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유전자 - 풍요가 만들어낸 새로운 인간
에드윈 게일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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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생물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생물학 분야에서 진화를 고려하지 않고 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은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사고와 신체는 자신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진화적 사고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생물의 탄생으로부터 흘러온 유전자의 사슬은 생존에 적합한 형태로 진화해왔다.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놀라울 정도로 유연한 존재다. 인간의 적응력은 문화적 진화와 유전적 진화 모두에 의해 강화된다. 옷, 불, 냉방을 사용해 가혹한 환경의 극단적인 온도를 누그러뜨리며, 새로운 농법과 혁신으로 식량난을 해결한다. 다른 동물들도 새로운 조건에 대응하며 유연성을 발휘하지만, 문화에서 비롯되는 놀라운 유연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지닌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이 문화적 활동으로 새로운 조건에 대응하지 못할 때는 자연 선택이 발생하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문화적으로 유도된 자연선택은 빠르게 진행되고는 한다.

인간의 유전자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유전자가 표현되는 각각의 형태를 '표현형'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덴마크의 식물학자 벨헬름 요한센이 제안한 것으로 이 책의 저자 에드윈 게일의 제시하는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난해할 수 있을 '표현형'을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만난 사람의 모든 특징을 말한다. 살아온 환경과 역정에 의해 변화된 유전자의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유명한 다윈의 말처럼 "살아남는 것은 가장 힘센 종도, 가장 영리한 종도 아닌 변화에 가장 잘 대처하는 종이다." 인간의 환경 적응의 유연성을 '표현형 가소성'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예부터 키가 작았다. 19세기에 남성 평균 신장은 161센티미터, 여성 평균 신장은 149센티미터였다. 육이오전쟁이 끝난 뒤 한반도는 자유 시장 경제와 억압적 전체주의 체제로 양분되었다. 195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삼팔선 이남에서든 이북에서든 같은 키로 성장했지만, 2002년 유엔의 조사에 따르면 북한의 취학 전 아동은 남한에 비해 키가 13센티미터 작고 몸무게가 7킬로그램 가벼웠다. 북한 성인의 키는 달라지지 않은 반면에 남한 여성은 20.2센티미터 증가라는 세계 기록을 달성했으며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긴 기대 수명을 기록했다. 지도에 그은 선이 생물학적 차이로 나타난 것이다." p12~13

에드윈 게일은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인간이 변해온 과정과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존을 위한 기술의 발달로 기아로 허덕이던 과거를 뒤로한 채 많은 이들에게 풍부한 식량을 가져다주었고 식량 생산의 전 지구적인 산업화는 많은 후기 산업사회에 전례 없이 다채로운 식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당분과 지방으로 가득한 고밀도의 저렴한 고칼로리 음식을 아주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비만율이 상승하고 심장병, 당뇨병, 고혈압이 급증한 '소비자 표현형으로 나타났다. 인간의 음식 섭취 적응과 오늘날의 풍족한 환경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인류가 진화시켜 온 적응과 현재 환경 사이에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화들 중에서도 가장 쉽게 이해되는 예이다.

인간은 기생충과 질병 같은 자연선택으로부터 벗어나 눈 깜박할 순간에 진화하였다. 의료 기술의 발전과 생활 여건의 개선 등으로 질병에 대항하고 다른 동물에게서 관찰되지 않는 진화한 마음도 만들어냈다. 이것은 특정한 적응에 대한 자연선택을 발생시키는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진화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을 끊임없이 구축하며 자연선택을 반복적으로 일으키는 과정에서 서로 뒤얽히고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우리는 자연적 종이 아닌 나름의 문화를 지닌 인공적 존재이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환경과 싸우며 적응해 왔다. 하지만 지금 인류의 미래는 밝다고만은 할 수 없다. 환경 오염으로 인한 인류의 위기가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브랜드 박사는 "우리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류를 생각해야 한다"라는 말을 한다. 인류의 멸종을 피하기 위해 인간의 수정란을 가지고 인류가 살 수 있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간다. 인터스텔라의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이 되기 전에 인류는 인간만으로 생태계를 구성할 수 없음을 깨닫고 외계에서 새로운 환경을 찾기보다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 환경과 어울려 살 궁리를 하는 것이 파멸을 막을 첫걸음이지 않을까.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유연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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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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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는 인연설이란 게 있다. 한 사람과 그 사람을 둘러싼 다른 사람, 자연과 우주가 모두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깝고 알아보기 쉬운 인연이 있고, 만난 적 없고 본 적도 없는 사람들. 이 모든 인연들이 모여 한 사람을 살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도, 앞으로 만날 사람도 모두 지금 나와 당신을 살아가게 해주는 고마운 인연이라는 것이다.

