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마다 삶의 많은 의미가 농축되어 한꺼번에 발현하는 순간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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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어떻게 이깟 일로 저렇게 울고 있을까? 그럼 사랑은? 죽음은? 엄마도 언젠가는 죽을 텐데, 그걸 까맣게 잊은 걸까?‘
어른들 역시 금방 지나가버리는 하찮은 일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앙투아네트는 그들을 두려워했었다.
그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면, 그들의 헛되고 부조리한 위협 앞에서 벌벌 떨었었다. 앙투아네트는 천천히 은신처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잠시 어둠에 몸을 숨긴 채, 흐느낌은 멈췄지만 생각에 빠져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눈물이 입술까지 흘러내려도 그녀는 닦지 않았다. 앙투아네트는 일어나서 엄마에게 다가갔다. (무도회, 73) - P73

"하지만 모든 결혼이 불행한 건 아니야..." 뚱보 블랑슈 아주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
"삶이 끔찍한 거지. 너희는 삶에서 동떨어져 있어. 너희가 옳아. 삶은 여자를 아프게 하고, 망가뜨리고, 더럽히고, 상처 입게 해. 여자에겐 사랑 외에는 삶이 없다고 말하는 건 남자들이야. 그런데 혼자 사는 너희는 행복하잖니? 날 봐. 나도 이제 너희처럼 혼자야. 하지만 이건 내가 원해서 찾은 고독이 아니라, 굴욕적이고 쓰디쓴 나쁜 고독이야. 버림받고 배신당해 얻은 고독이지. 난 직업도 없어. 가슴을 채우고 정신을 달래줄 게 아무것도 없어. 자식? 그건 날 계속 후회하게 하는 살아 있는 기억이야. 너희는, 너희는 행복하잖아." (그날 밤, 125-126)

이번에는 마르셀 아주머니가 끼어들었다.
"난 생각이 달라. 그건 우연이 아니라 본능의 문제야. 내 동료 중 하나도 나처럼 노처년데, 사람들이 왜 결혼을 안 했냐고 물으면 늘 ‘어쩌나 보니 그렇게 됐어요.‘라고 대답해. 하지만 아니야. 그건 정확하지 않아. 결혼에 대한 소명이 있느냐 없느냐, 그게 중요하지. 결혼, 사랑, 간단하게 말해 삶에 대한 소명.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살기를 원하든지, 아니면 평온을 갈망하게 되어 있어. 난 늘 평온을 갈망했어. 그래서 한동안 수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그러다가 나에게 필요한 건 주님이 아니라, 내 소박한 일상을 반복하면서, 나만의 소중한 습관들과 함께 조용히 지내는 삶이라는 걸 깨달았지. 남자! 맙소사! 내가 남자를 데리고 뭘 하겠어!"
"남자!" 엄마가 메아리처럼 반복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엄마가 덧붙였다.
"네 말이 맞아, 마르셀. 그건 우연이 아니라 본능, 나아가 욕망의 문제야. 결국, 우리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욕망하는 걸 얻게 돼. 그게 우리가 받는 가장 큰 벌이야." (그날 밤, 130) - P130

나는 엄마의 목소리와 말하는 방식이 1시간 만에 완전히 달라졌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그날 밤부터 엄마는 더 이상 예전의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는 부엌과 텃밭, 그리고 정원 일을 하고, 이모가 학교에 있는 동안 암탉과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약간은 억센 시골 아주머니가 되었다. 몇 년 후에 엄마는 다시 결합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답변할 정도로 안정되었다.
"그건 마치 정신병에 걸렸다가 완치된 사람한테 강압복을 다시 입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아요, 가엾은 양반...." (그날 밤, 130-131)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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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하늘색 레글런 스웨터와 힙한 카드 지갑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왜 그 기법을 써야 하는지, 그 지시를 따라가면 그 부분이 나중에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설명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냥 의문 갖지 말고 따라오면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가 기본 스탠스다.

이 책은 실이 어떤 흐름으로 엮여 편물의 질감을 만들어내는지를 근본 관심사로 두고 그 안에서 여러 시도를 해보고 고민해본 오랜 베테랑 뜨개인만이 줄 수 있는 귀한 정보들이 있다. 당연한 관습도 이상히 여겨 굳이 다른 방식으로 해보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한 인물. 어느 분야든 역사적으로 여겨지는 인물이 아닌가. 이 작은 뜨개 세계에서도 그런 인물이 있고, 그게 짐머만이다.

˝뜨개에 답은 없다˝는 뻔한 말, 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뜨개인들이 그 슬로건을 실천할 수 있도록 기본 원리를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알려주어 자유의 힘을 주는 건 고난도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란한 단계에 얼른 도달하기 위해 슬쩍 보고 지나치는 기본 원리를 계속 붙잡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어느 분야든 별로 없는 법이다. 귀하게도, 이 책은 실의 움직임을 이야기한다.

뜨개 역시 그냥 딱 고정된 디자인으로 가는 유일한 길 하나를 별 설명 없이 도안과 영상으로 지시하듯 알려주는 게 제일 쉽다. 시키는 대로 하고, 외워라. 학교 수업처럼. 바로 답을 낼 수 있도록 수학 공식을 외우라고 하지 증명 과정을 여러 번 거듭하며 학생들을 이해시키려 하는 선생님은 없었듯이.

앞으로도 도안을 그대로 따르는 방식으로 뜨개를 할 생각이고 남의 완성품들을 뜨개할 생각이라면 이 책은 어렵고 번거롭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뜨고 싶은 뜨개인, 그러면서도 지난한 협회 강의에 고액을 쓸 생각은 없는 국내의 고독한 뜨개인이라면 이 책이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뜨개의 개방성과 가능성에 매료된 사람, 뜨개를 거듭할수록 인생과 비슷한 면이 많다고 생각하는 뜨개인들이라면 소중한 맘으로 읽게 될 책이다. (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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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먼이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책 읽기의 은유, 249) - P249

우리 존재는 읽은 만큼 성장한다. 그 순환이 완성되는 과정은 단순히 지적인 과정만은 아니라고 휘트먼은 주장했다. 다시 말해 표면적으로는 지적으로 읽어 어떤 의미를 파악하고 어떤 사실들을 자각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도 텍스트와 독서가는 서로 한데 얽히면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텍스트를 섭취하여 텍스트가 가두고 있던 무언가를 풀어낼 때마다 그 텍스트의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아직 파악해 내지 못한 다른 무언가가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휘트먼이 자신의 시를 거듭 손질하고 다시 펴내면서 믿었던 것처럼, 어떠한 책 읽기도 결코 완성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책 읽기의 은유, 254)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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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저 1800년대 후반 뉴욕 사교계의 물리적-정신적 풍경을 아낌없이, 날카롭게 그리면서도 그저 통속을 다루는 소설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읽고는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작품을 보고 이런 마음이 된 게 얼마만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다. 인생이라는 건... (24.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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