-Oedipe>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욕망이 억압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욕망이라도 사회의 기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비사회적이기 때문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나 욕망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욕망 기계는 사회의 전 부문을 폭파시키지 않은 채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부 혁명가들이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욕망은 축제가 아니다! 어떤 사회든 착취, 예속, 계급 구조를 위태롭게 하지 않은 채로 진정한 욕망의 지위를 용인할 수는 없다." (55)

혁명이 목표로 했던 일상생활의 변화는 이제 다양한 포스트모던적 생활양식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게이나 복장도착자가 되는 일, 또는 두 명이든 열 명이든 동시에 여러 사람과 주기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일은 더 이상 체제 전복적인 성질을 띠지 않는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무 의미도 없는 주제로 취급받는 실정이다. 생활양식이라는 이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어디로 끌고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런던의 캠던이나 뉴욕의 태리타운을 방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소위 힙스터 문화라 불리는 이곳의 하위문화는 생활양식의 흡수작용을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그것은 곧 전복적 잠재력이 말끔히 소거된 일상생활의 순전한 (쾌락주의적) 심미화다. 이곳의 창의적인 젊은이들의 가방에서는 체 게바라의 전기가 튀어나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정작 일상생활에서 혁명을 수행한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 이러한 종류의 그릇된 ‘사랑의 재발명‘은 초인플레이션 상태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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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이 인간 이하라는 수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신이 인간 이하임은 폭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는 분노는 광주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공수부대와 싸워야만 했던 운명이었다. 광주 시민들이 투쟁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 ‘인간임‘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 우리는 이제 5월 25일 김성용 신부의 강론의 뜻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는 이제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하며 개나 도야지와 같이 입을 먹이그릇에 처박아 먹어야 하며, 짐승과 같이 살아야만 합니다. 폭력과 살인을 일삼는 유신잔당이 우리를 짐승같이 취급, 때리고, 개를 죽이듯이 끌고 가고, 찌르고 쏘았기 때문입니다.
2) 두 다리도 걷고 인간다웁게 살려고 하면 생명을 걸고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져야 한다. 과거의 침묵, 비굴했던 침묵의 대가를 지금 우리들은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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