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꽤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음에도 윤도의 가정이 어떤지, 또 윤도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윤도의 세계는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 내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남들도 자신 몫의 비밀을 짊어지고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짐작도 하지 못할 만큼 나는 어렸고, 어리석었다. (125) - P125

책을 쓰는 동안 적어도 나는 자유로웠고, 진실했다. 그것은 훼손할 수 없는 백 퍼센트의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알고 있다. 책에 쓰인 것은 오롯이 내 주관에 의해서 선택된 순전히 내 마음이 손상된 부분만을 일방적으로 기술한 절반의 진실이라는 것을. (128) - P128

"알겠어. 나 아빠처럼 되지 않을게요. 주말에 꼭 고해성사 받을게."
나는 엄마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한 후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기도는 원망의 곡소리나 살풀이와 다름없었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잠그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윤도와 함께 듣던 인디 밴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쿠스틱 기타 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늘 내게 찾아온 진부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잊기로 했다. 태리와 부모님, 세상과 나 사이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문제들에 대해. 지금껏 나는 내가 자력으로 선택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고통을 받아왔다. 불행은 참 진부하지만 행복은 특별하다.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행 대신, 윤도와의 키스에 관해, 그 특별함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이곳을, D시를 떠날 것이다. 윤도와 함께, 이곳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리라. 그래서 그 누구의 감시도 없이 삶의 중심에 윤도와 나를 놓고 살아가리라. (221-222)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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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욕, 성공욕을 자극하며 자본주의 속 정교한 처세술을 가르치는 가짜 멘토의 자기계발서가 판친 지 오래다. 1800년대에 나온 이 책은 '자기계발'의 의미가 변질되기 이전의 근본적인 자기계발서이자 에세이가 아닐까 싶다.


해머튼은 묻는다.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가? 


개인이 일생에서 지적 충만함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이유, 사유하지 않는 삶의 위험성, 지적 생활을 꽉 붙들어 매기 위한 일상의 기술까지 훑는다. 지적 생활, 지적인 삶에 대해 말하지만 뜬구름 잡는 소리에 그치지 않는다. 땅에 발을 디딘 지식인이 현실적 제약과 고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적인 삶을 긍정하고 독자의 능력과 삶을 두둔한다. 패터슨은 내내 친절하다. 잔소리가 아니라, 이미 나를 알고 믿고 있는 사람이 건네는 따뜻한 격려와 조언에 가깝다. 삶의 메뉴얼로 두고픈 책이다. (2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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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환경이든, 도움이 되지 않는 환경이든 실제의 지적 생활에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지적 생활은 일종의 투쟁이며 훈련입니다. 지적으로 생활하는 기술이란 유리한 환경을 발판삼아 발전해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에 필연적으로 얽혀 있는 숱한 사정과 제약 속에서 우리 자신을 극복시켜나가는 행위입니다. 이로써 지성은 풍요로워지고 강인해집니다. (7) - P7

게다가 현재는 지성에의 접근이 과거보다 훨씬 편리해진 시대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신분이 가장 낮은 직공도 솔로몬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접하지 못했던 체계화된 학문을 섭렵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솔로몬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시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지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살았으나, 이 시대의 누구보다 지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누구든지 플라톤보다 훨씬 편하게 교양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과 우리의 차이점은 그가 단순히 교양의 습득에만 얽매이지 않고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 스스로 고뇌하려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8) - P8

그런 의미에서 지적 생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두뇌의 타고난 재능이 아닙니다. 육체적 기반입니다. 건강한 몸이 받쳐줘야만 원하는 정신활동이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 이를 망각한 채 정신이 건강을 압도할 수 있다는 착각은 우리 삶을 병들게 만듭니다. 욕심을 앞세운 정신노동이야말로 지적인 삶을 가로막는 난적 중의 난적입니다. (23, 지나치게 일하는 젊은 작가에게) - P23

걸출한 지성의 소유자라고 해도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혀놓으면 마음이 지쳐버립니다. 책상과 마주보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 능력의 십분의 일도 끄집어내지 못합니다. 책상은 지적 생활의 모태가 아닙니다. 책을 펼쳐놓는다고 해서, 펜과 씨름한다고 해서 지적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적 생활은 말 그대로 생활 전반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고하고, 창작하고, 영감을 얻는 매순간입니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31, 다시 지나치게 일하는 젊은 작가에게) - P31

여기서 중요한 건 ‘합리적‘인 것이 언제나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과학과 수학은 ‘합리적‘ 일수록 좋은 결과가 얻어지지만, 예술과 예술을 닮은 인생의 여러 장면들은 때론 중요한 인상만 ‘선택‘ 해서 간직하는 불평등과 불합리를 통해 아름다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140, 기억력이 나쁘다고 한탄하는 친구에게) - P140

현재의 시간을 철저하게 절약하고 싶다면 지금 몰두하고 있는 일들을 리스트로 작성해보는 건 어떨까요. 각각의 일에 정직하게 불완전한 정도를 기입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 일들에 어느만큼 집중하고 있는지, 또 그 일들이 당신의 생활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 앞으로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때 그 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성과가 어떤 것인지 차근차근 정리해보기를 권합니다. 이렇게 하면 몇 가지 지적 활동 중에서 실현 가능한 것, 다시 말해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가 보입니다. 그 분야에 집중하십시오. 나머지 활동은 비록 흥미가 있고 개인적으로 소중하더라도 내려놓습니다. 단념입니다. 단념하는 대신 귀중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단념하지 않고서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148,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한탄하는 친구에게) - P148

