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을 겁먹게 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죠?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모습을 연출해야만 되나요? 남자들의 자아를 지켜주기 위해서 내가 약한 척 연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요?" (46)

"(...) 어느 날 저녁, 너무 지치고 짜증이 나서 그에게 저를 좀 더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자 그는 제가 여성스럽지 못하고,
실크 속치마를 입지 않고, 화장을 충분하게 하지 않고, 수염이 난 것처럼 보이는 솜털을 염색하지 않았다며 싫은 소리를 했어요. 저는 이 사람이 제가 지출을 나누어서 하고 경제적인 면을 책임져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성적인 위치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이 사람은 제게 성적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제시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도망쳐 나왔어요. 침대에서 함께 있을 남자를 갖기 위해서 제가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러니까 물질적인 압박은 더욱 커지고, 자유는 더욱 줄어든다면, 차라리 섹스 없이 사는 편이 더 낫죠." (76)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은 이상적인 사랑 속에서 정서적인 부족함을 채우고자 한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깊은 실망을 자주 겪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부부 생활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우여곡절에 대한 피난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족이 점점 더 쇠퇴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면 할수록, 남성과 여성은 위대한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한쪽으로 찢어지면 찢어질수록, 다른 한쪽으로는 구원자 같은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사랑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더 나아질 수 있는가를 경험하게 되며,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를 하게 된다. 각자 부부로의 삶을 통해 자신을 더 완성해가고 싶어 한다.
이렇게 사랑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현상은 넓은 면에서 보면 온전하게 밀착할 수 있는 대상이 없는 개인주의 사회에 직면하면서 보이는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거짓말과 파렴치함을 마주하면서 사랑 속에서만은 일정한 방식을 통해 진정함과 진실을 추구할 수 있다. 실망스러운 사회 속에서 사랑은 관계를 다시 만들어가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직업 세계의 변화는 결국 직업 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공동체의 범위를 파괴해버렸다. 조직에서 체스판의 졸과 같은 존재에 불과할 때, 점점 단단해지는 사회에서 이름없는 존재로 일할 때, 어디에서도 의미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 부부 관계 이외에 다른 사회적인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갈 수 없게 될 때, 적어도 한 사람에게만은 유일한 대상이 되기를 기대한다. (96-97)

그런데 바로 이 개인주의가 부부 생활을 실패로 몰고 간다. 관계의 중심에 놓인 사랑은 단지 자아도취적인 사랑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그 혹은 그녀가 내게 보내주는 이미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이 우울증이나 실직 같은 역경에 처해 있다면 나 자신이 만족해할 이미지를 더 이상 보내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때 나는 나를 더 가치 있게 여길 수 있고, 과대평가하며 머물 수 있도록 해주는 이미지를 내게 보내줄 수 있는 다른 누군가를 찾으러 갈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때때로 자기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한쪽이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면 파트너의 자아를 만족하게 해주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감이 없다면 사랑이 그에게 자신에 대한 좋은 평가를 해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부부는 둘 다 불안정하고, 외부 생활에서만큼 둘만의 관계에서도 안정감을 거의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 고통을 경험하고 나면 서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를 쓴다.
오늘날에는 어떤 관계를 키우기 위해서라기보다 각각의 파트너들이 상대를 통해 개인적으로 활짝 피어나기 위해서 커플의 삶에 투자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저 지나가는 사랑의 관계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관계를 통해 의견 충돌이나 갈등을 권력이나 마음대로 조작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은 채, 즉각적이고 항구적인 만족만을 추구한다. 상대방의 실리, 가치, 지식 등을 가로채는 것 또한 문제다. 여기에 서서로 헤어질 때 불만들이 쏟아지게 된다. "넌 나를 이용해 먹었어, 날 이용했다고!" (97-98)

우리는 서로 관찰하고, 평가한다. 둘 중에 누가 먼저 칼을 뽑을까? 이 시대에 ‘널 사랑해" 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만 널 사랑해"라는 의미다. 사랑한다는 단언은 더 이상 둘의 관계가 확고하고 서로에게 중요한 관계로 자리매김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내가 너랑 같이 있는 게 좋게 느껴지니까, 이게 아마 사랑일 거야. 하지만 네가 내 신뢰를 깨고, 내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내 감정도 사라질 거야." 우리는 커플 생활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기를 바랄 뿐, 잃는 장사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아주 사소한 결점이라도 있으면,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되며, 관계가 파괴될 위험이 있다. (100)

언제 엄습할지 모를 공허감과 불안이 두려워 우리는 잠시도 쉬지않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타인을 향해 열심히 달려간다. 우리는 여기서 1688년에 이미 다음과 같은 글을 썼던 장 드 라브뤼예르(Jean deLa Bruyere, 1645~1696)를 기억해야 한다. "모든 불행은 도박, 사치, 낭비, 술, 무지, 비방, 욕망, 자신과 신의 존재를 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혼자 있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자신의 고유 모습과 대면하기 두려워서 타인과 교류하고 주위에 늘 사람들을 두려고 한다. 만남과 소비, 활동, 새로운 욕구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존재의 무의미를 잊을 수 있다. 하지만 사방에서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자극하는 이 시대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더 뒷걸음질 치게 되고 여전히 더욱 커진 허무감과 직면하게 된다. (177)

고독은 타인의 존재를 제외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자신과 평화롭게 지내면 그만큼 타인에게도 열려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독은 타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잠식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타인에게 열려 있기 위해서는 그전에 자기 자신을 깨우고 자기 자신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287)

많은 사람이 사랑을 하면 고독의 상황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사랑을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타인이 당신을 바로잡아줄 거라는 생각을 버리게 될 때, 그리고 타인이 당신의 근심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될 때, 새로운 관계가 당신의 삶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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