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시간 - 100곡으로 듣는 위안과 매혹의 역사
수전 톰스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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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게 되었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중년층이 접할 음악을 어린 나이부터 들으면서 어느덧 30년을 넘게 들어오고 있다. 오랜 시간을 들어오면서 주로 듣는 레퍼토리가 있다면 성악곡(종교음악, 가곡), 교향곡, 그리고 실내악과 독주곡 위주이다. 그중에서도 피아노를 포함한 실내악과 독주곡이 상당수를 차지하는데 그만큼 나의 음악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크에서 현대에 이르는 대표적 피아노 작품 선택하여 누구나 쉽고 간편하게 참조할 수 있도록 정리한 매우 포괄적인 피아노 문헌이다. 건반 음악을 위한 작품의 역사에 있어서 각 작곡가들의 위치를 잘 대표할 수 있는 많은 작품들을 제공하고 있다. 인류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을 바흐부터 아르보 패르트까지 그녀가 엄선한 세기별 대표적인 작곡가들의 곡들을 만나볼 수 있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곡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골드베르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꼽을 것이다. 물론 나도 글렌 굴드의 음반을 좋아한다. 하지만 저자의 지적대로 하프시코드로 연주할 의도로 만들어진 곡은 연주자가 본연의 소리를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에서라고는 할 수 없지만 몇 년 전부터는 셀린느 프리쉬의 하프시코드 연주를 즐겨듣고 있다. 어떤 면에서 피아노 음보다는 거슬릴 수 있는 하프시코드지만 프리쉬의 음반은 동글동글한 음으로 거부감이 없어 자주 듣게 되는 음반이다.

리스트의 애호가가 아니면 잘 모를 수 있는 <잿빛 구름>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리스트는 최초의 현대적 관점에서 피아니스트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작곡가이자 사색가이며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연주자로, 피아노 연주에서의 거의 모든 미래적 다양성을 구체화시켰다. 그는 종종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마치 자신의 곡인 듯 그의 고유한 방식으로 편곡하려고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지만(쇼팽은 자신의 작품 중 하나가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어졌다는 것을 듣고 매우 불쾌해했다.) 악보와 작곡가의 지시는 대단히 충실히 따랐으며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느껴질 때는 더욱 그러했다. 리스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위였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 도입부를 연상케 하는 <쟃빛 구름>은 리스트의 후기 피아노 소품 중 <우울한 곤돌라>와 함께 가장 유명한 곡이다. 리스트 피아노 전곡 녹음으로 유명한 레슬리 하워드의 음반을 즐겨 듣는데 그의 연주 스타일과 <잿빛 구름>의 우울함이 잘 어울리는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드뷔시는 아라우의 <달빛> 연주를 처음으로 듣고 드뷔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리스트 이래 가장 독창적인 피아노 음악 작곡가로서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 맞먹는 섬세한 감정을 몇 겹의 음들을 동시에 사용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하였고 새로운 페달의 사용으로 그의 작품 분위기를 살려주었다. 연주자인 저자 입장에서의 전주곡 제2권에 대한 전체의 해설은 저자가 얼마나 드뷔시의 곡에 애착을 가지고 진지한 입장에서 연주해 왔는지 느끼게 해주는 흥미로운 글이었다. 개인적인 추천 음반은 샤플랭의 음반을 추천한다. 바부제나 플라네, 로제의 음반도 충분히 명반이지만 예민한 감각, 극도로 섬세한 터치는 샤플랭의 음반을 추천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물론 주관적인 생각이니 참고만 하기를 바란다.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곡을 가장 많이 작곡한 현대 작곡가 중의 하나이다. 그의 초기 작품은 후기 낭만파에 속하며, 그 시기에 이미 무르익은 자질은 근작에 속하는 소나타 7번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전쟁 소나타로 불리는 그의 6~8번 특히 피아노 소나타 7번은 전쟁 소나타 중 가강 유명한 곡이다. 저자는 7번의 초연을 맡은 리히테르의 에피소드와 그녀가 생각하는 피아노 소나타 7번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을 설명하고 있다. 리히테르의 연주 외에도 최근에 발매된 스티븐 오스본의 히페리온 음반도 굉장히 좋게 들었고, 프레데릭 치우의 아르모니아 문디의 음반도 깊이 있는 연주가 아닐까 한다.

