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습성이다. 사랑-그것이 정말 사랑이라면-은 끝없는 역동성과 첫 만남의 충실성이 어우러진 형태이다. 사랑은 역동성(끊임없는 재-발명)과 충실성(숙명적이면서도 예기치 못했던, 세계 균열이라는 사건에 대한 충실함) 사이의 긴장 상태, 혹은 일종의 변증법이다. 혁명도 이와 마찬가지다. 혁명이 인간적, 사회적 관계의 재발명뿐만 아니라 혁명 자체의 이론적 전제들의 재발명을 멈추는 순간이면 대개 반동(re-action)과 퇴보로 이어지고 만다. / 진정한 혁명적 순간은 사랑과도 같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 범상한 일상,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생겨날 수 없게끔 사방에 켜켜이 쌓인 먼지의 단층에 하나의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다. (12)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교도, 유대인,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 띠를 만드는 행위는 아름다운 연대의 사례라고 할 수는 있지만, 사랑에까지 이르려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 의식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은 때에도 사랑을 행하는 것이다. 극히 이례적인 세계 균열의 경험에서(만) 촉발된 것이 아닌 사랑, 지루해 보이는 일상의 활동들, 반복들 또는 재발명 속에서 드러나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16)

빛나던 길에 먼지가 쌓이고, 열정이 최악의 절망으로 (또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좌파 멜랑콜리’로) 변하며, 혁명적 순간을 향한 마지막 해방의 잠재력들까지 반혁명에 의해 삼켜지고 마는 시절은 기어이 찾아온다. 그러나 가장 큰 패배는 무자비한 현실에 꺾여버린 또 한 번의 패배가 아니라 유토피아적 욕망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맞는 패배다. (17)

위험은 ‘사랑에 빠지는 것‘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일체의 위험을 기피하려는 세계적인 조류가 형성되고 있다. 서구의 퇴폐적인 자유방임적 사회로부터 이슬람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일치단결해 욕망에 대적하고 있는 중이다. 서구에서 새롭게 창안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소셜 데이팅 애플리케이션 그라인더, 틴더 등)처럼 욕망을 찬양하든, 아니면 ISIS(이슬람국가)나 이란의 근본주의가들처럼 욕망을 금기시하든, 그들의 공통된 목표는 우리가 진정으로 무언가에 빠져버리고, 좌표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렇지만 실제로는 어느 때보다 더 우리가 나아갈 길을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순간, 그 기회를 근결시키는 데 있다. (19)

성애적 관계에 치중하는 이 새로운 애플리케이션들 중 대다수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의 핵심 요소들을 결여하고 있다. 텅 빈 해변에서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어떤 신비도, 진실한 만남도 없었다. 다른 숨겨진 의도라고는 전혀 없이, 노골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성적 욕구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애니 홀>의 표면적 대화는 생략된 채 속 생각을 나타내는 자막만 남겨진 상황과 같다. 그라인더나 틴더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솔한 대화를 이끌어가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실제로는 훨씬 더 표면적인 대화("섹스하자")에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44)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L‘Anti-Oedipe>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욕망이 억압되는 것은 아무리 작은 욕망이라도 사회의 기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비사회적이기 때문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나 욕망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욕망 기계는 사회의 전 부문을 폭파시키지 않은 채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부 혁명가들이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욕망은 축제가 아니다! 어떤 사회든 착취, 예속, 계급 구조를 위태롭게 하지 않은 채로 진정한 욕망의 지위를 용인할 수는 없다." (55)

혁명이 목표로 했던 일상생활의 변화는 이제 다양한 포스트모던적 생활양식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게이나 복장도착자가 되는 일, 또는 두 명이든 열 명이든 동시에 여러 사람과 주기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일은 더 이상 체제 전복적인 성질을 띠지 않는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무 의미도 없는 주제로 취급받는 실정이다. 생활양식이라는 이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어디로 끌고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런던의 캠던이나 뉴욕의 태리타운을 방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소위 힙스터 문화라 불리는 이곳의 하위문화는 생활양식의 흡수작용을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그것은 곧 전복적 잠재력이 말끔히 소거된 일상생활의 순전한 (쾌락주의적) 심미화다. 이곳의 창의적인 젊은이들의 가방에서는 체 게바라의 전기가 튀어나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정작 일상생활에서 혁명을 수행한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 이러한 종류의 그릇된 ‘사랑의 재발명‘은 초인플레이션 상태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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