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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걸 크러시 - '남성' 말고 '여성'으로 보는 조선 시대의 문학과 역사
임치균 외 지음 / 민음사 / 2023년 2월
평점 :
조선 시대의 우리 민족은 결혼, 상장례 일상생활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유교적 예을 정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종법의 실천을 통해 행해졌고 종법은 주자가 주장하는 효 실천의 방법으로 종법의 실천은 남녀 차별과 적서 차별이라는 가부장적 지배문화를 조성하였다. 그 결과,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다소 파격적인 제목이 눈에 띄는 [조선의 걸 크러시]는 남성의 그늘에서 벗어나 역사의 주체가 되어 살아간 여성들이 등장하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의 여성들을 조명하고 있다.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부모의 복수나 며느리를 위해 원한을 갚는 여성 등 복수를 실천한 여성들을 모았고 2부에서는 왜장을 죽인 기생의 이야기, 의병장이 된 여성의 이야기, 조선의 경찰인 다모의 이야기 등 고전 소설의 영웅을 담았다. 3부에서는 남성을 능가하는 여성 시인, 소설가, 학자 등 그녀들만의 방법으로 자아를 실현한 여성들을 모았고 4부에서는 추한 외모를 극복한 여성, 전쟁 중에 사랑과 가족을 지킨 여성 등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지켜나간 여성들을, 마지막 5부에서는 제주에서 정조의 부름에 한양과 금강산을 유람했던 여성 기업가, 조선 최고의 여가수 등을 담은 뛰어난 기개와 재주를 지닌 여성들을 담고 있다.
조선의 여성 검객
안석경이 지은 [십교만록]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로 한 여성이 소응천을 찾아와 첩이 되겠다며 허락해 달라고 하지만 그는 여성의 정체를 의심하며 거절한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왔다는 그 여성을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 그 여성은 술과 안주를 차려 놓고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기 시작하게 된다.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여성은 어느 양반집 아가씨의 몸종이었다. 아가씨가 9살이 되는 해에 권세가에 의해 가문이 멸망당하게 되고 어렵게 목숨을 건진 아가씨와 몸종은 복수를 꿈꾸게 된다. 그녀들은 남장을 해 검객을 찾아 길을 나섰고, 그렇게 2년을 헤매다가 검객을 만나 검술을 배워 하늘을 날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된다.
마침내 원수의 집을 찾아간 그녀들은 인정사정없이 잔인한 복수를 하게 된다. 그렇게 복수를 끝낸 그들은 날 듯 가볍게 돌아왔고 아가씨는 목욕을 마치고 부모님의 무덤으로 찾아간다. 무덤 앞에서 복수했음을 고한 그녀는 원수를 처단한 검으로 자결을 택하게 된다.
"달빛을 타고 춤을 추듯이 칼을 휘둘렀습니다. 칼날이 닿는 곳마다 머리가 떨어져 금방 수십이 되었습니다. 원수의 집 안팎식구들이 모두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습니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우리는 춤추듯 날아서 돌아왔습니다."
이매창, 시골 기녀의 시가 문인들의 마음을 흔드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오랜 친구였던 고결한 성품의 여성이 있었다. 나 역시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처음 들어봤으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이름인 이매창이라는 여성이다. 중인 신분인 아버지와 관아에 소속된 관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 역시 부모의 신분으로 인해 지방 관아에 소속된 관기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그리 예쁘지 않았지만 춤과 노래를 잘했으며 거문고를 특출나게 잘 다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보통의 기녀들도 가진 재주이기에 특별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다른 기녀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기녀들이 갖추어야 할 기예 외에도 시와 문자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녀의 글솜씨는 전국으로 퍼졌고 학자인 허균의 귀에까지 들어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화우 흩날리재 울며잡고 이별한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루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당시 유명한 시인이었던 유희경과 이매창의 사랑 이야기도 흥미로웠는데 평소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유희경은 자신과 같은 천민 출신일 뿐만 아니라 글에도 재주가 있었던 그녀이기에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고 유희경의 그리움을 담은 매창의 시가 가슴에 와닿았다.
석개, 조선 최고의 여가수, 나는 노래하리라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조선 시대 최고의 가수였던 석개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녀는 중종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와 혼인한 여성군 송인의 여종으로 예쁜 외모와는 거리가 있었다.
"얼굴은 늙은 원숭이처럼 생겼고, 눈은 좀 대추나무로 만든 화살같이 찢어졌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 석개는 여종으로의 신분도 잊은 채로 노래만 불렀고 매를 맞아도 그녀는 노래 부르기는 바뀌지 않았고 그녀의 노력을 가상하게 생각한 여성군 송인은 석개에게 노래를 배우게 한다. 곧 그녀는 장안에서 제일가는 명창이 되었고 높은 권세가들의 연회에 불려 다니며 당대의 인정을 받게 된다.
1500년대의 석개가 있던 조선은 바로크 이전의 르네상스 중후기이다. 고음악이라고 불리는 바로크 이전의 조스캥, 탈리스, 라소는 낯설지 않으면서 우리 음악사에 무지했던 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이야기였다.
남성 중심의 조선에서 여성의 기록이란 매우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경이롭고 흥미로운 소재이다. 이 책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조선의 여성들을 살펴보며 가부장적 문화에 종속되어 살아가던 여성들이 당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들을 해내며 살아간 기록을 살펴볼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