클래식 음반 판매율의 최하위를 차지하는 건 현대음악이다. 현대음악은 익숙해질 수 있는 음악은 아니며 확실한 의지 없이는 친숙해지기 힘들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현대 음악 작곡가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고레츠키와 패르트다. 에스토니아 작곡가인 아르보 패르트는 ECM에서 발매된 <알리나를 위하여>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종의 울림을 연상케 하는 이 연주는 명상적일 만큼 단조롭지만 아름답게 다가온다. 흔치 않은 <알리나를 위하여>에 대한 연주자의 위치에서 전해지는 곡의 해석과 느낌은 이 책의 수많은 매력 중 하나이다.

수전 톰스의 <피아노의 시간>은 그녀가 엄선한 피아노 음악 레퍼터리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각 시대의 전반적인 피아노음악의 상황, 대표적인 작곡가들의 작품들, 그 스타일의 특징 등을 상당히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경험이 담긴 흥미로운 해설과 QR코드의 삽입으로 바로 들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하겠다. 이 책은 피아노 음악을 입문하려는 이들, 학문적으로 공부하려는 이들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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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반쪽사 - 과학은 어떻게 패권을 움직이고 불편한 역사를 만들었는가
제임스 포스켓 지음, 김아림 옮김 / 블랙피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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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소개된 대부분의 과학적 지식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지금까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발견과 발전의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누락되고 배제되었던 숨겨진 사람들과 이야기들. 제임스 포스켓의 <과학의 반쪽사>는 지금껏 과학 교육의 시스템적 문제로 서구 열강 위주의 과학사에만 집중돼 조명 받지 못했던, 하지만 과학사에서는 빠져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한 업적을 이룩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윈, 뉴턴, 아인슈타인 등의 유명 과학자들의 위대한 업적의 소개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과학자들이 수행했던 중요한 역할을 소개하며 위대한 업적을 이룬 유명 과학자들도 전 세계의 여러 사람들과 협동을 통해 오늘날의 과학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오늘의 <과학의 반쪽사> 완독 후 실려 있는 수많은 업적 중에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거나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을 짤막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한 1700년대 도쿠가와의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1700년대의 일본의 통치자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우연히 삼촌이 한 네덜란드 상인에게 받은 책을 발견했는데 요한 존스턴의 <네발 동물의 자연사>였다. 호화로운 삽화가 실려 있는 이 책에서 가장 매료되었던 동물은 코끼리였다. 자기 소유의 코끼리를 원했던 도쿠가와는 일본과 우호적인 무역 관계를 쌓기 위해 노력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아시아 코끼리를 들여오기로 합의했고 나가사키에 도착한 코끼리는 교토로 옮겨진 다음 에도의 도쿠가와에게 전해졌다. 그 후 도쿠가와와 그의 후계자들은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외뢰 동물을 들여왔다. 이국적인 동물에 대한 도쿠가와의 관심은 단순히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미래에 대해 우려했고, 자연 세계의 탐구가 번영의 열쇠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도쿠가와는 나라의 번영을 위해 값비싼 외래종 대신 대체할 만한 자국의 종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만물의 분류'라는 제목이 붙은 조사는 3590개의 항목을 포함했고 이것은 동식물뿐 아니라 광석, 금속 원석까지 포함된 조사였다. 일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천연자원을 소유하고 있었고 특히 유럽 무역 회사들이 탐내는 구리와 장뇌유가 풍부했다.



18세기 초에는 중국 자연사 연구의 가장 좋은 점과 일본의 식물에 대한 최신 연구를 결합해 책을 저술한 일본의 박물학자 가이바라 에키켄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다. 당시 다른 학자들은 중국 학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만족하고 있었고 특히 일본에 서식하지 않는 외래종을 많이 다루고 있는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그는 일본에서 실제 볼 수 있는 종을 정리하기 위해 일본 전역을 여행하며 800곳이 넘는 마을의 자연환경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힘겨운 여행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야마토 본초>를 출간했다. 그의 <야마토 본초>는 이시진의 <본초강목>을 그대로 반영하되, 단순히 중국어 텍스트에만 의존하지 않고 지역적인 다양성을 반영했고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358종을 추가했다.



