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아녜스는 아버지 역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가문에서 나와 결혼 생활을 통해 가문으로 되돌아갔다면, 아버지 역시 고독에서 나와 결혼 생활을 거쳐 고독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33)

그 사내를 증오한 것처럼? 아니다. 아녜스는 아버지가 누구를 증오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증오의 올가미는 우리를 너무나 긴밀하게 증오 대상에 옭아맨다. 전쟁의 외설스러움이 바로 그렇다. 함께 쏟는 피의 친밀함, 서로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상대의 몸을 꿰뚫는 두 병정의 외설적인 친밀함. 아녜스는 확신한다. 아버지는 바로 그런 친밀함이 싫었다는 것을. 배 위에서의 그 소동에 정나미가 떨어져 차라리 익사하는 편을 택했다는 것을 말이다. 서로 치고, 서로 짓밟고, 필사적으로 서로 몸을 부딪는 그 사람들과의 신체 접촉이 그에게는 물의 순수 속에서 고독하게 죽는 것보다 훨씬 끔찍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좀 전에 그녀를 사로잡은 증오로부터 그녀를 해방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이마를 치던 그 사내의 독기 어린 영상이 차츰 그녀의 뇌리에서 사라져 갔으며, 대신 이런 문장이 불쑥 떠올랐다. 나는 그들을 증오할 수 없다. 그들과 나를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어떤 공통점도 없다. (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