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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얼굴들
박주영 지음 / 모로 / 202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 역사의 흔적들을 살펴보면 무시할 수 없는 특색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류는 공동생활을 위해 필요한 룰을 만들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의 인류 생활을 들여다보면 이 점은 더욱 명확해진다. 비록 국가 단위의 제한적인 경험이기는 하였으나, 인류는 역사의 각 단계마다 고난 극복을 위한 새로운 룰을 헌법에 새기면서 발전해 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법이란 국민의 생활 문제와 직결된다. 생활이 공간적으로 확대되면서 사회가 되는 것이고, 시간적으로 확대되면서 역사가 된다.
나는 판단자임과 동시에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다.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내가 본 세상의 일부가 사라진다.
법이라는 규정 아래 누군가의 판단으로 중재를 하며, 옳고 그름을 정하는 일은 우리가 태어나가 훨씬 이전부터 정해져 내려온 일이다. 그 안에서 새로운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헌법적 대응으로 공공의 안녕과 질서유지에 힘쓰는 사람들. 그중 법이라는 규정과 함께 관찰하고 기록하는 판단자인 판사라는 직업의 무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인간으로서의 연민과, 공정한 판사로서의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해야 하는 판사라는 직업의 무게를. 더 나은 세상으로의 한 발자국을 위해 그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사회의 질서는 유지되어 왔다.
박주영 판사는 판단자로서의 공정함을 유지한 채 법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안타까운 사연들과 구원되고, 처벌받아야 할 사건들을 실체를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며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
책에서는 태어난 지 이틀 만에 부모에게 버림받아 평생을 보육원에서 자라다 홀로서기를 준비하던 고등학생의 자살, 사랑받아야 할 부모에게 구타당해 생명을 잃은 아이, 돈이 없어 일부러 불을 질러 교도소에 들어가려는 노인 등 가슴 아픈 사연들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입장이라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아이를 살해하는 부모의 범죄행위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사람마다, 개인마다 틀린 가치관을 가지고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도, 고군분투하는 목적도, 따지고 보면 모두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자식이 언제나 축복으로만 인식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갈등인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은 부모가 노력과 사랑을 어떻게 배분하는가와 관계가 있다. 자식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랑과 부모가 만족하는 사랑은 항상 다르기 때문이다.
살인은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 가운데 가장 극악무도하고 책임이 무거운 범죄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렇게 취급되고 있을까? 우리 사회에는 처벌받지 않는 살인자들도 있으며, 사람을 죽이고 비난조차 받지 않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어떤 살인은 박수와 환호를 받기도 한다. 사회에는 살인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다양하고, 정상참작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유책성, 즉 어떤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죄가 있는가'는 비난받을 만한가, 응분의 벌을 받아야 하는가를 따지는 도덕적 쟁점이다. 죄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한 행위를 대가로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어떤 사회에서든 상식적인 성인이라면 모두가 이러한 평범한 도덕을 이해하고 지킨다. 처벌의 도덕적 정당성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들을 종합하고, 분석해 올바른 판결을 실천하는 것은 이 책을 써 내려간 박주영 판사의 일생의 바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재판이란 지나가버린 사건에 대해 증거를 통하여 그러한 사실이 존재하였음을 추론하고 법리를 적용하여 결과를 내놓는 과정이다. 지나간 과거의 일을 적합한 증거를 찾아서 진실을 밝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과정에서 법 해석의 유연성을 갖고 자유와 평등, 인권이라는 법의 본질에서 공정한 판단을 해나가는 일이야말로 법관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박주영 판사의 이상대로 사법권이 가진 모든 이들이 법이 전부라는 생각을 갖지 않고, 사회문제와 사회의 여망을 이해하며, 사법은 권력이 아니라 봉사임을 깨닫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법관을 이상으로 꿈꾸며 홀로 외로이 싸우는 개인을 방치하지 않는, 단 한 명도 희생시키지 않는 법관으로의 삶을 이어나가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