"나는 운명이니, 가야 할 길로 인도해 준다는 작은 신호니 그런 걸 믿지 않았어. 점쟁이의 말이나 미래를 점치는 타로도 믿지 않았고. 난 단순한 우연의 일치, 그 우연의 진실을 믿거든."

모든 냄새를 구별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앨리스와 그녀의 이웃에 살며 교차로를 그리는 것을 즐기는 화가 달드리의 이야기로 1950년대의 런던과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앨리스는 친구들과의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다 점쟁이의 예언으로 평범했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날 이후 매일 밤 낯설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게 되고 언젠가부터 이웃 달드리(이든)와의 가까워진 앨리스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산을 상속받게 된 달드리의 도움으로 점쟁이가 예언한 운명을 찾아 이스탄불로 떠나게 된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그들은 가이드 칸을 만나 운명의 여정이 시작된다. 어느 날 우연히 들어선 골목길에서 악몽을 꿀 때마다 봤던 장소를 발견하게 되고 그동안 기억 속에서 지워졌었던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한다.

"4월 25일. 이스탄불에서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유력 인사들과 지식인, 신문기자, 의사, 교사 그리고 아르메니아 상인들까지 대거 검거되었어요. 그들 대부분은 재판 없이 처형되었고, 생존한 사람들은 아다나와 알레프로 끌려가서 강제 수용되었고요."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 4월 24일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이 강제추방 과정에서 엄청난 수가 목숨을 잃은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이 학살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대량학살 사건인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은 뒤로 미룬 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 문제가 주로 다뤄졌다는 점이다. 로맨스 소설 안에 감추어진 아픈 역사는 잊혀 가고 있던 비극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회색빛 런던의 평화로운 풍경과 아름다운 이스탄불 모습을 간직한 <달드리 씨의 이상한 여행>은 여러 문화의 원형을 간직한 매력적인 끌림으로 충만한 이스탄불을 배경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신비한 여정과 생각지도 못했던 진행은 이 책을 읽어야 할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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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홍라희 컬렉션 - 강력하고도 내밀한 취향
손영옥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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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은 사실 '이건희 컬렉션'이 아니다

수집은 개인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어떤 한 개인을 들여다보는데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삼성가의 행보는 오래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병철 회장에서 시작된 삼성가의 수집은 이건희 회장을 통해 이미 2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고 그의 부인 홍라희 여사 역시 전문성을 갖춘 수집가로 삼성가의 며느리가 될 때부터 수집가의 훈련을 받아왔다. 굳이 박물관과 미술관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이미 국내 전무후무한 미술 수집을 완성하였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미술계 최고의 이슈로 자리 잡은 세기의 기증을 실행하였다.

지금껏 전례가 없었던 이 기증은 경제적 가치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규모이다. 이병철 회장 때부터 모아온 고미술품과 국내 근대 미술품 및 세계적인 서양화는 2만 3천여 점에 달하고 고미술품과 근현대 미술품을 합친 경제적 가치는 3조 원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체 미술관이 100년 동안 사야 할 미술품을 한 번에 구한 것과 같은 양이다.

이건희 컬렉션이라 불리는 지금의 미술 수집은 넓게 표현한다면 이건희, 홍라희 컬렉션이라 칭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이 책은 이건희 컬렉션이라고 불려왔던 구축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아내 홍라희의 뒷이야기, 수십 년간의 수집 과정에서 그들 부부가 믿고 의지했던 화상의 이야기와 컬렉션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들과 그것을 창조한 화가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가려진 이름 '홍라희'

이건희 컬렉션이 불리는 이 엄청난 수집품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결재권자가 이건희 회장이었다고 해도 아내 홍라희 여사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홍라희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 미술학과를 나왔고, 1995년부터 호암미술관 관장을, 그리고 2004년 리움미술관을 개관하고 오랜 시간을 관장 자리에 머물렀다. 선대부터 내려온 고미술 중심의 삼성가에서 홍라희 여사의 전문성은 삼성가의 컬렉션을 다양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건희 컬렉션의 대부분의 수집 활동을 부부가 함께 해왔다.


"저희 부부가 최초로 산 미술품은 서예가 소전 손재형 씨의 소장품들이었는데,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금강전도> 같은 명품들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행운이었지요. 회화나 도자기의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요. 그때부터 전문가들에게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 회장은 1970년대 내내 거의 매일 저녁 미술품을 보고 사들이곤 했습니다."