지난 140년간 벌어졌던 논쟁들을 뒤돌아볼 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다윈주의적 패러다임의 견고함이다. 다윈주의적 이론과 경쟁했던 세 가지 주요 이론, 즉 변환주의, 라마르크주의 정향 진화론은 1940년 무렵 완전히 반박되었으며,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그 후 60년 동안 다윈주의를 대할 만한 어떤 이론도 제기되지 않았다. 1859년 <종의 기원>이 출간된 후 19세기 러시아 과학자들은 다윈의 주장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생물의 진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학의 선구자 기억되고 있는 메치니코프도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 받아들인 진화 사상가이다. 1860년대에 독일에서 공부하는 동안 찰스 다윈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의 <종의 기원>의 독일어 번역본을 구입하고 열정적으로 탐구했다. 다윈의 자연선택이 하나의 종 내 개체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강조했고, 메치니코프의 관점 역시 생명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자원 경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생존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진화에 대한 메치니코프의 관점을 형성한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자 구조를 발견한 것은 영국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펀드가 이룩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비유럽 과학자들이 현대 과학의 역사에서 배제된 대표적인 사례로 1911년 러더퍼드의 영향력 있는 논문이 나오기 전 이미 정확히 같은 주제에 대한 일련의 나가오카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물리학에 중요한 공헌을 한 인물로 물질 자체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변화를 가져다준 인물이었다. 수 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물질의 본질에 대해 확실히 밝히지 못하였고 물질의 기본 구조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나가오카는 이 논쟁을 잠재우고 그 과정에서 원자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그는 복잡한 수학적 계산을 바탕으로 원자가 거대한 하나의 양전자 입자 주위를 도는 음전하 전자 무리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서로 다른 문화와 과학 분야가 모임에 의해 물리학과 화학 분야의 결합으로 얻은 성과였다. 이것은 전 세계 문화 교류를 바탕으로 현대 물리학에서 중요한 과학적 돌파구가 이루어졌다는 중요한 사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업적들은 서양 강국만이 이룩한 결과물이 아니며, 지금껏 그랬던 적도 없었다. 지금까지 표면적인 부분만을 보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의 반쪽사>는 기존의 통념을 깨트리고를 전 세계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현대 과학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 세계의 형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정확한 근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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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눈사람
최승호 지음, 이지희 그림 / 상상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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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었던 책의 내용 중에 좋은 시는 '잘 만든 노래'이거나 '새로운 말' 둘 중에 하나가 아니겠냐는 견해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이나 들은 지금이나, 그 불확실한 정의에 시를 보는 고정관념이 생겼다는 생각은 지울 길이 없다. 더 자세한 논의가 따라야 할 이야기이겠지만, 대체로 현대 현대 시의 전반적 추세는 '잘 만든 노래'보다는 '새로운 말'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이고 있는 편이 아닐까 한다.


최승호 시인 역시 남들이 다루지 않는 미지의 소재를 발굴하기 위해 매진하고, 기성의 주제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애면글면하며, 새로운 시문법을 찾기 위해 다양한 형식 실험도 마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표현한 적이 없는 참신한 언어를 찾기 위해 고투한다.


그의 신작[마지막 눈사람]은 1997년 출간된 시집[여백]의 제1부 '눈사람' 중 마지막 작품인 [그로테스크]를 27개의 장면으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27개 장면에 G1부터 G27까지의 번호를 붙였고, 여기서 알파벳 G는 시의 제목인 'grotesque'의 머리글자이다. 지구에 홀로 남은 눈사람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시집은 독백에 대한 주석 형식의 단상들과 눈사람과 연관성이 있는 시들이 배치되어 있는 흥미로운 구조이다. 그리고 폐허가 된 도시를 점령한 눈사람의 비극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삽화 역시 [마지막 눈사람]의 매력이다.


"어느 날 나는 지상에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G2


"나는 얼음의 성이었다. 하얀 빙벽을 두른 고독으로 얼음의 자아를 고집했다. 아무도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사랑의 불길조차 나에 닿으면 꺼져버렸다. 빙벽의 시간 속에서, 가족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거만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거만하다고 생각지 않았을까. 얼음 동굴의 얼음도끼들, 내 수염이었던 고드름들, 결빙의 세월을 길게도 나는 살아왔다. 빙하기로 기록해둘 만한 자아의 역사!

