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과 똥
숭고한 관념으로 무장한 책도 지하의 파지 압축장에선 오물과 악취 가득한 물질의 세계에 온전히 소속된다. 노자도 헤겔도 지저분한 빵 종이, 그리고 쥐들과 함께 한 꾸러미 안에 압축되어버린다. 내가 만난 만차도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운 소녀 나의 사랑 만차는 무도회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똥물을 묻혀오거나 스키 뒤편에 똥을 싣고 온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꾸러미는 나에 의해 매번 맨 위에 책 한 권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가 펼쳐진 채 압축된다. 도덕경과 끈적한 종이박스가 온전히 하나된다. ˝그러고 있노라니 먼 과거로 되돌아가 만차의 삶 한 토막과 아름다웠던 내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그 모두의 배후에서, 깊디깊은 땅 밑 하수구를 흐르는 더러운 물소리가 들린다. 그곳에서 두 종족으로 나뉜 쥐들이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아름다운 하루다!˝
2. 밀려남과 압축
눈 깜짝할 새에 저만치 나아가 버리는 사회,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사유하지 않으나 도리어 그렇기에 활기찰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점점 뒤편으로 밀려남을 느낀다. 빛 같은 속도의 발전 속에서 지나간 시간들은 점점 더 동일한 부피 속에 밀도 높게 압축된다. 부브니에 등장한, 이제는 하나의 꾸러미 안에 스무 배나 더 많은 폐지를 압축해버리는 새로운 기계처럼. 나는 나의 시간과 삶도 이제는 점차 과거로 압축되어가는 대상임을 느낀다. 노자, 쇼펜하우어, 칸트가 있는 압축의 스펙트럼 속으로 나도 들어가야 할 때다.
3. 압축의 사회
‘압축’에 대해 생각한다. 압축적 근대. 많은 것들이 쉽게 압축되어 버린다. 지나간 것은 본연의 부피를 잃고 압축되어 이전 부피의 백분의 일만큼의 존재만을 갖는다. 이 압축의 사회 속에서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한탸와 같이 압축의 대상이 되어버리거나, 부브니의 노동자들 같이 사유 없이 새로운 압축기를 돌리는 사람이 되어버리거나.
4. 참고, 원역 아님
번역의 대본이 프랑스 번역판이다. 부드럽게 읽히지 않는 것이 중역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원역이 아닌 것이 아쉽다. (2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