전체 컬렉션에서 3분의 2 이상이 1970년에서 1980년까지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 여사가 사들 수집품이다. 그녀는 한국의 미술뿐만 아니라 서양의 현대미술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고 마크 로스코, 애드 라인하르트, 프랭크 스텔라 등 지금의 컬렉션을 갖추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가장 가까운 조력자 '이호재와 박명자'

책에서는 미술계를 뒤흔든 삼성가와 수십 년간 함께한 두 화상을 소개한다. 바로 가나아트의 이호재 회장과 현대화랑의 박명자 회장이다. 1970년에 인사동에서 현대미술을 취급하며 본격적인 상업 화랑을 경영하고 있었던 박명자 회장과 1983년에 만 29세의 나이로 최연소 사장이 되며 가나화랑을 차린 이호재 회장. 박명자 회장이 당대 최고의 작가의 작품을 위주로 삼성가에 신작을 공급했다면, 이호재 회장은 생존 작가나 작고 작가의 구작과 명품 고미술을 공급해 주었다고 한다.


유명한 일화로 1979년 겨울 25살의 이호재 회장은 삼성 본관을 찾아가 막무가내로 이건희 부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고 수차례나 문전 박대를 당했지만 그 끈기에 감동한 것인지 이건희 부회장은 그를 들여보내라고 한다. 이것이 이호재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 20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나며 그들의 관계는 계속됐다.

그들이 사랑한 작품들

고미술의 관심에서 출발한 이건희 회장의 수집은 근현대미술 작가로 관심이 넓어진 건 아내 홍라희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중섭, 박수근, 권옥연 등의 구상계열 작품 외 유영국, 김환기, 김흥수 등의 추상 계열의 그림은 아내 홍라희의 조언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의 컬렉션의 특징이라면 단순 가격이 비싼 그림들이 아닌 학술적으로 큰 가치를 지닌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대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전쟁의 피해로 척박한 근대미술에 삼성가의 컬렉션으로 들어온 작품은 1400점의 근대미술은 당시 미술계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남을 것이다.



저자가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에서 느낀 부러움은 나 또한 유학 당시 느꼈다. 마츠가타 고우지로가 수집한 미술품이 국립서양미술관의 근간이 되었는데 마네, 세잔, 모네, 고갱, 고흐에 이르기까지 유럽이 아닌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츠카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가와사키 조선소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는 그림을 사기 위해 런던에 사무실을 만들고 자주 파리로 가서 그림을 골랐다고 한다. <수련> 역시 모네가 살아 있을 당시 마츠카타가 직접 가서 산 그림으로 그의 열정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일본이 소장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의 컬렉션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삼성가의 기증으로 우리나라도 모네의 수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구매조차 쉽지 않았을 고갱, 샤갈, 미로 달리, 피사로, 르누아르에 이르기까지 서양 근대미술의 소장이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기증은 숭고한 일이다. 자신의 안목과 시간, 막대한 노력을 들여 애써 수집한 소장품을 사회를 위해 내놓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영원히 기억되고, 존경받아 마땅하다.

세기의 기증으로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건희. 홍라희 부부의 컬렉션으로 국내 미술계는 다시 활력을 찾고 있다. 그들의 기증의 가장 큰 의미 중 하나는 빠져있던 컬렉션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엄청난 가격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던 김환기 작가의 작품들과 박수근, 이중섭 작가의 대작들을 기증받음으로써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손영옥 미술평론가의 <이건히. 홍라희. 컬렉션>으로 그들의 컬렉션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와 그들이 사랑한 그림과 작가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시간이었다. 삼성가의 컬렉션을 이해할 가장 흥미로운 도서로 남을 거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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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시간표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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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없는 척, 모르는 척해야 해요. 그래야 우리가 계속 일하고 살 수 있어요."

우리 곁을 맴도는 괴담의 매력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토록 호기심과 오감을 자극하며 빠져들게 하는 걸까? 아마 그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자연스럽지만 누구나 겪을 만한 일은 아니기에 더욱 특별하고 오싹한 거라 생각한다. 다음이 궁금해지는 묘한 분위기로 우리를 낯설고 기이한 곳으로 데려간다.

