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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평점 :
언젠가부터 국내에서 SF 소설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과거의 국내 출판 시장에서는 유독 SF라는 장르는 큰 인기를 얻지 못해서 일까 SF 전문 소설가 역시 흔하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게 10년쯤 지났을까 SF 소설가라고 자청하며 한국문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작가들이 등장했고 지금에 와서는 일반 문학 독자들도 좋아할 만한 매력적인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국내 SF의 전성기를 이끌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는 전성기 이전부터 꾸준히 독자들의 지지를 받아온 작가가 있다. 바로 배명훈 작가이다. 2005년 데뷔 이후부터 기발한 상상력과 탄탄한 스토리 전개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그의 소설들은 '배명훈'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절대적인 신뢰를 얻으며 사랑받아 왔다.
그의 신작 소설집[미래과거시제]는 [예술과 중력가속도]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세 번째 소설집으로 아홉 편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최근 김희선 작가의 [빛과 영원의 시계방], 켄 리우 작가의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와 함께 가장 독특하고 완성도 높은 소설로 읽는 내내 감탄하며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표제인 <미래과거시제>는 언어학과 시간 여행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한 연인의 신비로우면서 애처로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은경은 미로 같은 학교 건물에서 길을 잃고 누구도 이용하지 않는 오래된 계단에서 은신을 만나게 된다. 이 세계의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잘생긴 외모가 먼저 눈에 들어온 은경은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을 위해 그를 찾아다니다, 반년이 지나 그를 만나게 되고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잘 생긴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던 은신은 모두가 가깝게 지내고 싶은 존재이지만 정작 본인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보다는 혼자이고 싶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인사 한마디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은신, 젊은 날의 사랑이 그렇듯 세상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사라진 것은 은경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무언가를 잃는 것이 버거운 나이인 만큼 아파하고 힘들어했다. 시간은 흘러 튀르키예어와 한국어를 연구하던 중 과거 은신과의 대화와 문자에서 시제 선어말 사용의 이상함을 느끼고 그가 시간여행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강은신은 바로 '그 일'을 기억해 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진술했다. 그러면서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은경을 의아하게 여겼다. 자신은 그럴 수 있어도 은경은 그럴 수가 없어서였다.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시간을 살아가는 은경은 절대로 그 일을 기억해서는 안 됐으니까."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접히는 신들>은 주인공 소희는 화성을 목적지로 둔 우주선에서 20년 만에 친구 은경을 만나게 된다. 학창 시절 종이접기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던 그녀는 공부를 못했기 보다는 공부하는 법 자체를 모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종이접기 하나만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녀는 납작한 종이를 거의 살아 있는 듯 보이게 할 정도로 정교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단순 종이접기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접었다 펼쳐놓은 주름을 보고 자신이 만들 무언가를 머릿속에 재현해 내는 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15년 뒤 소희는 민간기구연합에서 행정직에 근무했고 우주 종사자의 소식을 전해주던 소식지에서 은경이 책임급 연구원으로 취직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취직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우주 종사자의 눈에는 엄청난 예산을 집행하는 국방정보산업의 핵심 그룹에 주요 결정자로 영입되었다는 소리 나 다름없었다. 그녀와의 만남으로 은경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국가 기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종이접기라는 거 우주에서는 꽤 유용한 기술이거든. 종이를 접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접는 거지만. 제일 간단한 건, 우주선에 달린 날개 같은 거 있지? 태양전지판. 날개를 펼친 채로 우주선을 발사할 수는 없으니까 접어서 날려 보냈다가 궤도에 오르면 원래 용도대로 펼치는 식으로 디자인을 하는 거야. 공간을 최대한 덜 차지하게 잘 접어놨다가 사고 없이 깔끔하게 촥 펼쳐지게 하는 게 관건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거든."
마지막 단편인 <알람이 울리면>은 판타지 오디세이 기획 전시에서 '징후'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던 소설이다. 작은 눈송이가 내리던 밤, 스케이트를 타는 아내의 배경에서 문득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완벽하게 돌아가던 공원 풍경에서 왼쪽 커브가 아닌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며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오른쪽으로 커브를 도는 스케이트장은 없어."
오른발잡이가 대부분인 사회에서는 모든 트랙은 반시계 방향으로 돌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돌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함감을 지울 수 없었다. 그 후 의심해 본 적 없는 일상에서 하나 둘 스케이트 장에서 느꼈던 이상한 위화감을 다시 느끼기 시작한다.
배명훈 작가의 신작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문학의 발전은 장려해야 하는 일이고 응원받아 마땅하다. 인공지능이 특이점을 도달한 지금, 낯설기만 했던 장르문학이 환영받는 시대가 되었고 유독 한국에서는 '순수문학'과 구분되어 오락성에 가까운 대중문학으로 인식되어 일반 독자들에게 외면당해 오던 장르문학이 역사와 권의를 지닌 순수 문학지에 선을 보이게 된 것은 문학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며 앞으로의 한국문학에 있어서 커다란 획을 그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