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죽은 자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에 사후의 명성 따위는 당사자에게 가치가 없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죽은 자신에 대해 슬퍼할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리하여 장자 몽테뉴도, 세네카도, 루크레티우스도 입을 모아 말했다. 살아 있지 않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한다면, 태어나기 이전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해야 한다고. (프롤로그, 5) - P5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17) - P17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서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23) - P23

상처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 용기가 없어 망설이다가 끝낸 인생에 불과하다. 태어난 이상, 성장할 수밖에 없고, 성장 과정에서 상처는 불가피하다. 제대로 된 성장은 보다 넓은 시야와 거리를 선물하기에, 우리는 상처를 입어도 그 상처를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상처도 언젠가는 피 흘리기를 그치고 심미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성장이,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이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37) - P37

그러나 애써 시험공부를 해서 기왕에 대학에 들어왔다면, 반드시 지식을 통해 머리에 전구가 들어오는 경험을 해야 한다. 자루에 갇혀 있다가 튀어나온 고양이처럼 그러한 사치스러운 지적 경험을 찾아 캠퍼스를 헤매야 한다.
그리고 입시를 위해 보내야 했던 그 지루했던 시간에 대한 진정한 보상을 그 환한 앎에서 얻어야 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할 수도 있는 다른 종류의 공부가 있음을 영원히 모른 채로 죽지 않기 위해서. (수능 이후, 76) - P76

첫째, 아무리 부부지만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각자, 상대가 모르는 외로운 전투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우자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외로운 싸움을 혼자 수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외로운 전투 중인 상대를 되도록이면 따뜻하게 대해주기 바랍니다.
둘째, 살다 보면 둘 중 한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잘못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나머지 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잘못을 한 상대보다 우위에 서게 되고, 사정없이 비난을 퍼붓게 되기 십상입니다. 바로 그 순간, 제발 정도 이상으로 잔인해지지 말기 바랍니다. 외로운 전투 중에 실수한 상대를 되도록이면 따뜻하게 대해주기 바랍니다. (결혼을 하고야 말겠다는 이들을 위한 세 가지 주례사, 47) - P47

그다음 날에는 한국판 레이디 버드리는 <소공녀〉(2017)를 보러갔다. 전날의 과오를 반성하며 이번에는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영화를 보러 갔다. 혼자 이 영화를 보러 온 중년 아저씨 관객은 이번에도 나뿐인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내가 흐느껴 울 것 같은 영화였다. <레이디 버드>에 나온 여학생보다 훨씬 더 경제적으로 불우했기에 결국 노숙자가 되고 만 여자 주인공이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되고 싶었으나 될 수 없었던 의연하고 강한 사람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디 버드와 소공녀, 99) - P99

21세기가 되자 K교수는 정년퇴임을 하고 캠퍼스를 떠났다. 떠나는 이에게, 후배 교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기자가 물었다.
"자신 있고 겸손한 학자보다 자신 없고 무례한 학자가 많은 것이 대학 사회입니다. 인기 교수나 정치 교수는 예외 없이 허학자들입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역사의식에서 나옵니다. 젊은 교수들이 주류에 서서 쉽게 인정받기보다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비주류에 서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완강하게 걸어나가기 바랍니다." (졸업의 몽타주, 136-137) - P136

어떤 폭력적인 경험은 때로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를테면 식민지배를 받아들여야 했던 한국이 그렇다. 제국주의에 침탈당한 한 조공국의 황혼, 난입한 제국주의자들은 말했다. 너희는 스스로 현대적인 공적 질서를 창출해서 살아갈 능력이 없으므로 우리가 대신 지배해주겠다. 그 말을 부정하기 위하여 한국인들은 질주를 시작한다. 추구할 공동체의 헌법적 가치를 새삼 숙고할 여유는 없다. 원초적 폭력이 한국인에게 떨치기 어려운 공통의 숙제를 부여했으므로, 한국인은 그 숙제를 하며 현대사를 소진해야 한다. 세밀화를 배우고, 석판화를 수집하고, 시집을 천천히 고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 투기를 하고, 자식을 대학에 보내어,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한다. 제국주의자들의 침탈과 모욕을 피하여 달리기 시작한 그들은 정부 수립을 거쳐, 동족상잔의 전쟁을 넘어, 현대 국가의 모습을 갖출 때까지 멈출 수 없다. 마침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까지. 그것이 결국 무엇을 위한 질주이든, 그들은 일단 세계 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질주해야만 한다. (희망을 묻다, 154-155) - P154

어떤 대상에 대해 우리가 어떤 ‘냉정한 지식을 획득했을 경우, 그 지식은 종종 우리로 하여금 그 대상이 우리를 홀리는 힘을 벗어나 그 대상으로부터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역으로 말하여, 우리가 어떤 대상의 마력에 홀릴 때는 그 대상에 대하여 무지한 경우가 많다. (박식하고, 로맨틱하고, 예술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280) - P280

어찌되었거나, 결국 냉정한 지식, 그리고 그러한 지식이 설정하는 자아와 대상의 관계는 자아에게 대상에 대한 대단한 통제력과 자유-인간사회의 기본적인 도덕마저도 뛰어넘는-를 부여한다. 그렇다. 많이 아는 자는 자유로운 것이다. 정말로 진리, 아니 지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냉정한 지식이 새로이 설정해준 대상과의 관계에 힘입어 우리는 더 이상 대상에 대한 정서적 노예가 되지 않는다. (박식하고, 로맨틱하고, 예술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285) - P285

