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퓨테이션: 명예 2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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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말피 공작부인이다." - 존 웹스터 <말피의 공작부인>, 4막 2장

2부에서는 마이크의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엠마의 본격적인 법정 공방이 이어진다. 용의자로 지목된 엠마의 모든 사생활이 밝혀지고 그녀가 쌓아왔던 명성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건 쟁점을 정리하는 자리에서부터 엠마 측과 상대측 검사 소나는 날선 공방을 펼치고, 끝내 엠마 측이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진다.

최근 불륜이나 바람, 갑질 등 위법적 행위는 아니지만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논란도 자주 발생한다. 그 예로 한 정치인이 유부녀와 호텔방에 있는 몰래 촬영한 영상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법적 책임은 없으나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도 공인은 대중의 비난을 받는다. 대중의 외면이나 비난, 해당 업계에서의 퇴출까지도 그 책임으로 간주되지만 공인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공인으로서의 엠마의 삶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미즈 웹스터는 마이크 스톡스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건의 기사를 함께 만들었고, 술과 식사를 함께하던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수백 건의 문자가 오갔다는 점도 추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사건이 있기 3주 전인 11월 17일, 두 사람이 저녁 식사를 함께 했고 이후 호텔에 들어가 성관계를 가졌다는 사실도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쫓고 있는 그에게 화가 났습니다. 명예가 실추될까 우려했습니다. 저희는 자신의 명성을 유지할 수 없을까 봐 고민하던 그녀가 그를 민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p27

"존 웹스터의 복수를 그린 이 비극 작품은 프로그램 북만이 아니라 책도 있었다. 나는 <말피의 공작부인>을 읽으면서 공작부인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의 성적 자율성을 조롱 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음한한 미망인. 매춘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오빠들은 물론 스스로의 신분과 권력에도 짓눌리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비난받았고 명예는 더럽혀졌지만 그럼에도 자의식만은 그대로 짓눌리기를 거부했다. 나는 여전히 말피의 공작부인이다. 그녀는 이렇게 선포했다." p47

"명예라는 건 가장 위태로운 무언가다. 오랜 시간 쌓아도 단 몇 초 만에 무너질 수 있다." p250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동안 석연치 않았던 부분이 밝혀지고 죽은 마이크가 알리려 했던 또 다른 진실이 밝혀진다. 재판이 끝나고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은 깊은 여운을 주었다. 죽은 마이크가 알고 있었던 진실과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엠마의 숨겨진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우리는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최근 세계적으로 가장 핫한 단어가 젠더 간의 갈등이나 여성 혐오에 대한 이슈가 아닌가 싶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고 남성의 정체성이 불안해질 때 나타난다는 여성 혐오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그들을 타자화하여 부정적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여성으로서 오랜 시간 정치부 기자로 활동한 저자 세라 본 역시 세계적으로 불거지고 있는 이 문제를 의식해 여성 혐오의 미러링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의식의 개편을 부탁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써 내려갔는지도 모르겠다.

넷플릭스 방영 예정작인 <레퓨테이션>의 시청 전 원작을 읽고 시청하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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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퓨테이션: 명예 1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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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명예를 잃고 말았구나.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영원할 그 명예를 잃고 말았고,

이제는 짐승 같은 것만 남았구나." - 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셀로>, 2막 3장

인간의 욕망과 욕심의 종류는 헤아일 수없이 많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은 재물욕과 명예욕이 아닐까? 실제 재물은 잃어버리거나 놓아버리면 자기를 떠나게 된다. 다시 말해 재물은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버리고 싶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명예라는 것은 자기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어서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 한 잃어버릴 수도 없고 놓아버릴 수도 없다.

상류층 특권층의 어두운 부분을 그린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제작된 <아나토미 오브 스캔들>을 아내와 함께 흥미롭게 보곤 했다. 개인적으로 시에나 밀러의 팬이었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시청했지만 정치인 특권층의 범죄 스릴러를 감정과 심리적 요소들까지 섬세하게 그려내며 진실을 해부해 가는 탄탄한 스토리로 더욱 흥미로웠는지도 모른다.