지난해 <저주 토끼>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큰 화제를 모았던 정보라 작가의 <한밤의 시간표>는 제대로 된 귀신 이야기를 쓰겠다던 그녀의 예고대로 그녀만의 독특한 귀신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번 작품은 연작소설의 형태를 띤 이야기로 귀신들인 물건을 보관한 연구소에서 직원들이 겪은 각종 기묘한 이야기와 그 귀물에 얽힌 사연을 풀어놓았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우리 일상에서 있음 직한 도시괴담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더욱 섬뜩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올라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계단, 소설에서 가장 큰 소재로 자리 잡은 귀신들인 물건이라는 매력적인 소재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귀신 들린 물건들을 모아놓은 연구소에서 한밤의 시간표에 따라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복도를 돌며 반복적으로 잠긴 문들을 확인하는 이 일은 찬이 이른바 '정상적'이라는 사람들과 지나치게 접촉하지 않으면서도 경제활동을 하고, 아주 최소한이나마 사회활동을 하고 일과를 정해 움직이고, 생활의 규칙과 질서를 조금씩 다시 정립해나가는 첫걸음이었다." p23

정체불명의 물건을 관리하는 연구소에서 귀신들린 물건들에 얽힌 일곱 편의 이야기는 귀신들이 깨어나는 밤의 연구소에서 이루어진다. 주로 주인공이 선배에게 연구소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 주된 구성이다. 첫 단편인<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에서부터 보여준 계단과 터널이라는 공간이 주는 공포감과 <저주 양>에서 느꼈던 권선징악 뒤의 애틋함, <고양이는 왜>에서 등장하는 한 인간의 집착까지 단편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다가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져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정보라 작가의 이야기들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작품들 속에 사연들은 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떳떳하지 못한 만남과 힘없는 여성의 학대와 성폭력 등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그녀 다운 전개였다.

저자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 연구소라는 기묘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연구소의 잠겨진 방을 하나씩 돌아다니며 들을 수 있는 서늘한 이야기 이면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정보라 작가의 <한밤의 시간표>는 우리를 더욱 다채로운 호러의 세계로 안내하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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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 스파이 -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을 필사적으로 막은 과학자와 스파이들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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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월요일 오전 8시경. 미국의 B-29 전투기가 일본 히로시마 시에 원자 폭탄 하나를 투하했다. 길이 3m, 무게 약 4t의 이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8만여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도시는 전부 잿더미로 변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8월 9일, 또 다른 B-29 미국 전투기가 이번에는 나가사키 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약 4만 명이 즉사했다. 이후 두 도시에서 방사능 노출과 관련해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연합군의 항복 요구에 끝까지 버티던 일본 왕 히로히토는 결국 나가사키 공격 6일 만인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이로써 약 6년간의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2차 세계대전은 인류사 최초로 원자 폭탄이 전쟁에 사용됐고, 수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혹한 전쟁이었다. 만약 미국인 아닌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가 먼저 개발해 전쟁에 사용하였다면 2차 세계대전의 판도는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베스트셀러 작가 샘 킨의 다섯 번째 책인 <원자 스파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손에 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과학자와 스파이로 구성된 인원들이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내용이다.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2차 세계 대전의 뒷이야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첫 등장인물로는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 출신에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으로 스파이가 된 모 버그와 독일의 원자폭탄 벙커를 파괴하기 위해 자폭한 조 케네디 주니어, 부역자로 위장해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마리 퀴리의 사이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알소스 부대의 수장으로 파견되어 활약했던 보리스 패시 등 2차 세계대전의 숨겨진 영웅들의 활약을 그려내고 있다.

원자폭탄 개발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중수를 둘러싼 사건들, 원자폭탄의 정보를 얻으려고 적진에서 활약하는 첩보원들의 모험담도 흥미로웠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역시 독일 원자 폭탄의 주역이었던 하이젠베르크의 이야기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우라늄 클럽의 중심인물이었다. 도덕적인 문제로 논쟁했던 연합군 과학자들과 나아가 나치의 원자폭탄 프로젝트에서 애국심과 인류애 사이의 갈등으로 괴로워했던 하이젠베르크와 독일 과학자들의 고민 등 원자폭탄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느끼게 될 도덕적 딜레마를 생각할 수 있었다.

원자폭탄 개발에 연루된 많은 인물들은 자신들이 만들게 될 살상 무기의 파괴력을 심각하게 따져보지 못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도리어 그것이 정말 가능한지에 대한 호기심을 풀고 싶어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히틀러는 저지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면죄부를 애초부터 가능하게 했고, 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크리스퍼 놀란 감독의 12번째 영화 <오펜하이머>가 곧 개봉이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핵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한 역사에 대한 전기 영화로 원자 스파이를 읽은 독자라면 반가워할 만한 소식이다. 개봉 전 샘킨의 <원자 스파이>를 읽고 관람한다면 더욱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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