한니발처럼, 광기와 일탈의 수준이 일상적 질서를 완전히 뛰어넘되, 나름의 내적 일관성과 질서를 획득하는 경우, 그 새로운 질서는 현재 우리의 도덕적 범주를 넘어선 어떤 곳에 있으므로, 그 포착되지 않는 성격을 일러, 미학적 질서라고 이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그것은 예술이 된다. (박식하고, 로맨틱하고, 예술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291) - P291

한니발 렉터의 경이로움은 단순한 세상과의 불화를 넘어, 자신의생을 자신이 창조하는 예술의 무대로 만들고, 그 위에서 자신만의 예식을 집전한다는 데 있다. 그러한 한니발의 모습은,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예술을 통해 독립된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세상에 복수하고 있는 많은 예술가들의 모습을 닮았다. (박식하고, 로맨틱하고, 예술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293) - P2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장 기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해 보자. 그림이란 뭘까? 그림은 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동사이기도 한 말이다. 나는 이런 구조의 말들이 좋다. 꿈을 꿈. 삶을 삶. 그림을 그림, 이런 말들에는 결과와 과정을 동등하게 중시하는 뜻이 읽힌다. 이런 의미에서, 그림이라고 하면 대개 종이에 남는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동, 더 자세히 말해 그리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이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기어 변환을 하듯,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사람은 다른 시간 속을 걷게 된다. 이 변화를 경험하는 과정이 종이에 그럴싸한 무엇을 남기는 결과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누군가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요.‘라고 말하면 나는 ‘아, 이 사람은 지금 다른 시간을 필요로 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인다. (11) - P11

초라함만이 줄 수 있는 둘도 없는 소중함과 재미는 초라함에 대한 감각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만 향유가 가능하다. 초라함에 대한 세상의 통념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은 정말로 초라해진다. (61) - P61

이게 모두 괜한 고민이다. 그냥 멋대로, 그리고 싶은 부분만 그리면 된다. 색깔도 그냥 있는 물감을 쓰면 된다. 건축스케치계의 일인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림이란 그저 대상을 조금 더 깊이 즐기기 위한 수단이니, 비례가 안 맞든, 형태가 엉터리든 그저 손이가는 대로 멋대로 그리면 그뿐이다. (72) - P72

그 사람을 잘 그리기 위해 관찰한다기보다 그 사람을 잘 관찰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157) - P1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번역 및 교정 퀄리티가 처참하다. 영문으로 읽는 게 훨씬 이해가 빠르겠다. 번역자가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 언어만 직역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독자에게 도달하는 텍스트에 무책임한 사람들이 만든 책. (2022.3.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춘이 겪는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당사자들의 일기와 편지로 빠짐없이 늘어놓는다. 하루에 몇번이고 바뀌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축약이나 통찰 없이 낱낱이 열거된다.

이것은 독자에게 단점으로 작용한다. 마치 짝사랑이나 사랑에 빠진 친구에게서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똑같은 하소연을 매일같이 3시간씩 들어주는 꼴과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빠르게 읽히는 간결한 문장도 이 무책임한 나열을 덮어주지 못한다.

자전적인 기록이라 하던데, 로셰는 개인적 자료들을 정리한 기록물을 이렇게 널리 읽혀야 할 소설이라는 형태로 출간할 필요가 있었을까? 책의 2/3을 지나면서는 인내심이 거듭 바닥을 쳤다. 그래도 이것들을 통해 무언가 말하려는 게 있겠지 하며 끝까지 읽었다만, 그 끝은 방대한 나열에 비해 너무 짧다. 뮤리엘과 앤의 성숙, 클로드의 공허함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4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에서 마지막 20~3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기록들을 끝내고 마지막에 작가가 개입해서 마무리하려니 어쩔 줄을 모르겠어서 헐겁게 매듭을 지어버리는 느낌이다.

후반부 색다른 캐릭터인 앤의 본격적인 등장이 잠시 활기를 불어넣지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뮤리엘의 자존심으로 가득한 이상론, 자가당착적 격정의 나열은 끝까지 책의 중심을 차지한 채 반복된다. 뮤리엘의 반복적 궤변을 시간순으로 배열해 그대로 쌓아올리기만 한 것은 통찰하지 않는 작가의 무책임함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기록을 생생하게 모두 늘어놓는 것 역시 의미가 있지 않겠냐 하는 질문도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사적인 기록물들을 빠짐없이 읽으려고 소설을 집어드는 게 아니다. 그리고 방대한 편지와 일기 속 텍스트는 정념의 전개를 섬세하고 날카롭게 그려내지도 못한다.

내가 이러한 감정의 시기를 지나서 더 냉소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로셰의 [쥴과 짐]도 읽어볼 생각이다. 생애 주기가 그 다음인 인물들의 이야기니까. 그리고 이를 영화화한 트뤼포로 인한 호기심이 아직 꽤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기대는 낮을 것이다. (21.8.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을 방해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불안이에요. (184)

우선 살아보자고요. 라벨은 그 후에 붙이고. (198)

두 가지 중에서 선택을 하기 위해선, 두 가지 모두를 알아야 해요. 나는 선과 악 중에 선택을 할 수 없어요. 아마 선만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2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