 

 

"어쩌면 존재의 이유라는 게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옥을 위해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감옥이 존재한다. 이상한 논리지만, 적어도 이 논리는 어처구니없이 고독하고 암담한 나의 현존보다는 덜 이상하고 덜 비논리적이다. 이론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면 이상한 이론들을 많이 만들어서 불안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켜야 한다. - G17


"아무 쓸모없이, 그러나 존재한다. 노을은 그렇다. 오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굴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노을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노을은 질문을 위해 답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노을은 벌겋다. 노을이 벌겋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사실 벌건 것은 하늘이지 노을이 아니다. 하늘은 붉을 수도 있고 푸를 수도 있다. 그러나 노을은 다르다. 푸른 노을은 없다. 검은 노을도 없고 하얀 노을도 없다. 대체 누가 노을이란 말을 만든 것일까? 노을은 실체가 없다. 그러나 벌겋게 눈앞에 펼쳐진다. 노을은 그렇다. 없다고 하자니 벌겋게 있고, 있다고 하자니 실체가 없다.


"들을 사람 하나 없는데 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일까.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봄이 와야 나는 죽을 수 있고 말을 멈출 수가 있다. - G26


"사람의 몸을 받고 몸에 갇혀서 나는 옹색해졌다. 이 몸뚱이만을 나로 여기면서 나에게는 타자들이 생겨버렸다. 고집도 생겼다. 몸에 대한 집착도, 자기에도, 나에 대한 측은지심도 생겨버렸다. 사람의 몸을 받고 나에게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름에 갇히고 욕망에 갇힌 채 그러나 과연 그것들이 나인지를 깊이 의심하지 않으면서 나는 살아왔다. 나는 어떻게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지금껏 살아온 것일까. 사람의 몸을 받고 몸에 갇히면서 나는 옹색함의 무거움을 갖게 되었다. 답답한 나! 나는 오래전에 내가 떠났던 세계를 나의 옛 몸처럼 바라본다. 몸 받은 뒤에 점점 멀어진 세계, 한때 나는 세계였으나 지금은 세계와 분리된 옹색한 자일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의 세계를 무수한 내가 파괴한다.

 


"그리하여 이렇게 밤의 옥상 위에서 고독만이 나의 뼈라고 생각하면서,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먼 봄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G27


"믿고 싶지 않겠지만 어느 날 당신이 태양계의 장님이 되고 은하계의 귀머거리가 되어서 광물질계의 한 벙어리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나 아닌 것들이 모여서 나를 잠시 이루었다. 해체되듯이, 당신도 당신 아닌 세계로 흘러드는 날이 있을 것이다. 이슬, 바람, 흙, 별, 그것들이 본래 당신의 얼굴 아니었나. '눈다랑어'

 

 

 

산문시의 형태로 지어진 이 작품은 풍자 우화를 통한 사회 비판을 담은 기념비적 소설 [동물농장]을 떠올리게 한다. 조지 오웰이 전하고자 하는 사회의 부조리함, 불평등을 드러내는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썼던 대표적인 소설이다. 이것은 오랜 시간을 거쳐 인간의 허위의식과 문명의 진보를 위한 인간의 탐욕을 비판해 온 최승호 시인의 사회문제의 전반적인 우려를 담은 지금까지의 시들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마지막 눈사람]에서 보여준 고독과 절망이 가득한 종말이란 어쩌면 시구 속에 담긴 깊은 뜻처럼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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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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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국내에서 SF 소설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과거의 국내 출판 시장에서는 유독 SF라는 장르는 큰 인기를 얻지 못해서 일까 SF 전문 소설가 역시 흔하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게 10년쯤 지났을까 SF 소설가라고 자청하며 한국문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작가들이 등장했고 지금에 와서는 일반 문학 독자들도 좋아할 만한 매력적인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국내 SF의 전성기를 이끌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는 전성기 이전부터 꾸준히 독자들의 지지를 받아온 작가가 있다. 바로 배명훈 작가이다. 2005년 데뷔 이후부터 기발한 상상력과 탄탄한 스토리 전개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그의 소설들은 '배명훈'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절대적인 신뢰를 얻으며 사랑받아 왔다.

