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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눈사람
최승호 지음, 이지희 그림 / 상상 / 2023년 2월
평점 :
최근 읽었던 책의 내용 중에 좋은 시는 '잘 만든 노래'이거나 '새로운 말' 둘 중에 하나가 아니겠냐는 견해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이나 들은 지금이나, 그 불확실한 정의에 시를 보는 고정관념이 생겼다는 생각은 지울 길이 없다. 더 자세한 논의가 따라야 할 이야기이겠지만, 대체로 현대 현대 시의 전반적 추세는 '잘 만든 노래'보다는 '새로운 말'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이고 있는 편이 아닐까 한다.
최승호 시인 역시 남들이 다루지 않는 미지의 소재를 발굴하기 위해 매진하고, 기성의 주제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애면글면하며, 새로운 시문법을 찾기 위해 다양한 형식 실험도 마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표현한 적이 없는 참신한 언어를 찾기 위해 고투한다.
그의 신작[마지막 눈사람]은 1997년 출간된 시집[여백]의 제1부 '눈사람' 중 마지막 작품인 [그로테스크]를 27개의 장면으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27개 장면에 G1부터 G27까지의 번호를 붙였고, 여기서 알파벳 G는 시의 제목인 'grotesque'의 머리글자이다. 지구에 홀로 남은 눈사람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시집은 독백에 대한 주석 형식의 단상들과 눈사람과 연관성이 있는 시들이 배치되어 있는 흥미로운 구조이다. 그리고 폐허가 된 도시를 점령한 눈사람의 비극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삽화 역시 [마지막 눈사람]의 매력이다.
"어느 날 나는 지상에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G2
"나는 얼음의 성이었다. 하얀 빙벽을 두른 고독으로 얼음의 자아를 고집했다. 아무도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사랑의 불길조차 나에 닿으면 꺼져버렸다. 빙벽의 시간 속에서, 가족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거만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거만하다고 생각지 않았을까. 얼음 동굴의 얼음도끼들, 내 수염이었던 고드름들, 결빙의 세월을 길게도 나는 살아왔다. 빙하기로 기록해둘 만한 자아의 역사!
"어쩌면 존재의 이유라는 게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옥을 위해서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감옥이 존재한다. 이상한 논리지만, 적어도 이 논리는 어처구니없이 고독하고 암담한 나의 현존보다는 덜 이상하고 덜 비논리적이다. 이론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면 이상한 이론들을 많이 만들어서 불안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켜야 한다. - G17
"아무 쓸모없이, 그러나 존재한다. 노을은 그렇다. 오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굴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노을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노을은 질문을 위해 답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노을은 벌겋다. 노을이 벌겋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사실 벌건 것은 하늘이지 노을이 아니다. 하늘은 붉을 수도 있고 푸를 수도 있다. 그러나 노을은 다르다. 푸른 노을은 없다. 검은 노을도 없고 하얀 노을도 없다. 대체 누가 노을이란 말을 만든 것일까? 노을은 실체가 없다. 그러나 벌겋게 눈앞에 펼쳐진다. 노을은 그렇다. 없다고 하자니 벌겋게 있고, 있다고 하자니 실체가 없다.
"들을 사람 하나 없는데 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일까.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봄이 와야 나는 죽을 수 있고 말을 멈출 수가 있다. - G26
"사람의 몸을 받고 몸에 갇혀서 나는 옹색해졌다. 이 몸뚱이만을 나로 여기면서 나에게는 타자들이 생겨버렸다. 고집도 생겼다. 몸에 대한 집착도, 자기에도, 나에 대한 측은지심도 생겨버렸다. 사람의 몸을 받고 나에게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름에 갇히고 욕망에 갇힌 채 그러나 과연 그것들이 나인지를 깊이 의심하지 않으면서 나는 살아왔다. 나는 어떻게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지금껏 살아온 것일까. 사람의 몸을 받고 몸에 갇히면서 나는 옹색함의 무거움을 갖게 되었다. 답답한 나! 나는 오래전에 내가 떠났던 세계를 나의 옛 몸처럼 바라본다. 몸 받은 뒤에 점점 멀어진 세계, 한때 나는 세계였으나 지금은 세계와 분리된 옹색한 자일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의 세계를 무수한 내가 파괴한다.
"그리하여 이렇게 밤의 옥상 위에서 고독만이 나의 뼈라고 생각하면서,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먼 봄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G27
"믿고 싶지 않겠지만 어느 날 당신이 태양계의 장님이 되고 은하계의 귀머거리가 되어서 광물질계의 한 벙어리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나 아닌 것들이 모여서 나를 잠시 이루었다. 해체되듯이, 당신도 당신 아닌 세계로 흘러드는 날이 있을 것이다. 이슬, 바람, 흙, 별, 그것들이 본래 당신의 얼굴 아니었나. '눈다랑어'
산문시의 형태로 지어진 이 작품은 풍자 우화를 통한 사회 비판을 담은 기념비적 소설 [동물농장]을 떠올리게 한다. 조지 오웰이 전하고자 하는 사회의 부조리함, 불평등을 드러내는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썼던 대표적인 소설이다. 이것은 오랜 시간을 거쳐 인간의 허위의식과 문명의 진보를 위한 인간의 탐욕을 비판해 온 최승호 시인의 사회문제의 전반적인 우려를 담은 지금까지의 시들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마지막 눈사람]에서 보여준 고독과 절망이 가득한 종말이란 어쩌면 시구 속에 담긴 깊은 뜻처럼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