흡입력 있는 스토리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 <아나토미 오브 스캔들>의 원작자 세라 본의 신작 <레퓨테이션:명예>는 그녀가 가디언에 입사해 11년간 정치부 기자로 일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권의 권력, 특권, 경찰 수사, 형사 사건 재판 취재 같은 그녀만이 쓸 수 있는 긴장감 넘치는 작품이다.

주인공 엠마 웹스터는 포츠머스 지역을 대표하는 하원 의원으로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젊은 여성 정치인이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여성 인권 문제 등을 발언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인기 상승과 함께 그녀를 비하하는 사람들도 함께 늘어났다. 매일 불안에 떠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명예를 지키려 지금껏 달려온 엠마는 정치인으로 완벽하게 보여도 사실, 커리어를 쌓느라 결혼 생활은 파탄 나고, 딸과의 관계는 서먹하며 일에 쫓겨 자기 삶이란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하룻밤을 보낸 정치부 기자 마이크의 사망으로 그녀는 정치인으로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훗날 나는, 아이가 다른 여자아이의 명예를 훼손한 일이 그리하여 자신의 명예까지 위험하게 만든 일이 내 명예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불러온 또 하나의 결정적 사건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마이크와의 하룻밤처럼, 모두 연결된 사슬 속 한 고리였다."p159

"처음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엠마는 잘해나가는 것 이상으로 활짝 피어났고, 그 삶에 도취되어 있었다. 독주자로 설 만큼은 아니지만 세미프로 실력은 갖춘 청중의 박수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연주자인 캐럴라인은 그런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엠마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것이다. 사람들이 귀 기울이는 목소리를, 제아무리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그녀에게 권력의 맛을 알려준 목소리를 말이다." p203

"다른 신문사와 방송사도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속속 전했다. 사무실 TV 화면 하단에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들이 이어졌다. 하원 의원들 집에서 타블로이드지 기자 무의식 상태로 발견, 여성 하원 의원들 집을 침입한 기자 입원, 타블로이드지 기자 세 여성 하원 의원 집에 무단 침입. 잠깐씩 자막이 겹치기도 했지만, 금세 바로잡혔다. 이런 상황이 긍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을까? 티핑 포인트가 될 수도 있을까? 언론과 대중이 공인들을 정치인, 유명 인사 그리고 해리와 메건도 빼놓을 수 없으니 왕족까지 개인적으로도, 또 소셜 미디어상에서 지나치게 괴롭히고 있다는 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p256~257

옳은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반대편에 선 사람들과의 대립을 피할 수 없다.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자는 누구인지, 그녀는 어떻게 이 위기를 모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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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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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고통은 우리 몸을 보호하기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고통은 조직 손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고통은 우리의 의식적 통제 밖에 있는 뇌가, 우리가 위험해 처해 있음을 의식적 마음에 알리기 위해 내리는 결정이다. 즉, 고통은 뇌에서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뇌가 통증을 '만든다'. 우리의 뇌는 믿음과 기대로 통증이라는 경험을 조작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중독성과 부작용이 없는 완벽한 진통제의 등장으로 세상은 고통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고통에 사라지자 오히려 고통을 추구하는 집단인 '교단'이 생겨나고 인간다움에는 고통이 필요하다며 제약회사를 테러한다. 테러 사건 이후 교단의 지도자들을 무참히 죽인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교단 소속의 폭탄 테러범인 무기징역수 태를 불러들이고 그를 둘러싼 교단과 제약회사에 대한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한다.