그의 신작 소설집[미래과거시제]는 [예술과 중력가속도]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세 번째 소설집으로 아홉 편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최근 김희선 작가의 [빛과 영원의 시계방], 켄 리우 작가의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와 함께 가장 독특하고 완성도 높은 소설로 읽는 내내 감탄하며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표제인 <미래과거시제>는 언어학과 시간 여행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한 연인의 신비로우면서 애처로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은경은 미로 같은 학교 건물에서 길을 잃고 누구도 이용하지 않는 오래된 계단에서 은신을 만나게 된다. 이 세계의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잘생긴 외모가 먼저 눈에 들어온 은경은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을 위해 그를 찾아다니다, 반년이 지나 그를 만나게 되고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잘 생긴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던 은신은 모두가 가깝게 지내고 싶은 존재이지만 정작 본인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보다는 혼자이고 싶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인사 한마디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은신, 젊은 날의 사랑이 그렇듯 세상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사라진 것은 은경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무언가를 잃는 것이 버거운 나이인 만큼 아파하고 힘들어했다. 시간은 흘러 튀르키예어와 한국어를 연구하던 중 과거 은신과의 대화와 문자에서 시제 선어말 사용의 이상함을 느끼고 그가 시간여행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강은신은 바로 '그 일'을 기억해 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진술했다. 그러면서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은경을 의아하게 여겼다. 자신은 그럴 수 있어도 은경은 그럴 수가 없어서였다.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시간을 살아가는 은경은 절대로 그 일을 기억해서는 안 됐으니까."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접히는 신들>은 주인공 소희는 화성을 목적지로 둔 우주선에서 20년 만에 친구 은경을 만나게 된다. 학창 시절 종이접기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던 그녀는 공부를 못했기 보다는 공부하는 법 자체를 모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종이접기 하나만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녀는 납작한 종이를 거의 살아 있는 듯 보이게 할 정도로 정교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 종이접기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접었다 펼쳐놓은 주름을 보고 자신이 만들 무언가를 머릿속에 재현해 내는 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15년 뒤 소희는 민간기구연합에서 행정직에 근무했고 우주 종사자의 소식을 전해주던 소식지에서 은경이 책임급 연구원으로 취직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취직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우주 종사자의 눈에는 엄청난 예산을 집행하는 국방정보산업의 핵심 그룹에 주요 결정자로 영입되었다는 소리 나 다름없었다. 그녀와의 만남으로 은경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국가 기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종이접기라는 거 우주에서는 꽤 유용한 기술이거든. 종이를 접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접는 거지만. 제일 간단한 건, 우주선에 달린 날개 같은 거 있지? 태양전지판. 날개를 펼친 채로 우주선을 발사할 수는 없으니까 접어서 날려 보냈다가 궤도에 오르면 원래 용도대로 펼치는 식으로 디자인을 하는 거야. 공간을 최대한 덜 차지하게 잘 접어놨다가 사고 없이 깔끔하게 촥 펼쳐지게 하는 게 관건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거든."

마지막 단편인 <알람이 울리면>은 판타지 오디세이 기획 전시에서 '징후'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던 소설이다. 작은 눈송이가 내리던 밤, 스케이트를 타는 아내의 배경에서 문득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완벽하게 돌아가던 공원 풍경에서 왼쪽 커브가 아닌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며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오른쪽으로 커브를 도는 스케이트장은 없어."

오른발잡이가 대부분인 사회에서는 모든 트랙은 반시계 방향으로 돌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돌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함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 후 의심해 본 적 없는 일상에서 하나 둘 스케이트 장에서 느꼈던 이상한 위화감을 다시 느끼기 시작한다.

배명훈 작가의 신작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문학의 발전은 장려해야 하는 일이고 응원받아 마땅하다.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도달한 지금, 낯설기만 했던 장르문학이 환영받는 시대가 되었고 유독 한국에서는 '순수문학'과 구분되어 오락성에 가까운 대중문학으로 인식되어 일반 독자들에게 외면당해 오던 장르문학이 역사와 권의를 지닌 순수 문학지에 선을 보이게 된 것은 문학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며 앞으로의 한국문학에 있어서 커다란 획을 그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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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걸 크러시 - '남성' 말고 '여성'으로 보는 조선 시대의 문학과 역사
임치균 외 지음 / 민음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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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우리 민족은 결혼, 상장례 일상생활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유교적 예을 정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종법의 실천을 통해 행해졌고 종법은 주자가 주장하는 효 실천의 방법으로 종법의 실천은 남녀 차별과 적서 차별이라는 가부장적 지배문화를 조성하였다. 그 결과,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다소 파격적인 제목이 눈에 띄는 [조선의 걸 크러시]는 남성의 그늘에서 벗어나 역사의 주체가 되어 살아간 여성들이 등장하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여성들을 조명하고 있다.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부모의 복수나 며느리를 위해 원한을 갚는 여성 등 복수를 실천한 여성들을 모았고 2부에서는 왜장을 죽인 기생의 이야기, 의병장이 된 여성의 이야기, 조선의 경찰인 다모의 이야기 등 고전 소설의 영웅을 담았다. 3부에서는 남성을 능가하는 여성 시인, 소설가, 학자 등 그녀들만의 방법으로 자아를 실현한 여성들을 모았고 4부에서는 추한 외모를 극복한 여성, 전쟁 중에 사랑과 가족을 지킨 여성 등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지켜나간 여성들을, 마지막 5부에서는 제주에서 정조의 부름에 한양과 금강산을 유람했던 여성 기업가, 조선 최고의 여가수 등을 담은 뛰어난 기개와 재주를 지닌 여성들을 담고 있다.


