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 재밌고 쉬운데 얕지는 않다. 책-인간에 대한 흥미롭고 짤막한 이야기들. 좋은 그림 몇 점과 책 몇 권을 얻어간다. (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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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도 첫 일필(一筆)에 만필(萬筆)이 통섭되고 억만 개 문장을 수용한다. 생각이 나니 쓰는 게 아니다. 쓰니까 생각이 나고, 쓰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문장이 문장을 낳는다. 일필(一筆)로 벽을 차 부수는 수밖에 없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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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나르시시스트와 그 희생자들 - 악성 나르시시스트의 정체와 그 희생의 메커니즘을 찾아서
장 샤를르 부슈 지음, 권효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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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하나 살린 책. 가장 최근의 관계를 비롯해 지난 8년 간의 이성관계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간결하지만 명쾌한 정신분석 용어 및 매커니즘에 대한 해설과 함께,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근원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일그러진 심리와 그 동학을 정연하게 수면 위로 떠올린다.
그동안 나의 이해체계 안에선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웠던 시간들을 이 실타래 안에 끼워넣고 읽으니 책장을 넘기다 실제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크게 뜨기를 여러번. 그리고 나는 왜 이 유형의 인간들과 반복적으로 얽혔는가. 나를 유사한 관계로 회귀시켰던 기제는 무엇이었나. 나에겐 나르시시스트의 면모가 조금이라도 없는가에 대한 성찰까지 가능하다.
건강하고 충만하게, 중심을 잃지 않고 살기 위해선 종교적 명상뿐 아니라 정신분석에 대한 직접적인 공부 역시 뒤따라야 함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책이다. 혼자 머리를 싸맸던 관계와 사건들, 자기 수련만으로 애써 봉합해보려 진 뺐던 시간들이 정신분석의 얼굴을 하고 뒤통수를 쳤다. (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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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과 똥
숭고한 관념으로 무장한 책도 지하의 파지 압축장에선 오물과 악취 가득한 물질의 세계에 온전히 소속된다. 노자도 헤겔도 지저분한 빵 종이, 그리고 쥐들과 함께 한 꾸러미 안에 압축되어버린다. 내가 만난 만차도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운 소녀 나의 사랑 만차는 무도회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똥물을 묻혀오거나 스키 뒤편에 똥을 싣고 온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꾸러미는 나에 의해 매번 맨 위에 책 한 권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가 펼쳐진 채 압축된다. 도덕경과 끈적한 종이박스가 온전히 하나된다. ˝그러고 있노라니 먼 과거로 되돌아가 만차의 삶 한 토막과 아름다웠던 내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그 모두의 배후에서, 깊디깊은 땅 밑 하수구를 흐르는 더러운 물소리가 들린다. 그곳에서 두 종족으로 나뉜 쥐들이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아름다운 하루다!˝


2. 밀려남과 압축
눈 깜짝할 새에 저만치 나아가 버리는 사회,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사유하지 않으나 도리어 그렇기에 활기찰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점점 뒤편으로 밀려남을 느낀다. 빛 같은 속도의 발전 속에서 지나간 시간들은 점점 더 동일한 부피 속에 밀도 높게 압축된다. 부브니에 등장한, 이제는 하나의 꾸러미 안에 스무 배나 더 많은 폐지를 압축해버리는 새로운 기계처럼. 나는 나의 시간과 삶도 이제는 점차 과거로 압축되어가는 대상임을 느낀다. 노자, 쇼펜하우어, 칸트가 있는 압축의 스펙트럼 속으로 나도 들어가야 할 때다.


3. 압축의 사회
‘압축’에 대해 생각한다. 압축적 근대. 많은 것들이 쉽게 압축되어 버린다. 지나간 것은 본연의 부피를 잃고 압축되어 이전 부피의 백분의 일만큼의 존재만을 갖는다. 이 압축의 사회 속에서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한탸와 같이 압축의 대상이 되어버리거나, 부브니의 노동자들 같이 사유 없이 새로운 압축기를 돌리는 사람이 되어버리거나.


4. 참고, 원역 아님
번역의 대본이 프랑스 번역판이다. 부드럽게 읽히지 않는 것이 중역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원역이 아닌 것이 아쉽다. (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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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10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역이었군요. 두 번이나 읽었는데도 미처 몰랐네요.

김섬 2020-01-10 22:49   좋아요 0 | URL
저도 읽는 동안은 몰랐는데, 역자 후기 마지막에 막스 켈러가 번역한 프랑스어판(1983)을 번역의 대본으로 하였다고 쓰여 있더라구요.
 

"(...) 그러고 있노라니 먼 과거로 되돌아가 만차의 삶 한 토막과 아름다웠던 내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그 모두의 배후에서, 깊디깊은 땅 밑 하수구를 흐르는 더러운 물소리가 들린다. 그곳에서 두 종족으로 나뉜 쥐들이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아름다운 하루다!" (47)

그러면 종이 더미 발치에 있던 나는 손에 책을 든 채 수풀 속에 숨은 아담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겁에 질린 시선으로 낯선 주변 세계를 둘러본다. 한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그날 찾아낸 수많은 책들, 내 가방 속에 든 책들 생각에 골몰해 길을 걷는다.전차와 자동차와 보행자 들을 피해가면서, 녹색등이 켜지면 기계적으로 길을 건넌다. 행인이나 가로등과 부딪치는 일도 없이 걸어간다.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떄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 (16)

단단히 사리고 똬리를 튼 내 몸은 겨울철의 새끼 고양이나 흔들의자 나무틀 같다. 한 번도 진짜로 버림받아본 기억이 없는지라 그렇게 나 자신을 방기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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