연구하고 있는 몇 가지 학문 상호간의 조화야말로 시간 절약의 참비결임에 분명합니다. 한 가지 중심적인 연구와 보조적인 연구 몇 가지, 그러나 보조가 되지 않는 연구는 일체 손을 대지 않는, 이것이 연구 배분을 결정하는 참원칙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근면한 연구자 가운데에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연구와 전혀 상관이 없는 학문에 관심을 보이며 시간을 투자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분 전환이 목표일 뿐 시간 절약과는 무관한 활동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적의요새를 완벽하게 점령하지 않은 채 남겨두면 그것은 한심스러운 시간 낭비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적진 깊숙이 공격해 들어가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되돌아음을 기약하지 말고 정복해야 하는 것들, 정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들은 남김없이 철저히 정복해야 합니다. (154,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한탄하는 친구에게) - P154

환자를 다루는 법은 간단해요. 우선은 스푼에 물을 적시어 입술을 축이죠. 그러면 환자는 혀로 축축해진 입술을 닦아요.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겁니다. 그 반응을 본 다음에 음식물을 입에 조금 넣어줍니다. 외부 자극에 반응했던 환자는 무의식 중에 음식을 삼키게 돼요. 처음부터 입에 고깃덩어리를 넣어준다면 환자는 삼키기는커녕 토해냈을 겁니다.
같은 이야기를 나는 우리 인생에 들려주고 싶어요. 변화를 원한다면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강도를 높여나가는 방법을 택하세요. 갑작스레 앞으로 이런 인생을 살아갈 거야,라고 얘기하지 마세요. 가슴은 흥분으로 두근거리겠지요. 하지만 그건 정확한 의미에서 기대감과는 달라요. 두려움과 낯설음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무리한 심장박동이에요. 나중에 심장마비가 올지도 몰라요.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업가에게, 183) - P183

매일같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지식노동에 회의감을 느껴 교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식을 활용하는 기술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지성과 교양의 궁극적 목표인 개인의 완성과 성취감, 행복은 사라지고 오직 지식이 재물로 변환되는 물질적 성과에 급급하게 되어 지식인임에도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192, 가난한 지식인에게) - P192

상대방이 시시한 사람이라면 자기도 시시한 문제에 휘말리게 됩니다. 적을 만들기 전에 좀 더 현명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적으로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의 본성은 투쟁적입니다. 그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아직은 그럴 자신이 없다면 부끄럽지 않은 적을 찾아봐야 합니다.
경멸하고 싶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는 마십시오. 당신의 적에게 긍지를 가져야 됩니다. 당신이 그들의 적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가지십시오. (적을 만들지 않는 인간관계에 대하여 묻는 그대에게, 270)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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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인'으로서의 삶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한다는 추천사를 어디선가 읽고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 읽는 내내 고심해 보고 싶은 여러 테마들이 떠올랐다.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메모를 따로 하지 않아서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 가즈오 이시구로는 삶에 대한 하나의 방향이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질문의 형태로 요리조리 판을 뒤집으며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린다. 주인공 '스티븐스'가 집사라는 직업에 대해 갖춘 충실함과 성실함, 갑갑할 정도로 지나친 원칙주의는 삶에 유익한 덕목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빼어난 덕목이 다른 부분들을 자꾸 잠식해버리기도 한다. 그에게는 직업인 그 이상으로서의 삶, 직업 너머의 인간과 사랑, 사회에 대한 통찰은 거의 배제되어 있다. 하지만 읽다 보면 또 그 철두철미한 직업의식을 마냥 부정할 수도 없다. 다만 직업 너머의 지평에 대한 사유의 부재로 마지막에 그가 겪는 (이유 모를) 울컥함, (강하게 변명하고 싶은) 자신의 삶에 대한 억울함은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다.


- 부커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소설류는 아니었다. 거의 마지막 30페이지를 위해 오랜 빌드업을 거쳐 빵 터뜨리는 식의 흐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남아 있는 나날]은 그런 소설이었다. 마지막 30페이지 정도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빵 터뜨리며 절정을 맞이하고 훅 끝내 버리는. 그렇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명확했다면 좀 더 짧게 쓸 수도 있었을 일이다. 그 앞의 에피소드들이 모두 그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다면 말이다. 에피소드마다 온갖 문제를 심히 생각해보게 만드는 다면체의 입체적인 소설이 아니라면. 


- 김남주가 서평에 썼던 대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과 꽤나 직결되는 스토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단면적인 메시지만은 아니고, 주인공을 그렇게 평면적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삶은 명확한 답과 오답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으니까. 우리는 정답이 될 수도 있고 오답이 될 수도 있는 무수한 가치들이 엉키고 뒤섞인 사회적 공간에서 살아간다. 이시구로는 이러한 매커니즘을 바탕으로 세상과 인물을 그린다. 성실함, 충실함, 충성심, 근면함, 직업의식, 원칙주의, 성공과 명예, 지위에 대한 욕망. 이것들을 마냥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이 가치들이 사회에 부유하는 모습 자체를 띄워낸 듯하다. (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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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단정하고 싶다.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집사로 산다는 것은 무슨 팬터마임을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슬쩍 밀거나 약간만 비틀거리게 만들어도 가면이 떨어져 내려가면 뒤의 배우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는 점에서 말이다.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다. (70-71)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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