조선의 여성 검객


안석경이 지은 [십교만록]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로 한 여성이 소응천을 찾아와 첩이 되겠다며 허락해 달라고 하지만 그는 여성의 정체를 의심하며 거절한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왔다는 그 여성을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 그 여성은 술과 안주를 차려 놓고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기 시작하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여성은 어느 양반집 아가씨의 몸종이었다. 아가씨가 9살이 되는 해에 권세가에 의해 가문이 멸망당하게 되고 어렵게 목숨을 건진 아가씨와 몸종은 복수를 꿈꾸게 된다. 그녀들은 남장을 해 검객을 찾아 길을 나섰고, 그렇게 2년을 헤매다가 검객을 만나 검술을 배워 하늘을 날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된다.

마침내 원수의 집을 찾아간 그녀들은 인정사정없이 잔인한 복수를 하게 된다. 그렇게 복수를 끝낸 그들은 날 듯 가볍게 돌아왔고 아가씨는 목욕을 마치고 부모님의 무덤으로 찾아간다. 무덤 앞에서 복수했음을 고한 그녀는 원수를 처단한 검으로 자결을 택하게 된다.

"달빛을 타고 춤을 추듯이 칼을 휘둘렀습니다. 칼날이 닿는 곳마다 머리가 떨어져 금방 수십이 되었습니다. 원수의 집 안팎식구들이 모두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습니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우리는 춤추듯 날아서 돌아왔습니다."



이매창, 시골 기녀의 시가 문인들의 마음을 흔드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오랜 친구였던 고결한 성품의 여성이 있었다. 나 역시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처음 들어봤으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이름인 이매창이라는 여성이다. 중인 신분인 아버지와 관아에 소속된 관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 역시 부모의 신분으로 인해 지방 관아에 소속된 관기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그리 예쁘지 않았지만 춤과 노래를 잘했으며 거문고를 특출나게 잘 다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보통의 기녀들도 가진 재주이기에 특별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다른 기녀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기녀들이 갖추어야 할 기예 외에도 시와 문자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의 글솜씨는 전국으로 퍼졌고 학자인 허균의 귀에까지 들어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화우 흩날리재 울며잡고 이별한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루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당시 유명한 시인이었던 유희경과 이매창의 사랑 이야기도 흥미로웠는데 평소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유희경은 자신과 같은 천민 출신일 뿐만 아니라 글에도 재주가 있었던 그녀이기에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고 유희경의 그리움을 담은 매창의 시가 가슴에 와닿았다.


석개, 조선 최고의 여가수, 나는 노래하리라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조선 시대 최고의 가수였던 석개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녀는 중종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와 혼인한 여성군 송인의 여종으로 예쁜 외모와는 거리가 있었다.

"얼굴은 늙은 원숭이처럼 생겼고, 눈은 좀 대추나무로 만든 화살같이 찢어졌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 석개는 여종으로의 신분도 잊은 채로 노래만 불렀고 매를 맞아도 그녀는 노래 부르기는 바뀌지 않았고 그녀의 노력을 가상하게 생각한 여성군 송인은 석개에게 노래를 배우게 한다. 곧 그녀는 장안에서 제일가는 명창이 되었고 높은 권세가들의 연회에 불려 다니며 당대의 인정을 받게 된다.

1500년대의 석개가 있던 조선은 바로크 이전의 르네상스 중후기이다. 고음악이라고 불리는 바로크 이전의 조스캥, 탈리스, 라소는 낯설지 않으면서 우리 음악사에 무지했던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이야기였다.

남성 중심의 조선에서 여성의 기록이란 매우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경이롭고 흥미로운 소재이다. 이 책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조선의 여성들을 살펴보며 가부장적 문화에 종속되어 살아가던 여성들이 당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들을 해내며 살아간 기록을 살펴볼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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