"회사는 마약성 진통제를 대체할 새로운 약물을 연구하고 개발했다. NSTRA-14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완벽한 진통제였다. 마약성 진통제를 대체할 만큼 통증 신호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면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중독성이 없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장점이었다."p26

"NSTRA-14의 등장으로 인해 고통의 개념은 신체적인 감각에 중점을 둔 통증의 범위로 축소되었다. 사회적, 문학적, 철학적, 정신적 의미의 고통에 대한 질문은 점차 사라졌다. 고통은 의학적인 문제였고, 의학은 과학기술과 함께 발전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고통은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거나 다른 방식의 시술 혹은 치료를 통해 해결해야 하며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고통은 견디는 것이 아니었다. 견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견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신병의 징후로 의심되었다." p29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p285

태초부터 인간은 저마다의 상황과 방식으로 고통을 없애려 노력했다. 어떤 방식을 사용하든 그 목적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고통을 제외하면 과연 인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설에서는 육체적 통증을 나타내는 고통뿐만 태가 경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경이 부모에게 받았던 마음의 상처도, 변해가는 욱을 지켜보던 민의 마음도 모두 고통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도, 영원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이 모든 게 인생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 모든 사실들을 이렇게 한순간 한순간 다시금 알게 될 때, 그 순간의 의미를 잊어선 안 된다. 인생의 고통이라 알던 것들이 다시 의미가 되어 낯설게 전해지는 일상의 교훈들로 우리는 여전히 인간다움을 간직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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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지나가다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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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어머니가 됐다. 세상의 길로 자식들이 떠나는 걸 보는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 한구석 너무 오랫동안 포기하고 지내야만 했던 그 세월, 꿈 많은 스무 살 여인의 처녀 적 세월. 나는 어머니의 인생을 알지 못한다. 손등의 수많은 주름의 길들이 이제 얼굴로 눈가로, 그리고 힘없어진 눈빛까지 자글자글 주름 같은 길들이 쏟아져 들어가고 당신의 허리는 굽어 세월을 짊어지고 가신다.

조해진 작가의 <겨울을 지나가다>는 주인공 '정연과 남은 가족들은 어머니를 췌장암으로 잃은 후 큰 슬픔과 고통을 겪는다.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감정들과 만나는 고요의 시간을 보내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남긴 따뜻한 마음으로 정연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게 된다.

"한 사람의 부재로 쌓여가는 마음이 집이 된다면 그 집의 내부는 너무도 많은 밤과 복잡한 복도와 수많은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리라. 수납공간마다 물건들이 가득하고 물건들 사이 거울은 폐허의 땅을 형상화한 것 같은 먼지로 얼룩진 곳, 암담하도록 캄캄한 곳과 폭력적일 만큼 환한 곳이 섞여 있고 창밖의 풍경엔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그런 집...." p19~20

누군가를 떠나보냈던 기억은 겨우 찾아온 행복을 의심하게 한다. 그렇게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변함없는 진실을 받아들이며, 있었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전제가 된다. 잘 지내다가도 잘 지내지 못하겠는 이유가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약속한 적 한 번 없이 오는 일방적인 성질의 슬픔은 오고 싶으면 오고, 왔으면 가고 싶을 때까지 머무는, 배려 없는 사람처럼.

소설은 주인공의 슬픔의 크기를 나타내 듯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와 가장 추운 날인 '대한' 곧 봄이 다가옴을 알리는 '우수'에 이르며 절기의 변화에 따라 이어진다. 어제보다 더 슬프든 덜 슬프든 견뎌야만 하는 날의 연속일지라도, 그리고 견딜 만할 때 더 큰 슬픔이 찾아올지라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견디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운 차려서 다행이네"라는 말을 들을 만큼 슬픔을 견디며 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지만, 그것은 슬픔 다음의 더 큰 슬픔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이다.

"사실 옷은 시작에 불과했다. 엄마의 양말과 머플러, 엄마가 직접 겨자색의 굵은 실로 뜬 털 모자에도 내 손은 뻗어갔다. 엄마의 물건에서 구불거리는 흰 머리카락을 발견한 날이면 핀셋으로 조심조심 떼어내 빈 유리병에 모으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그건 그 나름대로 즐거운 취미가 됐다. 엄마가 쓰던 비누, 스킨과 로션, 영양크림을 나도 썼고 엄마에게는 애장품이던 금목걸이라든지 팔찌를 하고 산택을 나간 적도 있었다. 내 몸에서 엄마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고 만져지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엄마에게 보호받는 느낌을 받았고, 때로는 눈앞에 엄마가 있다는 듯 허공에 대고 어리광을 부리고도 싶었다." p75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는 사실이 삶을 응시하는 시선의 깊이를 가늠해 주는 척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아픈 경험 때문에 오히려 시선이 굴절되어 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게 울어본 사람으로서, 자기 삶의 어느 귀퉁이에서 혼자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해진 작가의 글이 큰 위로가 되어 삶은 새로운 문을 열어주기 위해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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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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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던 마음이 이제는 멀리 떠나보냈던 연을 감아들이듯 안쪽으로 다가온다. 햇빛은 이제 눈이 부시거나 따스하다는 말들보다 권태롭다는 말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오래된 숲속 어딘가에서 혼자 고요하게 있고 싶고 번거로운 일들을 피하고 싶을 때가 많다. 이제 삶은 적당히 두렵고 적당히 기분 좋은 이중적 감정의 연속이다. 두렵다는 것은 과연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고, 기분 좋다는 것은 아직도 변화와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재희 작가는 서른세 살에 결핵성 뇌수막염이라는 치사율 높은 병에 걸렸었다.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에서는 그녀의 삶의 커다란 변곡점이 되어버린 사건 이후로 한결 가볍고 자유로운 삶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다가가본 이라면 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작고 소박한 일상의 길 위에서 발견하는 감사가 또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언젠가 한순간의 방심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갈 뻔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자연 시간에 올챙이가 개구리로 변하는 과정에 대해 배웠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집에 오자마자 깡통을 들고 동네 어귀에 있는 못으로 향했다. 그 못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꽤 큰못이었고 가장자리 한쪽에는 웅덩이가 몇 개 있었다. 나는 올챙이를 잡기 위해 웅덩이 주위를 맴돌다 그만 다리가 미끄러져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곳은 꽤 깊은 곳이었고 물속에서 한두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무 그늘 밑에 누워 있었고 옆에 아버지가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로 인해 나는 또 한 번의 인생을 사는 셈이다. 물속에서 쑥 올랐다 내려올 때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다.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찰나의 짧은 순간에서 느낀 미지의 감정에는 두려움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이상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죽음은 항상 우리와 마주하고 있어 그 순간이 오면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보았다. 이게 내 인생일까? 그러곤 한참 후에 스스로 대답한다. 맞아. 이게 내 인생이지. 그런 자문자답을 하다 보면 사실은 내가 어떻게 살든 무엇을 하든 그게 전부 다 내 인생이었다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된다. 내가 꿈꾸기만 했던 어떤 일, 내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놀라운 행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고통,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괴상한 일, 무수히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게 바로 나 자신의 일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사건과 사고들. 그런 일들이 어느 날 아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다.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은 하지도 못한 채로 그런 일들을 맞게 된다. 닥치면 어떤 식으로든 나는 살아낸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이 된다. 진짜 내 인생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 있었다." p87

한순간에 죽음으로 이어지는 우리 삶에서 명성을 좇는 것은 인간의 속성일 테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는 행동인가. 그러나 각각 꿈꾸는 성공은 조금씩 다르리라. 번드레한 직함을 늘어놓고자 무리수를 두며, 인생의 자랑으로 취하고자 했던 사람도 결국은 자기 것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그들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허무하다. 허명을 앞세우다 그 속에 갇혀 버린다. 얻으려고 해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기 삶이 오롯이 이웃을 위해 내어놓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기 일에 충실했으며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일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부끄럽지 않은지 우리에게 길을 알려준다. 그러기에 값어치 있는 이름이 되었다. 진정한 이름은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묵묵한 삶 뒤에 따라올 때 빛난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재능은 나에게 없다. 넓디넓은 천사 같은 큰마음도 내겐 없어 보인다. 지극히 평범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보통 사람이다. 오래도록 기억될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무명으로 살 일이다. 작자 미상이라 적힌 옛 그림에서 더 진한 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이름 있는 화려한 꽃보다는 이름을 알지 못해 풀꽃이라 부르는 은은한 꽃잎이 더 오래 가슴에 남아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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